도민의견 단순 전달자 역할만...국토부 기본계획 고시 허무한 '동의'
'주민투표' 요청 왜 못하나?...검증은 나중에 국토부 셀프검증으로?
환경영향평가 단계서 권한 행사?...집단지성-도민자기결권 결국 포기?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지난 27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제주 제2공항 관련 발언은 찬.반여부를 떠나 매우 실망스럽다.
기본계획안에 대한 소신이나 입장이 없는 것도 그렇고, 8년째 이어져 온 도민사회 갈등을 풀기 위한 해법도 없었다.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분출된 주민투표 실시 요구나, 기본계획안 의혹 검증 요구에 대한 입장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자칫 국토교통부의 기본계획안 고시에 앞서 제주도에 주어진 '제주도의 시간', 의견 개진의 기회 내지 도민사회 총의를 모을 수 있는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리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오 지사가 기자간담회에서 언급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도지사가 국토부에 주민투표 실시를 요청하라'는 시민사회단체의 요구에서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주민투표 실시 요구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는 부분은 국토부에 전달하겠으나, 도정의 입장으로서 주민투표 실시 요구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단체에서 전략환경영향평가서 및 기본계획안에 대한 검토결과 제기된 의혹과 관련한 검증요구에 대해서는 국토부에 요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방법은 의외였다. 수용은 하되, 기본계획 고시가 이뤄진 후 진행될 환경영향평가 단계에서 이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기본계획안에 대한 '제주도 의견'은 유형별 체계적 정리 등을 통해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결론은 '가감없는 전달'이었다. 종전 밝혔던 입장과 같이 도민들이 개진한 의견을 그대로 전달하는 단순 전달자 역할만 하겠다는 것이다.
도정의 역할, 도민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이 이어지자, 제2공항 기본계획 고시보다는 그 이후의 절차에서 적극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며칠 전부터 예고된 자리였다. 제2공항 관련 쟁점인 주민투표, 그리고 국토부에 제출할 '제주도 의견'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해 언급이 있을 것이란 예고도 있었다. 제2공항 관련 일련의 내용은 즉문즉답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전 충분한 검토를 거쳐 준비된 공식적 입장인 것이다.
그럼에도 내용은 도민의 눈 높이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갈등 해법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도 실망스러웠지만, 쟁점 사항에 대한 발언도 과연 책임있는 도정의 입장이 맞나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앞뒤가 맞지 않거나, 구차한 변명 같은 이유 설명, 논리적 모순도 그대로 드러냈다.
◇ 주민투표 실시 '요청', 왜 못하나
첫째, 주민투표 실시 요청을 거부한 이유만 보더라도 그렇다. 납득하기도 힘들고, 설득력도 없어 보이는 설명으로 일관했다.
오 지사의 입장은 법적으로도 어렵고, 현실적으로도 어렵다는 것이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현행 법률상 국가사무(국책사업)의 경우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라는 점, 현실적인 측면은 국토부에서 이미 주민투표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인 의사를 표했고, 실무적으로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을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요청' 자체를 하지 않는 사유로 보기에는 불충분한 점이 있다. 역으로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도정의 입장에서 '요청'을 못할 사유는 없다.
현행 주민투표법 7조(주민투표의 대상)에서는 국가 사무의 경우 지자체에서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다고 규정돼 있다. 이 부분은 오 지사의 설명이 맞다. 그럼에도 제8조(국가정책에 관한 주민투표)에서는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국가정책의 수림에 관해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해당 지자체장에게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경우 행정안부장관과 협의하도록 하고 있다.
즉, 국토부 장관의 결심에 따라서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오 지사의 말대로 국토부가 주민투표를 안하겠다고 이미 의사를 표현한 상황이어서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도지사가 도민의견으로 접수된 사항에 대해 '요청' 자체를 못할 이유는 뭔가. 지레짐작으로 요청 요구를 묵살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면, 왜 시간 끌기를 했나
둘째, 주민투표 요청이 어렵다면, 단지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면, 왜 진작에 그런 의사를 밝히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시간을 끌어온 이유가 궁금하다.
주민투표는 8년째 이어져 온 찬반 대립상황의 종지부를 찍을 '도민 자기결정권'의 방안으로 제시돼 왔다. 기본계획안에 대한 도민의견 수렴이 시작된 지난 3월부터 반대단체를 중심으로 주민투표 실시 요구는 크게 분출됐다. 5월에는 도민 1만 3000여명의 서명이 담긴 주민투표 요구안이 제주도정에 전달됐다.
반면, 도민 의견 수렴이 종료된 후 지난 두 달간 오 지사는 주민투표 요청에 대해 가타부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시민사회단체에서 도민자기결정권 실현의 방법으로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하며 거리에 나서 집회를 하고, 도청을 찾아 촉구할 때도 그냥 "검토 중"이라고만 했다.
이번에 주민투표 실현이 어렵다고 밝힌 사유, 단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면, 시간을 끌 필요 없이 진작에 밝혔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희망 고문'을 가하다 퇴짜를 넣은 셈이다.
◇ 검증 요구의 논리적 모순...기본계획엔 그대로 담고, 나중에 살펴보자?
셋째, 검증 요구에 대한 입장도 그렇다. 시민사회단체 요구를 수용한 것처럼 설명했으나, 내용을 엄밀히 따져보면 '불수용'에 가깝다. 앞뒤가 맞지 않고, 논리적 모순도 드러낸다.
시민사회단체에서 검증을 요구한 내용은 크게 △제2공항 건설 계획의 적정성 문제(수요예측의 적정성) △조류 서식지 보호 및 조류충돌 위험성 문제 △숨골 및 지하수 보전 문제 △법정보호종 보호 방안 △제2공항 후보지 부지 내 용암동굴 분포 가능성 문제 등 5가지이다.
오 지사의 입장은 수용은 하되, 시기는 기본계획 고시 절차 단계가 아니라, 고시가 이뤄진 후 진행될 환경영향평가 용역에서 이 내용에 대한 검증이 이뤄질 수 있도록 국토부에 요청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국토부에 일임하겠다는 것으로, '셀프 검증'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검증 요구의 본질적 내용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단체이 검증 요구는 별도 검증위원회를 구성해 하자는 취지다. 오 지사가 요청하겠다는 내용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 지점에서 심각한 논리적 모순도 나타난다. 제기된 5가지 의혹은 전략환경영향평가 및 기본계획안에 대한 검토결과에서 제기된 내용들이다. 제주도가 이 부분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국토부에서 기본계획 고시를 하게 되면 이 내용이 담긴 기본계획은 그대로 확정된다. 즉, 5가지 의혹 제기는 기본계획 고시 절차에서 검증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혹 검증을 환경영향평가 과정에서 하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기본계획 고시에 정상적으로 담긴 내용에 대해 환경영향평가 단게에서 늦깎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 다름 없기 때문이다.
◇ 두달간 끌어온 '제주도 의견', 모양과 형식만 고민했나
넷째, 국토부에 제출할 '제주도 의견'은 끝내 '무(無) 입장'을 고수했다. 도정의 입장은 전혀 없고, 접수된 의견을 유형별로 분류해 그대로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말이 좋아 '가감없는 전달'이지, 단순 전달자 역할만 하는 '소신 없는 도정'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무 입장'의 의견 전달은 국토부의 기본계획 고시에 대한 '동의'에 다름 없다. 한편으로는 원희룡 장관의 행보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사실상 협력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의견서가 제출되면 제2공항 건설계획의 고시는 기정사실화 된다. 빠르면 10월쯤 고시가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제주도에 주어진 전략적 대응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물론 도정 입장에서는 억울해 할 수 있다. 접수된 의견을 갖고 어떻게 입장을 정리하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정은 의견수렴이 시작될 때부터 '가감없는 전달' 프레임에 매몰돼 있었다. 민선 8기 도정 출범 때 약속했던 '실용적 접근법 및 집단지성에 의한 문제해결'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도정 출범 1년차 때부터 집단지성 프로세스를 실행시켰어야 했다.
도민의견 수렴이 끝난 후 두 달간, 도정은 '제주도 의견'에 어떤 내용을 담아낼까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모양과 형식, 포장방식만 고민해 왔다. 이 결과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기본계획 고시를 묵시적 동의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다. 참으로 답답한 도정이다.
◇ 왜 꼭 환경영향평가 절차단계의 '시간'만 중요한가
다섯째, 왜 꼭 환경영향평가 절차 단계의 중요성만 강조하는가. 오 지사는 '제주도 의견'이 단순 전달에 그치면서 '도민 자기결정권' 시기를 놓친 것 아니냐는 지적에, 기본계획 고시 절차보다는 그 이후 절차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공항 건설 사업에서 지자체장의 권한이 상당히 제약돼 있음을 전제하며, 고시 이전보다 이후가 권한이 더 크고 많은데, 권한의 크기가 큰 과정에서 역할이 중요하다는 논리다. 이는 기본계획 고시는 국토부의 판단에 맡기고, 제주도에서 권한이 있는 환경영향평가절차 과정에서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환경영향평가 절차가 끝나야 최종 결정이 이뤄진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행정절차상 제2공항 기본계획 고시가 이뤄진다면, 그 다음 기본설계 및 실시설계에 들어가고, 이 과정에서 환경영향평가 절차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환경영향평가 동의절차가 마지막 관문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도 도지사의 역할과 권한은 제한적이다. 도지사가 의지를 갖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갈등관리지역 지정' 뿐이다. 심의는 환경영향평가심의위원회 몫이다. 다만 심의위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동의', '보완동의', '재심의' 3가지 뿐이다. '부동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심의위에서 심사를 통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 '동의'를 하고, 도의회에 동의안을 제출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동의, 부동의 권한은 도의회가 행사하게 된다.
결국 '주어진 권한'만 따진다면, 기본계획 고시 과정이나, 환경영향평가 절차에서 제주도정의 역할은 미미해질 수밖에 없다. 기본계획 고시는 국토부에, 환경영향평가는 도의회에 책임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본계획 고시 후에는 도민들의 자기결정권 행사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환경영향평가 절차는 그야말로 환경성에 관한 내용이다. 시민사회단체에서 "환경영향평가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도민에게 물어보고 결정할 것인가"라며 오 지사의 입장을 정면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정의 논리대로라면, 도민들의 자기결정권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도민의 자기결정권' 포기라는 힐난이 나오는 이유다.
도민사회 갈등과 분열도 해결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채 또 다시 마냥 미뤄지게 됐다. 오 지사의 말대로 환경영향평가 절차에 가서 논의를 한다면, 환경영향평가 용역이 마무리되는 1~2년 후에 다시 논쟁이 재연될 수밖에 없다. 갈등의 종지부는 커녕, 2025년 이후에도 제주사회는 계속 찬반 논쟁의 회오리가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진정 갈등해결의 의지가 있다면,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한다. 공개검증 요청도 진정이라면, 환경영향평가 용역 때 반영해달라가 아니라, 기본계획 고시 전 공개 검증위원회를 꾸려 실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지금 도정은 기본계획 고시단계에 주어진 '제주도의 시간'을 너무 가벼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 '현 공항 확충은 어렵고...' 오 지사의 생각은 도대체 뭔가
여섯째, 오 지사의 제2공항에 대한 입장은 도대체 뭘까.
오 지사의 취임 후 1년 제2공항 관련 입장은 많은 헷갈림을 주고 있다. 지난 4월 도의회 도정질문 답변에서는 공항시설 확충은 필요하나, 현 공항 확충으로는 어렵고,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현 공항 시설 확충이 어려운 이유로 2015년 국토부의 사전타당성 조사 용역결과, 그리고 ADPi(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 보고서에 대한 국토부의 검토결과, 두 가지 차원으로 설명했다.
국토부의 2015년 타당성 검토에서도 현 공항 확충은 어려운 것으로 제시됐고, ADPi가 현 공항 확충방안을 제안했을 당 국토부 항공정책심의위원회에서 검토한 결과 불가로 결론이 난 점을 들었다. 이는 모두 '국토부 논리' 그대로이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2015년 국토부의 사전타당성 조사는 후보지 평가부터 잘못됐고, 부실 조사여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주장해왔다. ADPi 보고서와 관련해서도 현 공항 확충으로 충분한다는 검토의견을 제시했음에도 용역과정에서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고, 국토부가 이 내용을 은폐해 왔다고 주장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던 바 있다.
그럼에도 오 지사는 공항시설 확충 대안으로서 '현 공항 확충'은 어렵고, 제2공항을 포함한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국회의원 시절 제안했던 '정석비행장 활용론' 내지 '제2공항'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오 지사의 제2공항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번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제2공항 입장, 도민사회 갈등과 혼돈은 오히려 더 심화되지 않을까 걱정이 크다.
민선 8기 도정이 출범하면서 도민들은 제2공항 갈등해결 약속을 믿었건만, 갈등과 대립, 혼돈의 터널은 좀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실용적 접근법'과 '집단지성', 그리고 '도민 자기결정권 실현'은 한낱 미사여구였나. <헤드라인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