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새로워진 감귤산업 도전에 걸맞은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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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새로워진 감귤산업 도전에 걸맞은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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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입춘 후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가 가속화 되고 있는 듯하다. 예년과는 달리 주야온도교차가 심한 게 특징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속도라면 감귤개화기도 앞당겨질 것이고, 감귤생육상도 변하여 경험에 익숙한 농업인들도 대응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특히 우려되는 게 슈퍼태풍이 제주에 내습할 가능성이 점점 커져 감귤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경험으로 이뤄진 지식체계로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도 없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게 자연계의 형상이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은 조짐 또는 징조에 가까울 수도 있는데 조짐이 현실로 드러날 경우에는 그 결과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세계가 열리고 펼치게 되어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지식으로 예견하는 것은 물론 해결할 수가 없다. 새로운 감귤산업이다 라고 하기 보다는 새로워진 감귤산업으로 표현해야 더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즉흥적인 사고로 임기응변의 탁상정책을 펼쳐보았자 현장에서는 시행착오만 되풀이 될 뿐이었고, 발하여 이루는 발달發達하여 변모하는 변화는 읽을 수가 없었다. 감귤 세계는 동사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전문가의 생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자세가 문제이다.

후진적인 전문성으로는 선진적인 활동성을 포착할 수가 없다, 새로운 해를 바라보고, 감탄하고 다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자기 앞에 있는 그해를 새로워지게 하는 게 더욱 진실하다. 새로워진 일에 관해서는 오래된 중국의 고전 『대학』에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날로 세워지고, 날이면 날마다 새로워지며,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다산 정약용은 이 책 제목을 대학大學이 아니라 태학太學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고급 교육이 아니라 통치자에게 하는 교육내용이었다는 것이다.

내용은 위정자나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이 새겨야 하는 말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제는 통치 지배력의 주도권을 시민이 가지는 민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누구나 새겨야 할 말이다. 사업이든 기업이든 리더 라면 누구나 새로워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새로워진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 그 이유는 생존의 터전인 세계가 계속 변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새로운 곳으로 계속 이행하는 운동을 우리는 변화라고 한다,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아 번성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인간이나 동물에게 모두 맞는 말이다. 심지어는 역사나 사상 혹은 이념이나 가치관에도 모두 해당되는 원칙이다.사람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세포가 계속 교체되기 때문이다.

옛 세포가 새 세포로 바뀌어 새로워지지 않으면 병들거나 죽는다. 뱀도 허물을 벗어야 산다. 허물은 옛집이다. 어떤 이유로든 옛집에 남아 안주하고 있으면 죽는다. 뱀만 그러하랴. 세계는 변화하는 것에 따라 이념이나 가치관도 바뀌지 않으면 그 이념의 주인도 따라서 도태된다. 논의가 미래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과거의 주제들로 채워지는 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을 한비자는 말하고 싶어 했다. 바보는 과거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 세계는 계속 변화하고 있는데도, 멈춰 서서 변해가는 세상만 탓하고 있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창의적인 번영을 가져다주겠는가 말이다.

오늘날 제주감귤의 현상을 미리 내다보고 하는 말 같아서 가던 길을 멈춰선 채 멍한 상태가 된 듯, 방향감각이 없다. 과연 몇 백 년 전 사람들보다도 못한 존재가 감귤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갑론을박하는 게 아닌지. 리더의 자질을 갖추었다는 듯이 동분서주하고 있는 지 생각하게 되었다. 지도자라 함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까? 사회나 조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끌고 가는 사람, 물론 이런 사람도 리더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지도자는 우선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끌고 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리더이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삶을 자기가 끌고 가는 사람한테는 카리스마가 생기고 향기가 나게 마련이다. 대중들은 그 향기를 따라서 믿고 가는 것이다. 단지 좋다와 나쁘다 둘 중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면 아직 내적으로 성숙한 주체력, 이것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리더로서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자기가 온전히 자기 내면의 생명력에 의거하여 자기 삶의 유형을 창조하고 책임지면 고급 삶이고, 타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삶의 유형을 수행한다면 낮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류의 삶은 아닐 것이다. 다른 표현은 빌리자면 탁상공론에 그치지 말고,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도록 순수한 제주 감귤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해야 한다.

좋다 나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면 그저 정치적 판단을 했을 뿐이다. 인문적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적 판단은 자기 머리 속에 있던 자기가 믿고 있던 신념, 이념, 가치관에 따라서 세계와 만나거나 혹은 그 것을 근거로 해서 세계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좋다 라거나 나쁘다고 한다는 것은 인문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 길들어져 있다는 애기이다. 인문적 통찰은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이 위대한 리더를 성인聖人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인은 일반인과 다른 특징이 있다. 다른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 뭐냐? 바로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한비자韓非子는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아주 작은 현상을 보고 사태의 조짐을 알고, 그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최종 결과를 안다(성인견미이지맹聖人見微以知萌, 견단이지말見端以知末). 조선의 철학자 이익은 눈앞에 나타난 조그만 일을 보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닥치기 전에 혼자 깨닫는 것 즉 먼저 아는 일(선견先見)을 할 수 있다 라고 했다. 바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의 능력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인들은 온갖 외국 유학, 또는 감귤산지를 찾아다니는 열정을 보이면서도 자기가 처한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어떤 책임감을 발휘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한없이 배우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원심력을 타느라 정작 지성의 중력은 상실해 버린다. 여기서 중력은 지성의 본령을 말한다. 지성의 본령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책임성을 느끼고 무엇인가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목적은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현실에서 적절하고 의미 있는 행위를 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자신의 성숙을 궁극으로 이끌고, 그 결과로 사회를 더 좋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식인이 나타나야 될 것이다.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업협동조합장>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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