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가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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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가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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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는데 잠시 S.N.S를 보는 중에 알람을 클릭했고 바로 백신 예약이 완료되었다. 토닥토닥 내리는 비가 점점 거세어져서 우산을 펼쳐 들고 걷는 길이 즐거웠다. 참방참방하는 길을 따라 병원을 찾아서 가는 길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놀이가 되었다. 접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예전에 선물 받은 죽 세트를 구입하고 두부를 사고 순두부 젤라토를 먹었다. 마침 갠 길을 걷는데 노래가 흘러나왔다. 세뇌에 가까운 긍정 마인드에 거부감이 있는 터라 조금 놀랐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운의 혜택을 종종 받기도 한다. 운이라는 것이 그러나 타고난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것을 보면서, 노력과 성실의 대가보다는 운에 의해 좌우되는 계층적 현실을 목도하면서, 보잘것없는 현실에 무한 감사를 드리며 안존하는 것과 자신이 가진 운이 사실은 일종의 유산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그 운이라는 것이 골고루 공평하게 나뉘는 사회, 그래서 운에 기대지 않아도 되고 기대하지 않아도 생활이 지탱될 수 있는 사회를 간절히 바랐다.

가끔 찾아오는 내 작은 운에 감사 기도를 하면서, 이 기도가 단지 나만의 복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자산은, 하다못해 조금 더 성능 좋은 휴대폰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고 휴대폰을 지니지 못한 사람,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사람들에겐 다가오지 못한 운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공들여 열심히 알람을 클릭하고 알아보았다는 노력도 사실은 내가 가진 작은 자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운이라는 것도 사실 얼마나 계층적인가.

계층은 상위에 가까울수록 운과 맞닿아 있고 그 운의 확장은 그만큼 큰 힘을 획득하기 쉽게 만든다. 많은 정치가와 자본가가 감옥에 가서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그 운이라는 것은 그간 모여진 권력 사용의 다름 아니다. 물론 다들 노력은 했으리라. 하지만 이 신자본주의 사회가 횡포로 다가오는 계층의 사람들의 죽음을 담보로 할 만큼 힘겨운 노력과 자본과 기회가 넘쳐나는 사람의 노력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고공에서 투쟁하고 단식을 하는 그들이 과연 운이 없어서일까, 노력하지 않아서일까.

후지이 타케시의 책 『무명의 말들』에서는 “세월호 유가족, 특히 부모의 이야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이 ‘가해자로서의 승인’이다. 유가족들이 계속 싸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피해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포도밭, P.59)라고 적었다. 이 글을 읽고 순간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스스로 가해자임을 깨달아야지만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자각하면서 끊임없이 내가 가진 ‘가해자의 위치’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다.

젠더 권력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즉 시스 젠더로서 살아가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상화되고 타자화되어 여성혐오의 폭력에 노출되는 어려움 속에서 그 불합리함을 대항해 싸울 때조차도 나는 내가 지정성별 여성이라는 것에 고민하지 않았다. 그를 만난 것은 그래서 내게 작은 돌멩이 하나 던져서 크게 파문을 일으키는 그래서 더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운이 좋아서 성별 정체성에 고민하지 않고 살아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했던 많은 언행들이 그를 포함한 그들에게 어쩌면 폭력이 될 수 있었다는 깨달음은 그의 밝은 미소로 정정해주던 단어들로 인해 구체화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울면서 전화가 왔었다. 성소수자 활동가이자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제주 출신 정치가의 길을 걷던 그가, 무수한 가해자들의 횡포로 인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상의 직업인으로 살아가면서 원치 않게 호르몬 치료를 못 받게 되어 다시 겪는 성별 불쾌감(Gender Dysphoria)이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상태를 알 수 없어서 어떤 말로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울음이 잦아들길 바랐다. 우리는 그간 시스젠더로서 트렌스젠더에게 얼마나 많은 가해를 해 왔는가. 시스젠더의권력이 지닌 폭력은 얼마나 사소하고 잔인했던 걸까.

운이라는 것은 축소되고 평등은 확장되는 사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자각하고 그 힘을 자각하고 그 폭력성을 자각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자신이 누리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긍정함으로써 사회구조적약자의 통곡을 가리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이기적인 긍정을 버리고 통곡하는 이들의, 운도 없는 이들의, 낮아서 엎드려야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의 불행을 아파해야 하지 않을까. 아스팔트 귀퉁이에 핀 꽃을 보고 저런 데서도 꽃이 피네, 하며 그 생명력을 찬양하기보다는 인간 중심적으로 설계된 도시 문화로 인해 내몰리는 존재들의 힘겨움을 상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8월 13일은 내몰리어 피면서도 끝없이 꽃씨를 날리던, 앞서 언급한 그, 故 김기홍 님의 생일이다. 제주 퀴퍼에서 샤우팅 하던 그의 밝고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려 본다. 다시는, 더는, 구석에 내몰려 피었다가 사회적 죽임을 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소망하던 그를 떠올린다. 운 좋게 운 나쁘게 존재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한정선 / 웹매거진 멍Mung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사람 프리즘'의 글은 <웹매거진_멍Mung>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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