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느끼는 존재로서 동물인, 우리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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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느끼는 존재로서 동물인, 우리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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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정규직을 거듭하면서 비혼으로 지방에 살아가는, 중년의 몸이다. 교차하는 내 소수자 정체성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 범위에서 튕겨 나가 부유하는 삶의 일상화다. 여성으로 기능하는 몸을 가진 내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 “살女주세요.”라는 구호에 그토록 큰 공명이 된 것은 그만큼 젊은 시절 일상의 위협이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TV 뉴스에서 한 토막으로 기사화된 殺처분 되는 동물들을 보았다. 그들은 분명 산채로 커다란 구덩이에 미끄러지고 발버둥 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맞닥뜨린 낯선 세상과 죽음이라는 이중의 공포 때문이었다. 인류가 개발한 지옥, 평생 살아온 공장식 축산 현장이 아니라서 처음 보게 된 세상에 대한 두려움, 처음 땅에 발을 딛고 처음 햇살을 느끼고 처음 비를 맞아보고 처음으로 자연 바람을 느끼는 날이 바로, 죽는 날이었다.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태어났더니 축산케이지에서 오직 신선한 ‘고기’로만 존재하다가, 취급 부주의로 발생한 질병에 대한 최종 판결이다.

나는 살女주세요와 殺처분 사이에서 방황을 거듭했다. 생존 자체가 개별적 존재로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서, 생명은 생명으로서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動物’로서 묶이는 모든 존재는 그 ‘움직임’ 안에 이미 자유 의지가 내장되어 있을 터인데, 이토록 다양한 소수자들과 비인간 동물은 그 기능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평등이나 공평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차별받고 배제되는 현실 안에서 웃는 자는 누구이고 그 웃음에 눈치 보는 자는 누구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여성들은 자궁과 오나 홀로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꾸밈노동에 태업하고 웃음과 애교를 보이콧한다. 장애인들은 완전한 장애인등급제 폐지와 장애인의 노동권을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들은 요양원과 정신병동 등 코로나를 정면으로 관통하면서 가시화된, 시설 이용자인 노인과 질환자와 종사자의 비참한 일상을 분노한다.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사회가 빚어낸 노동 소외 현실에서 정부의 무능을 지적한다. 성소수자들을 특정 종교가 가해하며 혐오를 정치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서로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불평등의 끝자리에서는 이주자, 난민과 함께할 인권 연대의 힘을 마련해간다. 이렇듯 다양한 몸이라는 이유로 ‘정상성’에서 미끄러지고 비켜난 상태에서도 끝내 맞서왔다. 존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한목소리로 고민하는 이들조차 때론 묻는다. 동물권은 과연 동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가, 동물의 상황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그들을 대변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 중심적인 건 아닌가. 종차별은 자연 현상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반려동물이 먹는 육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직접행동 DxE>는 탈의한 가슴에 피를 묻힌 퍼포먼스로 우유 생산과 소비의 폭력을 가시화하거나 육식에 대항해 ‘음식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선언으로 시위를 이어가고 비질(Vigil)을 통해 공장식 축산의 현실을 고발하는 동물권 단체다. 그들은 돼지 “새벽이”를 종돈장 분만사에서 공개 구조하였다. 무수한 죽음의 시간을 뚫고 살아나온 새벽이는 그 후 동물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는 돼지답게 진흙으로 몸을 정갈히 하고 맛있고 영양 갖춘 식사를 하고 나이에 맞게 자라고 있다. 단체는 새벽이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낮지만, 힘 있는 말을 건넨다. “느끼는 존재”인 인류가 나누는 “동물로서의 연대”.

동물의 언어를 모를지라도 우리는 안다, 느끼는 존재로서의 동물이라는 종 전체가 가지는 공통감각을. 느끼는 존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동물복지농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복지인가. 고통을 절감하는 방법으로 방사된 동물은, 이전 케이지보다 조금 넓어진 공간 안에 있으니 덜 고통스러울까. 고통을 순위 매김으로써 얻는 이득은 동물에게 있는가, 인간에게 있는가.

살아 움직이는 모두가 환희든 고통이든 감각하고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일상을 침범하고 부수고 대상화해온 지난 모든 관습을 재논의해야 한다. 여기에 비인간동물이 배제돼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한정선 / 웹매거진 멍Mung 작가>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사람 프리즘'의 글은 <웹매거진_멍Mung>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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