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제주인(人)의 길을 밝힌 향현 진용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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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인(人)의 길을 밝힌 향현 진용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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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2] 보물 '지영록'과 광산김씨 문간공파 세보에 실린 '홍화각 중수기'의 기문

지난 (1편)주요내용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은 조선 중기 제주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제주 교육의 선도자로서 향현(鄕賢)으로 추앙되어 현재 오현단에 소재한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된 인물이다.

「홍화각 중수기」는 선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유고(遺稿)인데, 필자는 「역주 지영록(2019년)」과 광산(光山)김씨 기미(1979년) 족보에 그 기문이 등재되어 있는 것을 지난해 10월에 알게 되었다.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는 1649년(仁祖27년) 김여수(金汝水) 목사(牧使) 가 홍화각을 중창(重創=重修)한 사실을 진용 선생이 집필한 기문이다. 「역주 지영록」과 광산김씨 족보에 실린 내용이 서로 같지 아니함은 둘 다 필사본이라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영록(知瀛錄)」은 이익태 제주목사가 재임 시에 저술한 것으로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02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크게 지혜로운(大知) 제주교육의 선각자인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弘化閣重修記)」의 기문(記文)을 살펴본다.

○ 弘化閣重修記(홍화각 중수기)

己丑二月庚寅朏越八日丁酉 重創弘化閣而落之 因記其事 (*己丑은 「淸順治六年」(1649년)이며, 順治는 청나라 세조(쿠빌라이) 때의 연호(1644~1661년), 조선 仁祖27년과 같은 연대이다.)

→기축년(1649년, 인조27) 2월 8일 정유일에 홍화각을 중창하여 낙성하였으므로 그 사실을 기술한다.
 

弘化閣者 古萬景樓之改搆者也 自三那胥宇之後 曰止曰時 築室于玆

→홍화각(弘化閣)은 옛 만경루(萬景樓)를 고친 것이다. 삼을나(三乙那)가 터를 살핀 후에 이곳에 머물고 이곳에 집을 지었다.
 

元世祖 得天下時 仰占房星 牧馬於此地 於焉作室 名之曰 萬景樓 蓋取景 而物換星移 度幾春秋耶(*(物) 자는 지영록의 원문에는 쓰여 있지 않다.)

→원(元)나라 세조[쿠빌라이]가 천하를 얻었을 때 방성(房星, 말의 수호신)을 올려다보고 이곳에 말을 키웠다. 이에 건물을 지어 ‘만경루(萬景樓)’라 이름 하였으니, 대개 경물에서 취한 것이다. 만물이 바뀌고 별이 옮겨진 것이 몇 해이던가?
 

我本朝正統二年 都安撫使兼判牧事崔公海山 適因失火 爰謀改搆 以爲守土之鈴閣 而易其題額曰弘化閣 (*正統은 명나라 영종(明英宗)의 연호(1435~1449 제위), 정통 2년은 1437년으로 조선 [世宗19년]과 같은 연대임)

→우리 조정은 정통 2년(1437년, 世宗19)에 도안무사겸판목사 최해산(崔海山) 이 마침 실화로 이에 고쳐지으면서 이 땅을 지키는 영각(鈴閣)으로 삼고 그 제액(題額)을 바꿔 홍화각(弘化閣)이라 하였다.
 

蓋弘王化遠被之意 則其義 固非偶然 而記其顚末 懸諸壁上 乃鄕人禮曹叅議 高得宗所撰也

→대개 왕의 교화를 넓혀 먼 곳에까지 미친다는 뜻이니, 그 뜻이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그 전말을 기록하여 벽에 걸어놓았으니, 바로 제주 사람 예조참의 고득종(高得宗)이 지은 것이다.
 

當時經理之際 亦不能新辦什物 取諸都近川舊刹材瓦 而補用 故猶未免狹隘 而苟容矣

→당시 개조할 때에도 역시 새로운 자재를 갖출 수 없어 도근천(都近川)에 있는 옛 사찰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보태어 사용하였다. 때문에 좁고 협소하여 구차한 모습을 면할 수 없었다.
 

移衙之後 以爲營庫 本島所産 陸地所無之物 國用之備 御供之需 皆藏於此 而進貢焉 則實係於爲下奉上之道 人臣職分所當 恪謹守護 不容少緩之地 而歲久頹撓 撐柱扶顚者 已有年矣 (*而進貢焉은 지영록에는 而進貢馬로 쓰여 있다.)

→관아를 옮긴 후에는 영고(營庫, 감영의 창고)로 썼다. 본도에서 생산되는 것은 육지에 없는 물건이므로, 나라에 쓰이는 것과 임금에 바치는 수요들은 모두 이곳에 쌓아놓았다가 공물로 바쳤다. 그러니 실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받드는 일과 관계된 것이며, 신하의 직분으로 마땅한 바이니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기둥이 무너지고 휘어져 넘어지는 것을 떠받치는 것이 여러 해였다.
 

或憚於民力之煩夥 或拘於豐凶之差池 遷延不改 令人咄嗟 崔公所謂弘王化 達民情之義 至此而將無所寓矣

→혹 백성들이 번거롭게 한다고 꺼리고, 혹 농사 작황의 차이에 구애되어 미루다 고치지 못하니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최공(崔公)이 이른바 왕의 교화를 널리 펴서 백성의 마음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뜻은 여기에서는 장차 의탁할 바가 없게 되었다.
 

歲在丁亥孟夏上浣 牧使海城君金侯汝水 繫纜于此 上官之後 回瞻其頹挫支柱之狀 慨然興嗟 私自心語 以爲允興土木 則蠢民雖怨 予造國事 豈可以與民慮始而媕阿 終不繩武於先正之攸底法乎

→정해년(1647년, 仁祖25) 초여름 상순에 목사 해성군(海城君) 김여수(金汝水)가 이곳에 배를 대고 도임(到任)한 뒤에 그 지탱해주는 기둥이 무너지고 꺾인 모습을 돌아보고는 개연히 탄식하였다. 마음속으로 “진실로 토목공사를 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원망하겠지만, 내가 나라의 일을 맡았으니, 어찌 백성들과 시작을 도모하려다가 우물 쭈물거려 끝내 선대의 현인(賢人)이 만든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였다.
 

決意改修 而數年饑饉之餘 民生困悴 適當秀葽不可奪時 故姑緩其期 以待西成 (*수요(秀葽)는 아기풀이 패는 계절을 뜻하는 말로 음4월 농번기를 말한다.)(*서성(西成)은 추수를 말한다. 서쪽이 가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뜻을 정하고 개수하기로 결심하였는데, 몇 년간의 기근에 민생이 곤궁하고 초췌하였다. 마침 음4월이 되어 농사철을 뺏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잠시 그 기간을 늦추고 수확을 기다렸다.
 

而此地 本無瓦匠與木工之妙手 皆招於越海近邑而致之 預先陶瓦於廣壤土黏之地 而與其賃力之直焉 是歲秋稍熟 翌年戊子夏 兩麥俱熟 秋又大有

→이곳에는 본래 기와장과 능숙한 목수가 없었기에 모두 바다 건너 가까운 고을에서 불러들이고, 미리 광양의 점토로 기와를 굽고 품삯을 주었다. 이해 가을은 조금의 수확이 있었고, 다음 무자년(1648년, 인조26) 여름에 양맥[겉보리와 쌀보리]이 모두 여물었으며 가을에는 큰 풍년이 들었다.

왼쪽부터 지영록(보물 제2002호)의 역주본과 지영록 역주본의 기문. 자료=김정호.
왼쪽부터 지영록(보물 제2002호)의 역주본과 지영록 역주본의 기문. 자료=김정호.
왼쪽부터 광산김씨 문간공파 세보 권1과 광산김씨 세보의 기문. 자료=김정호
왼쪽부터 광산김씨 문간공파 세보 권1과 광산김씨 세보의 기문. 자료=김정호

率其陸來都料匠及治下若干梓人 親徃於金寧林 再信而伐木 曳下沿邊 載船浮泊於州城之底 (*재신(再信)은 ‘이틀 밤을 거듭하여 자다.’ 라는 뜻으로 4일 밤을 묵다. /信宿: 이틀 밤을 자다.)

→육지에서 온 도목수와 제주목에 약간의 목수를 이끌고 몸소 김녕숲으로 가서 4일 밤을 묵으면서 벌목을 하고 나무를 해변으로 끌어다가 배에 싣고 제주성 아래에 정박하였다.
 

「以當番軍卒 移運於州中 不過一面民丁 數日之役 而因以有事 則恐傷民力 故經始不亟 又待可爲之隙矣 禾稼旣同之後 民皆鼓腹 可與樂成」 (*以當…·· 樂成까지의 문구는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

→「당번 군졸들에게 제주성 안으로 옮기게 하니, 일개 면의 장정이 며칠간의 부역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일로 인하여 백성들의 힘이 손상할까 두려웠기에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다시 할 만한 틈을 기다렸다. 곡식을 수확한 후 백성들이 모두 배를 두드리니 같이 즐겁게 일을 이룰 수 있었다.」

'궷물' 김정호ⓒ헤드라인제주
광산김씨 대교동파 37세 정호(正虎) ⓒ헤드라인제주

※광산김씨 족보의 「홍화각 중수기」는 선생의 4세손 養遠公이 필사하였고, 11대손 宗根(제8대 도의회의장 김용하의 선친)씨가 소장하여 전하여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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