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제주 교육 선도한 향현 진용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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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제주 교육 선도한 향현 진용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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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3] 보물 '지영록'과 광산김씨 문간공파 세보에 실린 '홍화각 중수기'의 기문

지난 (2편의)  주요내용

1647년(仁祖25)에 해성군(海城君) 김여수(金汝水)가 제주 목사로 부임하여 그 각(閣)이 무너지고 기둥이 꺾인 모습을 돌아보고는 개연히 탄식하여 개수(改修) 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기와장과 능숙한 목수가 없었기에 모두 바다 건너 가까운 고을에서 불러들이고, 미리 광양의 점토로 기와를 굽고······, 육지에서 온 도목수와 제주목에 약간의 목수를 이끌고 몸소 김녕숲으로 가서 4일 밤을 묵으면서 벌목을 하고 나무를 해변으로 끌어다가 배에 싣고 제주성 아래에 정박하였다.

1648년(인조26) 여름에 양맥이 모두 여물었으며 가을에는 큰 풍년이 들었으므로, 그 수확이 끝나기를 기다려 공사를 시작하니 즐겁게 일을 이룰 수 있었다.

越若來十一月十八日戊寅 爰始丕作 而服役 則只使入番之輩 五日相遆 不及於村閭之氓 而惟弘化一閣 仍其舊貫 檃括而補輯之(은괄(*櫽括 : 기울어지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지난 11월 18일 무인일에 비로소 크게 일을 시작하였지만, 노역은 그저 번을 서는 사람들을 5일마다 서로 교체하게 하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일이 없었다. 오직 하나의 홍화각만이 옛 모습을 그대로 하되, 바로잡고 보완하였다.

其餘東西南三面 則曾是空地 惟有毁垣 而垣內舊有草屋數間 乃官家日用之物所藏之處也 隘陋卑濕 荒穢杌捏 不愜於藏守之所 而每年乘屋之節 及風雨之時 村巷農民 苦厭其于茅索綯修治之頻煩矣

→그 나머지 동·서·남 3면은 일찍이 빈터여서 오직 무너진 담이 있고, 담장 안에는 예전부터 초가 몇 칸이 있었으니, 관가에서 일상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소장하였다. 좁고 누추하고 낮아 축축하며 더럽고 위태로워 물건을 보관하는 곳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매년 지붕을 일거나 비바람이 칠 때면, 마을 농민들이 띠로 줄을 꼬고 지붕을 수리하는 일이 빈번한 것을 괴로워하였다.

今者專用新造材瓦 自弘化閣東角 直抵雨蓮堂北隅 因繚於觀德亭廚舍之北 還屬於弘化閣之隩跡

→이제 목재와 기와만을 사용하여 홍화각의 동쪽 모퉁이에서 바로 우련당(雨蓮堂)의 북쪽 모퉁이에 이르고 관덕정 부엌 북쪽을 둘러서, 다시 홍화각의 모퉁이로 이어진다.

其本意 不徒爲藏物之庫也 或爲監裨守吏庫子之容宿 或爲工匠役夫之所處

→그 본래의 뜻은 다만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일 뿐 아니라, 혹은 감비(監裨) 또는 수리(守吏)나 고자(庫子) 등의 숙소로 한다거나, 혹은 공장(工匠)이나 역부(役夫) 등의 처소로 삼았다.

而又不爲此也 其實則專在於仍設 主卒之攸躋廳事 而有若昔時之鈴閣然 終不失弘化之本義 可見其承流宣化 撫字盡職之入室矣」(*而又…室矣까지의 문구는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

→「또 이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실제는 오로지 목사가 청사에 올라 정사를 처리하는 바가 예전의 영각(鈴閣)이 있는 것과 같이 시설하여 끝내 홍화의 본 뜻을 잃지 않은 것이니, 임금의 교화가 흐르고 백성을 아끼고 직분을 다하는 입실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영각(鈴閣): 지방의 수령이 집무하는 곳)

「迺左迺右 自南自北」 周爰執事 不敢遑息 陾陾橐橐 鼓不能勝 纔周數朔 訖工 而位成焉(*迺左迺右 自南自北: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

→「이에 좌로 우로 남으로 북으로」 두루 일을 집행하니, 감히 한가하게 휴식할 수도 없었다. 착착 담을 쌓고 척척 흙을 쳐대는 소리가 북소리도 감당할 수 없었으니, 겨우 몇 달 만에 공역을 마치고 건물이 지어지게 되었다.

是日也 爲置牛酒 饋勞役徒 醉飽盡歡而後 散歸其家 此亦治化中一美事也

→이 날에 소고기와 술을 마련하여 역부들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취하고 배불리 먹고, 즐거움을 다하고 집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이 또한 아름답게 다스리던 하나의 일이었다.

塗槩軒楹 鳥革翬飛 壯而且堅 麗而非過 將將噦噦 有覺有伉

→추녀와 기둥에 단청을 하니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장엄하고 단단하였고, 화려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았다. 반듯하여 장엄하고 내실은 그윽하여 아늑하면서도 크고 높구나!

於是國用御供之需 始得堅藏 庶幾不負於爲下奉上之道 而永無復患其葺理茅屋之煩 蚩蚩愚氓 雖苦於一時之役 實後日無窮之利

→이에 나라에서 쓸 것과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비로소 단단히 저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래에서 위로 봉납하는 도리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초가의 지붕을 일고 수리하는 번거로운 걱정이 영원히 없어지게 되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비록 노역에 한 때 괴로웠지만, 실로 뒷날 무궁한 이익이 된 것이다.

而又使後之「繼繼」 承命于玆者 入此室處 「常目在之於壁上題額」 顧名思義 遵奉不替 佇見九重之聖化 益弘於滄海之外 而一島之民物 皆囿壽富之域矣 豈不休哉 (*「繼繼」: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常目在之於壁上題額」: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

→또 다음 「계속하여」 왕명을 받들어 이 땅에 부임하는 사람들이 이 집에 들어와 거처하며 「늘 벽의 제액(題額)을 보게 되면,」 명분을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하며 변함없이 받들어 따를 것이다. 구중궁궐에 계신 임금의 덕화가 더욱 넓고 큰 바다 밖에 넓혀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온 섬의 백성이 장수하고 풍부한 물산이 있는 곳이 될 것이다.[의역했음]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嗚呼 正統以來 英雄之節制者 幾人 此閣之頹圮者 亦幾年耶

→아! 정통(正統)이래 이 땅을 다스리던 영웅이 몇 사람이었으며, 이 각(閣)이 쇠퇴하여 무너진 지 또한 몇 년인가?

「三百年舊物」 一朝重新 而增其舊制 倏然大備 「可延於數百年之久 而使弘化二字 煥然復明」 玆非有待而然歟 (*「三百年舊物」: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可延於數百年之久 而使弘化二字 煥然復明」: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

→「삼백 년 된 오랜 건물이」 하루아침에 거듭 새로워져 옛날 구조에서 보태어져 훌쩍 크게 갖추어지게 되어, 「수백 년 세월을 늘일 수 있게 되었으니, ‘홍화’라는 두 글자가 환히 다시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기다린다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니라.

余以喘疾呻吟 廢書者 數年于玆矣 使相每於勸述儒生之時 特招接參考

→내가 천질(喘疾)로 신음하다 책을 폐한지 이제 몇 년이나 된다. 목사께서 유생들에게 술작(述作)을 권면할 때마다 나를 특별히 초대하여 같이 살펴보게 하였다.

旣成 執功之後 又屬以記之 義不可以病拙爲解 故樂道其美 遂爲之記

→이미 집행하여 일을 이루고 나서 또 기문을 부탁하니, 의리상 아프고 졸렬하다고 하여 변명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 아름다운 일을 칭송하여 기문을 짓는다.

鄕人 「成均」進士 金晋鎔/ 향인 「성균」진사 김진용(*성균은 지영록에는 없다. 『족보』에 따라 보충하였다.)

광산김씨 대교동파 37세 정호(正虎).ⓒ헤드라인제주
광산김씨 대교동파 37세 정호(正虎). ⓒ헤드라인제주

※ 광산김씨 족보의 「홍화각 중수기」는 선생의 4세손 養遠公이 필사하였고 11대손 宗根(제8대 제주도의회의장 김용하의 선친)씨가 소장하여 전하여진 것입니다.

[追記} 필자는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의 12대(代) 손(孫)으로 학식이 얕고 재주가 보잘 것 없으나, 그 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선조의 유고(遺稿)를 찾은 기쁜 마음에 외람되게 번역을 시도하였습니다.

후일에 저명(著名)하신 인사 혹은 종친께서 재역(再譯)하여 원문의 격(格)에 맞는 명문(名文)이 되기를 기다리며 졸역(拙譯)에 대한 인사를 대신합니다.

[참고문헌]

譯註 知瀛錄 2019 제주문화원

光山金氏 文簡公派 世譜 1979

조선중기 역사의 진실 이익태 牧使가 남긴 기록 2005 국립제주박물관

譯註 耽羅紀年 2017 제주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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