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 기문(記文) 찾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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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 기문(記文) 찾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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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물 '지영록'과 광산김씨 문간공파 세보에 실린  '홍화각 중수기'의 기문

○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은 조선 중기 제주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힌 제주 교육의 선도자이다. 「홍화각 중수기(弘化閣重修記)」는 진용 선생의 남아있는 유일한 유고(遺稿)이다. 하지만 그 기문의 내용은 알려지고 있지 않았다. 

필자는 「역주 지영록(2019년)」과 광산(光山)김씨 기미(1979년) 족보에 그 기문이 등재되어 있는 것을 지난해 10월에 알게 되었다. '아! 그 기문의 내용을 알고 싶어 한지 언제이던가? 업은 애기 일뤠(7일)나 찾은 꼴이다.'

○ 두 책자에 실린 「홍화각 중수기」의 내용을 비교해보니 보물 제2002호 지영록(知瀛錄)에는 실려 있지 않은 2구절과 4곳에 짧은 문구가 광산김씨 족보에는 기재되어 있었다. 광산김씨 족보에 실린 내용이 당시의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이 부분은 필자의 소견임으로 독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

○ 세 편의 연재를 통해 「지영록」과 광산김씨 족보에 실린 기문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홍화각 중수기」의 기문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광산김씨 대교동파 37세 정호(正虎)>

<「지영록」에 없는 내용이 광산김씨 족보에 실린 내용 일부- 청색 고딕체>

① 김녕숲에서 벌목한 나무를 배에 싣고 제주성 아래에 정박하였다. 당번 군졸들에게 제주성 안으로 옮기게 하고 백성들이 곡식을 수확한 후에 공사를 시작하게 하니 즐겁게 일을 이룰 수 있었다.

② 이 각(閣)이 쇠퇴하여 무너진 지 또한 몇 년인가? 삼백 년 된 오랜 건물이 하루아침에 거듭 새로워져 옛날 구조에 보태어져 훌쩍 크게 갖추어지게 되어, 수백 년 세월을 늘일 수 있게 되었으니, ‘홍화(弘化)’라는 두 글자가 환히 다시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기다린다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니라.(본문 참조)

※ 본 글에서 「지영록」이라고 표기한 것은 「역주 지영록」을 가리키는 말이다.

○ 「홍화각 중수기(弘化閣重修記)」의 기문(記文)을 읽어보기 전에 우선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은 누구이며, 「홍화각(弘化閣)」은 어떤 건물인지? 보물 제2002호인 「지영록」은 어떤 책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은 본관은 광산. 자는 진숙(晋叔), 호는 명도암(明道菴)이다. 아버지는 김경봉(金景鳳)으로 구좌읍 한동리에서 태어나 처가인 봉개리 명도암으로 옮겨 살았다. 당시 제주에 유배 중이던 실학자 이익(李瀷)에게 수학하여 1634년(인조12) 사마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진학하였으며, 1643년(인조21) 숙녕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임하고 고향에서 평생 훈학(교육진흥)에 힘쓰셨다.

1658년(효종9년) 진용 선생의 건의로 당시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교육을 진흥하기 위하여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현 오현단)에 장수당(藏修堂)을 건립하였다. 이에 진용(晉鎔) 선생은 삼읍(三邑: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유생(儒生: 학생)들을 모아 訓學(훈학: 교육)하는 데 힘썼다. 이로 인해 제주의 儒學(유학: 학문)이 왕성해지고, 풍속이 교화되어 일대 변혁을 가져왔으므로 후에 사람들이 선생이 명도암에 은거수도하였기에 존경하고 사모하여 ‘명도암 선생’이라 일컬었다.

제주에서 향현(鄕賢)으로 추앙되어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된 인물은 한성판윤을 지내셨던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과 진용 선생 두 분이다. 그 유래는 진용 선생은 1831년(순조31) 유림의 건의로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되었고, 고득종은 1843년(헌종9)에 이원조 목사가 향현사를 세우고 배향하였는데, 그 이후 1849년(헌종15) 장인식(張寅植) 목사가 진용 선생을 향현사로 이안(移安)하니 고득종과 함께 병향(竝享)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마디로 향현사(鄕賢祠)는 제주 출신 유학의 선현(先賢: 고득종, 김진용)을 모신 사당이다.

다음은 제주대학교 양진건 교수의 「향현(鄕賢) 김진용(金晉鎔) 선생」에 대한 글의 한 귀절이다. 「제주교육의 역사에서 근대 이후에 최정숙이라는 걸출한 여성교육자가 있었다면 근대 이전에는 김진용이라는 걸출한 교육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제주를 살린 것이 귤나무요, 관광업이라고 하지만, 제주사람을 사람답게 살린 것은 김진용과 최정숙이었다. 그 중에 김진용이 선두에 있었던 것이다. 진용 선생의 공은 청사에 제주교육의 역사에 길이 전해지고 기억해야 할 지어다.」

이 귀절에서 필자는 진용 선생이야말로 크게 지혜로운(大知) 제주교육의 선도자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 [홍화각(弘化閣)」이란?

홍화각(弘化閣)은 조선시대 제주목사 집무실이 있던 건물이므로, 지금의 제주목관아(濟州牧官衙)에서 중심 건물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탐라국(耽羅國)시대에는 원(元) 나라 세조가 방성(房星: 말의 수호신)을 올려다보고 이곳에 말을 키웠다. 이에 건물을 지어 ‘만경루(萬景樓)’라 하였으니, ‘만경(萬景)’이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에서 취한 이름이다.

그 제액(題額)을 바꿔 홍화각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1437년(世宗19)에 최해산(崔海山) 목사가 실화(失火)로 고쳐지으면서 이 땅을 지키는 영각(鈴閣)으로 삼고, 왕(王)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후 1649년(인조27) 김여수 목사가 홍화각을 중창한 사실을 선생이 집필하신 기문이, 바로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弘化閣重修記)」이다.

홍화각(弘化閣) 전경. 건물 우측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로 표기되어 있다.<br>홍화각이 목사의 집무실이었던 건물이므로 가장 웅장하였으리라. 하지만 웅장한 것을 고각(高閣: 높다란 집이나 누각)이라 하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홍화각에 대해 「탐라고각」이라 한 것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인 「耽羅古閣」이 아닐까? 사진=김정호. 
홍화각(弘化閣) 전경. 건물 우측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로 표기되어 있다. 홍화각이 목사의 집무실이었던 건물이므로 가장 웅장하였으리라. 하지만 웅장한 것을 고각(高閣: 높다란 집이나 누각)이라 하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홍화각에 대해 「탐라고각」이라 한 것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뜻인 「耽羅古閣」이 아닐까? <사진=김정호> 

▶[보물 제2002호, 지영록(知瀛錄)]

「지영록(知瀛錄)」은 이익태(李益泰) 제주목사(1694년, 숙종20~ 1696년, 숙종 22)가 재임 중 업무와 제주 관련 역사 등 임기를 마치고 제주도를 떠나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인문지리서이다.

2002년 이익태 후손인 연안이씨 야계종친회(冶溪宗親會)에서 이익태 목사와 관련해 300여 점의 유물을 국립제주박물관에 기증하였는데, 그 중에서 「지영록(知瀛錄)」은 사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02호로 지정되었다.

광산김씨 대교동파 37세 정호(正虎). ⓒ헤드라인제주
광산김씨 대교동파 37세 정호(正虎). ⓒ헤드라인제주

※광산김씨 족보의 「홍화각 중수기」는 선생의 4세손 養遠公이 필사하였고 11대손 宗根(제8대 도의회의장 김용하의 선친)씨가 소장하여 전하여진 것임.

⇒ 향현(鄕賢) 진용(晉鎔) 선생의 「홍화각 중수기(弘化閣重修記)」 기문(記文)해설은 [Ⅱ]회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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