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웠다, 버리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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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웠다, 버리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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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호의 문화칼럼] 밭에서 골라낸 돌이 담이 되기까지
괭이로 흙을 뒤집으면 돌이 나왔고, 그 돌은 밭 가장자리로 옮겨졌다. (삽화 제공=양용호)
괭이로 흙을 뒤집으면 돌이 나왔고, 그 돌은 밭 가장자리로 옮겨졌다. (삽화 제공=양용호)

# 어머니를 따라 밭에 갔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밭에 나가는 날이 있었다.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의 밭이었다. 과수원을 새로 일구던 때라 나무를 심기 전에 먼저 땅에서 돌을 골라내야 했다. 어른들이 괭이로 흙을 뒤집으면 돌이 나왔고, 주먹만 한 것도 있었지만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것도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그 돌을 밭 가장자리로 옮기는 것이었다.

돌은 무거웠고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몇 개 옮기고 나면 손끝이 얼얼했는데, 그것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아무리 옮겨도 밭에서 돌이 계속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한 구역을 끝내고 돌아보면 어른들은 벌써 다음 구역에서 또 돌을 골라내고 있었다. 이거 언제 끝남수꽈, 하고 묻곤 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해에도 밭에서 돌이 나왔고 그다음 해에도 나왔다.

어릴 때는 그게 이상했다. 작년에 다 골라냈는데 왜 또 있는지 몰랐다. 밭을 갈고 비와 바람에 흙이 움직일 때마다 묻혀 있던 돌이 다시 드러난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제주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라 해마다 되풀이되는 농사의 일부였다. 한 가지 더 기억난다. 어머니는 그 돌을 버리라고 하지 않으셨다. 밭 가장자리로 가져다 놓으라고 하셨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고, 거기에 돌이 쌓였고, 언젠가부터 그것이 담의 모양이 되었다. 다만 모든 돌이 담이 되지는 않았다. 담에 얹으려면 면이 있어야 하는데 둥글거나 잘거나 부스러진 돌은 얹어봐야 굴러떨어진다. 그런 돌은 밭 한가운데나 귀퉁이에 무더기로 쌓아두었다. 제주에서는 이것을 머들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 위를 밟고 밭을 가로질러 다니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돌을 나르기만 했지 얹어본 적은 없다. 이 차이가 나중에 나를 부끄럽게 만들 줄은 그때 몰랐다.

# 대답하지 못한 질문

대학원 후배 중에 캐나다 사람이 있다. 연구를 하러 왔다가 제주에 눌러앉았고, 지금은 나보다 이 섬에서 더 많이 걷는다. 어느 봄, 함께 밭길을 걷다가 그가 돌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 돌은 밭에서 나온 거지요?”

그렇다고 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에서 돌을 골라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밖으로 버리지 않고 밭 둘레에 쌓았어요?”

나는 화산섬이라 돌이 많고 바람이 세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잠시 돌담을 바라봤다. “돌이 많다는 건 알겠는데, 왜 담을 만들었어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읽고 들은 설명에 가까웠다. 이상한 것은 내가 그 일을 실제로 해봤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돌을 두 손으로 들어 밭 가장자리까지 날랐다. 그런데도 정작 왜 그 자리에 쌓았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해본 것과 아는 것, 그리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었다.

# 무너진 돌 몇 개

추석 전이 되면 팔촌 이내의 일가가 모여 조상의 묘를 함께 벌초했다. 제주에서는 이를 모둠벌초라고 한다. 나는 지금도 그 자리에 오던 분들의 촌수를 정확히 모른다. 일 년에 한 번 보는 얼굴이라 어른이라는 것만 알았지, 나와 어떻게 이어진 분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묘는 밭 안에 있었다. 풀을 베고 나면 다음 묘로 이동했고, 묘와 묘 사이에는 밭담이 있었다.

우리는 그 담을 넘어 다녔다. 몇 해 전 벌초 날이었다. 담을 넘다가 위에 얹힌 돌 몇 개를 무너뜨렸다. 소리가 컸다. 나는 돌을 주워 다시 얹으려고 했는데 얹는 족족 굴러떨어졌다. 세 번 해보고 손을 놓았다. 뒤에서 어른 한 분이 오셨다. 그분은 무너진 자리를 잠깐 보더니 내가 얹으려던 그 돌을 집어 손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다른 면이 아래로 가게 놓자 돌은 움직이지 않았다.

위를 두어 번 눌러 보고 다음 돌을 집었다. 다 채우는 데 걸린 시간은 2분이 채 안 됐다. 내가 미안하다고 하자 그분이 말했다. “이거 무너지는 건 일도 아니라. 또 쌓으민 되주.”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디 요새는 쌓을 줄 아는 사람이 없어.”

그날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 막으민 넘어가

밭을 두르는 이 돌담을 제주에서는 밭담이라고 부른다. 내가 먼저 물은 것은 이 담이 몇 년이나 됐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몇 년이랄 게 없다고, 계속 쌓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담을 언제 완성된 물건으로 보고 있었고 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로 보고 있었던 셈이다. 나에게 밭담은 유산이었고 그에게는 일과였다. 두 번째 질문도 어긋났다. 돌담이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이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막으민 넘어가.”

밭담을 가까이서 보면 돌과 돌 사이에 틈이 숭숭 나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은 허술하다고 느끼지만 그 틈이 이 담의 핵심이다. 바람을 완전히 막는 벽을 세우면 벽 뒤에서 공기가 소용돌이치면서 안쪽 작물이 상하고, 벽 자체도 태풍에 넘어간다. 틈이 있는 담은 바람을 막지 않고 통과시키면서 속도만 떨어뜨린다. 시멘트를 쓰지 않고 돌만 얹은 담이 오랜 세월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단해서가 아니라 맞서지 않아서다. 제주의 화산회토는 가벼워서 바람이 세면 표토가 그대로 날아간다. 담을 지난 바람은 느려졌고 가벼운 흙도 덜 날렸다. 가뭄에는 흙이 마르는 속도가 늦어졌다. 놓아기르던 소와 말이 밭으로 들어오는 것도 막았고, 이 밭과 저 밭의 경계를 나누는 일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하는 재료를 어디서 따로 구해온 것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골라낸 바로 그 돌이었다. 농사를 방해하던 돌이 농사를 지키는 담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후배 앞에서는 “바람을 막는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 돌은 앉을 자리가 있어

그날 담을 다시 쌓아 주신 어른께 나중에 물은 적이 있다. 돌을 얹을 때 어느 면을 아래로 두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돌은 앉을 자리가 있어.”

그 자리가 어떻게 보이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자 그분은 보면 안다고 했다. 어릴 때 나는 이 돌을 수없이 들었다. 무게도 알고 모서리가 어디를 긁는지도 안다. 그런데 그건 나르는 일이었고 얹는 일은 다른 일이었다. 같은 돌을 두고도 옮기는 사람과 쌓는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 돌은 바다까지 내려갔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주 사람들은 밀물 때 물고기가 들어오고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가는 길목에 돌을 둘러 쌓았다. 원담이라 부르는 전통 어로 시설이다. 물은 돌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물고기는 안에 남는다. 사람들은 물이 빠진 뒤 걸어 들어가 그 고기를 잡았다. 그물이나 배 없이도 밀물과 썰물의 힘을 이용해 고기를 잡았다. 말하자면 바다가 드나드는 시간을 어로에 이용한 것이다.

처음 이 원리를 제대로 알고 나서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밭에서는 돌로 바람의 힘을 줄였고, 바다에서는 돌로 물의 시간을 이용했다. 어느 쪽에서도 자연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이미 있는 조건 안에서 먹고살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우도에서는 한 집 담장 안에 밭일 도구와 물질 도구가 나란히 세워진 모습을 보았다. 돌은 밭과 바다를 가르지 않고 두 생활을 함께 따라다녔다.

# 돌은 죽은 사람에게까지 따라갔다

밭에서 나온 돌은 죽은 사람의 자리에도 따라갔다. 집안에 초상이 나면 밭 한쪽에 쌓아둔 머들을 헐어 산담을 둘렀다. 담이 되지 못한 채 몇십 년을 쌓여 있던 돌이 조상의 자리를 지켰다. 밭에서는 작물이 바뀌고 사람이 늙었지만, 산담 안에는 먼저 떠난 가족이 남았다.

# 같은 돌, 다른 담

여기까지 나는 돌의 쓰임을 따라왔다. 그런데 같은 돌이라고 해서 같은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중산간에는 잣성이라 부르는 긴 돌담이 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운영하던 목장의 경계다. 그리고 4·3의 시기에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쌓아야 했던 성담도 있었다. 밭담과 재료도 쌓는 방식도 다르지 않아 걷다 보면 잘 구별되지 않는다. 같은 제주 사람이 같은 섬의 돌로 쌓았지만, 누가 왜 쌓게 했는지는 달랐다.

양용호 / 관광학 박사  ('길 끝에 사람이 있었다' 저자)
양용호 / 관광학 박사 

# 나는 떠났고 그분은 남았다

벌초 가는 날이 나는 그리 좋지 않았다. 풀을 베는 일이 힘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친척들 사이에서 나는 늘 조금 어색했다. 누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몰랐고, 어른들이 나누는 오래된 집안 이야기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서 크면서 그 자리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언제부터인가 가지 않는 해도 생겼다. 담을 쌓아 주신 그 어른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배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돌을 나르기만 했고 얹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고 했다. 시작은 나와 같았다. 나도 돌을 나르는 일부터 했다. 다만 나에게는 그다음이 없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고 그분은 남았다. 가르쳐 줄 사람이 없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울 사람이 있어야 가르치주.”

돌을 얹는 데는 요령이 있고 그 요령은 말로 옮겨지지 않는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적어 두면 남지만 설명되지 않는 것은 옆에서 몇 해를 보고 배우는 수밖에 없다. 그 몇 해를 내줄 사람이 있어야 남는 것이다.

밭담은 세계중요농업유산 목록에 올라 있다. 그런데 그 목록에 적히지 않는 것이 있다. 그 담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손이 지금 몇 개나 남아 있는가. 무너진 담은 헐린 담보다 알아보기 어렵다. 헐린 자리는 비어 있어서 눈에 띄지만, 무너진 담은 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다만 아무도 다시 얹지 않을 뿐이다.

# 다음 쓰임이 시작되는 자리

“왜 그 돌을 버리지 않았어요?”

사십 년 전 어머니와 나는 돌을 치우고 있었다. 밭에서 골라내고, 가장자리로 옮기고, 훗날 다시 쓸 자리에 놓았다. 그 돌은 밭담이 되고 원담이 되고 산담이 되었다. 같은 돌이라도 누가 무엇을 위해 쌓았는지에 따라 담의 뜻은 달라졌다.

벌초 가는 날을 피한 것도, 담을 무너뜨리고 다시 얹지 못한 것도 나였다. 무너진 자리에는 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그 돌을 다시 앉힐 손이 줄어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을 가져다 놓으라던 밭 가장자리는 버리는 곳이 아니었다. 다음 쓰임을 기다리는 자리였다. (글쓴이 양용호/ 관광학 박사 ('길 끝에 사람이 있었다' 저자))

◇ 제주 말·용어

머들 ─ 밭에서 골라낸 돌을 밭 한가운데나 한쪽에 무더기로 모아 놓은 것. 잔돌이나 자갈을 넓고 길게 쌓은 것은 잣벡이라 부르기도 하며, 명칭과 형태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모둠벌초 ─ 추석 전 팔촌 이내의 일가가 함께 모여 조상의 묘를 벌초하는 제주의 세시풍속. 음력 8월 초하루를 전후해 집중되며, 과거에는 이른바 벌초 방학이 있었다.

밭담 ─ 경작지의 경계를 따라 현무암을 쌓아 두른 돌담. 바람과 토양 유실을 막고 가축의 침입을 차단하며 경계를 나누는 기능을 함께 했다.

원담 ─ 조간대에 돌을 둘러 쌓아 밀물에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에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전통 어로 시설. 지역에 따라 갯담이라고도 한다.

잣성 ─ 조선시대 한라산 중산간의 국영 목마장 경계에 쌓은 돌담. 위치에 따라 하잣·중잣·상잣·간장으로 구분하며, 제주도민이 부역 형태로 축조했다.

성담(낙선동 4·3성) ─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1948년 11월 선흘리가 초토화된 뒤 1949년 봄 주민들이 동원되어 쌓았고 그해 4월 완공되었다. 주민을 감시·통제하기 위한 전략촌으로, 현재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 참고자료

강만익, 「조선시대 제주도 잣성(牆垣) 연구」, 『탐라문화』 제35호,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09, 205~246쪽.

제주 밭담은 2013년 1월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뒤 2014년 4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에 등재되었다. 「Jeju Batdam Agricultural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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