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음악선생님은 피아니스트면서 시인이셨다. 딱히 문단에 데뷔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원하는 곡의 주제음에 시 한편을 써서 우리에게 허밍으로 따라 부르게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우리에게 음감을 익히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모르나 필자에게는 고전음악과의 첫 만남이었고 그 첫 만남은 항상 강렬했다. 필자는 베토벤의 3대 피아노소나타를 모두 노래로 만났다. 훗날에는 열정소나타에 흠뻑 빠졌지만 비창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그때로서는 우선 비창이란 생소한 단어가 주는 묘한 이질감이 가보지도 않은 먼 나라의 친구를 만나듯 설레임과 떨림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비창(Pathetique)’의 영어식 표현은 프랑스어가 기본으로 마음이 상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을 찾아들어가면 결국 그리스어의 페이소스(Pathos)’까지 거슬어 올라게게 된다. 고전음악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비창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곡은 두 곡이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의 부제가 비창이고 또 하나는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8번이 비창으로 알려져 있다. 피아노의 신약성서로 불리우는 베토벤 32곡의 피아노소나타는 주로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는데 비창은 전기에 속하는 곡으로 작품번호 13번이면 그의 전 작품 중에서도 꽤 젊었을 때 작곡한 곡에 속한다.
베토벤의 3대 피아노소나타를 비창, 월광, 열정으로 부르지만 세 곡 모두 작곡가 자신이 부제를 붙인 건 아니다. 베토벤이 부제를 따로 붙인 곡은 32곡 중 두 곡 8번 비창과 26번 고별 두 곡 밖에 없다. 피아노소나타 32곡은 베토벤의 나이 이십 육세에 1번을 작곡하기 시작해 오십 이세에 32번 작곡이 끝난 곡으로 어느 곡 하나라도 닮은 곡이 없을 정도로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피아노소나타다. 특히 베토벤의 친구이자 그의 후원자였던 칼 본 리치노브스키(Carl Von Lichnowsky)에게 헌정된 이 곡은 C단조로 제목이 의미하는 대로 어둡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시작되는 곡이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교향곡5번)과 어찌보면 전체적으로 흡사한 이미지가 바로 같은 C단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라베 알레그로 디 몰토 에 콘 브리오(Grave Allegro Di molto e con brio)로 되어 있는 1악장은 사실 좀 파격이다. 그 당시 1악장부터 ‘그라베(Grave)-무겁고 장중하게’라고 시작한다는 건 그리 흔치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목처럼 자못 비장한 각오가 느껴질 정도로 엄숙함이 깃든 1악장의 첫 주제가 약간의 변형을 거치면서 코다(끝부분)까지 이어져 나간다. 아다지오 칸타빌레(Adagio Cantabile)인 2악장에 오면서는 슬프면서도 그윽하도록 아름다운 주제가 노랫말처럼 흐른다. 유명해도 너무나 유명한 2악장 주제음률은 세번 계속 반복되면서 나른한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는 악장이다. 얼마나 유명한지 많은 영화의 주제곡이나 심지어는 게임에서 조차 중간에 2악장을 삽입해 놓았고 심지어는 2악장을 주제로 팝송을 편곡하기에 이른다. 루이스 터커가 부르는 미드나잇 불루가 바로 그 곡이다. 혹자는 여성적인 악장이라고 말하지만 다시 들어보니 차라리 중성적인 악장으로 애수적 아름다움 뿐 아니라 넉넉한 여유로움이 감도는 악장이다. 필자 역시 한때 2악장에 반해서 앉은 자리에서 연거푸 2악장만 수없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3악장의 론도 알레그로(Rondo Allegro)는 가장 베토벤다운 강렬한 의지의 악장이라 할 수 있다. 맑은 아침에 이슬 맺힌 나뭇잎을 보는 듯한 청량함을 주는 톡톡 튀는 악장이다.
3악장 전체가 20분도 채 안되는 피아노소나타로 악장마다 특성과 묘미가 있고 유난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곡이다. 물론 2악장의 수려함과 풍부함에서 오는 강한 끌림을 부정할 수 없지만 1악장과 3악장 역시 그 나름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는 보석같은 곡이다.
저녁 나절, 비창을 들으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하루를 온전히 정리하는 기분이 든다. 제목은 비창인데 사람의 마음을 경쾌하게 하는 팔색조같은 곡, 그래서 클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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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칼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

제 나이엔 고전적인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