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스퇴츠너의 글과 사진으로 본 제주 자연과 문화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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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스퇴츠너의 글과 사진으로 본 제주 자연과 문화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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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1929년 독일인 스퇴츠너가 제주에 두 달간 체류하며 수집한 제주유물이 97년 만에 제주로 왔다. 스퇴츠너의 제주 유물이 제주에 오기까지 많은 우연과 곡절이 있었다. 이를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29년 당시 스퇴츠너의 제주 입도 자체가 우연이었다. 스퇴츠너는 만주 답사를 마친 후 연이어 조선을 답사하려 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비협조적이었고, 일체의 사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스퇴츠너가 차선책으로 선택한 곳이 제주였다. 그 당시 제주는 한반도에 비해 일제의 감시가 비교적 느슨했던 모양이다.

스퇴츠너는 제주에 두 달간 체류하면서 제주 유물 200여 점을 수집하여 독일로 가져갔고,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은 세계 대공황 여파로 재정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스퇴츠너 컬렉션을 매입했다. 몇 년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드레스덴 대폭격이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루어진 폭격 중 최대의 폭격이었다. 이때 드레스덴이 소장했던 세계 각지의 유물 5000여 점이 소실됐다. 반면 제주 유물 중 소실된 것은 6점에 불과했다.

드레스덴 대폭격 : 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에 감행한 폭격이다. 사흘간의 폭격으로 약 2만 5000명이 사망했고, 문화 도시 ‘드레스덴’은 완전히 파괴됐다. 연합군과 주축국 간에 행해진 폭격 중 최대 피해가 발생한 폭격이다.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드레스덴 대폭격 : 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에 감행한 폭격이다. 사흘간의 폭격으로 약 2만 5000명이 사망했고, 문화 도시 ‘드레스덴’은 완전히 파괴됐다. 연합군과 주축국 간에 행해진 폭격 중 최대 피해가 발생한 폭격이다.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동,서독으로 갈라졌던 독일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을 이루었다. 드레스덴은 동독의 도시였기에 통일 전 한국인의 접근이 불가했다. 하지만 통일이 된 이후에도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의 제주 유물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주 유물의 깊은 잠을 깨운 이는 김영자 교수(전 레겐스브르크대학교 교수)였다. 그녀는 2018년 유럽 한인 이주 100년사를 계획하던 중 안중근의 사촌 동생으로 알려진 안봉근을 연구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안봉근은 당시 한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빌렘 신부와 함께 1914년 독일로 이주하였다. 빌렘 신부의 고향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으로 유명한 ‘알자스, 로렌’이었다. 이곳은 프랑스와 독일 접경지역으로 국경 문제가 자주 발생하던 곳이었다.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빌렘 신부의 국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빌렘 신부는 귀국해야 했던 것이다. 안봉근의 독일행은 빌렘 신부의 귀국이라는 특별한 사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독일 정착 후 안봉근은 1930~1931년 사이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스퇴츠너의 제주 컬렉션을 만나게 되었고, 제주유물을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안봉근은 손기정, 이미륵 등과 함께 이미 알려진 인물이었으나 스퇴츠너와의 관련성은 김영자 교수의 연구에 의해 처음 밝혀지게 되었다. 김영자 교수와 함께 안봉근을 연구한 송란희 이사(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에 의하면 안봉근의 할머니가 제주인이었다고 한다. 송란희 이사는 이러한 사실이 해주 출신 안봉근이 제주유물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안봉근 연구가 스퇴츠너의 제주유물로 이어졌고,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전시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스퇴츠너 켈렉션 중 일부이다. 사진 뒷부분은 ‘갓’의 일부인 ‘양태’를 만들기 위한 손질된 대나무살이다. 앞 부분에 있는 것은 톱밥이다. 대나무 살을 만들기 위해 대패질했던 톱밥이다. 놀라운 것은 톱밥을 손상 없이 독일까지 가져간 스퇴츠너의 섬새함 뿐 아니라, 100년 전의 톱밥을 손실 없이 보존한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의 노력이다.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스퇴츠너 켈렉션 중 일부이다. 사진 뒷부분은 ‘갓’의 일부인 ‘양태’를 만들기 위한 손질된 대나무살이다. 앞 부분에 있는 것은 톱밥이다. 대나무 살을 만들기 위해 대패질했던 톱밥이다. 놀라운 것은 톱밥을 손상 없이 독일까지 가져간 스퇴츠너의 섬새함 뿐 아니라, 100년 전의 톱밥을 손실 없이 보존한 드레스덴 민족학박물관의 노력이다. 

이렇듯 많은 우연이 겹쳐 97년 만에 스퇴츠너의 제주 컬렉션이 제주에 돌아왔다. 물론 많은 우연이 겹친다고 하여 필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우연적 사건 속에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로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각자의 일에 열정을 쏟은 결과 100년 전 제주유물이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당도한 것이다.

좌)1929년 스퇴츠너가 촬영한 제주 서문 앞의 돌하르방, 우)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돌하르방
좌)1929년 스퇴츠너가 촬영한 제주 서문 앞의 돌하르방, 우)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돌하르방

이 일이 필연이 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마지막 우연의 화룡점정을 찍어 보자. 1929년 스퇴츠너가 촬영한 사진 중에 제주 서문을 지키던 돌하르방 사진이 있다. 고영자 소장(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소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과거 서문의 돌하르방이 있는 곳은 현재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앞이라고 한다. 스퇴츠너 컬렉션이 전시되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100년 만의 제주유물 귀환을 미리 알고 환영하기 위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하늘에 있는 스퇴츠너가 이 사실을 안다면 매우 놀랍고 반길 일일지도 모르겠다. <글=고승욱>

*이 글은 3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소만에서 대서까지 

제주 속담 중에 “저를 어실 땐 가시아방이 와도 조름으로 절한다”는 말이 있다. 농사일로 허리 펼 새 없이 바쁠 때는 장인어른이 와도 엉덩이로 인사한다는 말이다. 

스퇴츠너가 제주에 도착한 날은 2029년 5월 29일이다. 절기로 치면 소만(小滿 5월 21일경)과 망종(芒種 6월 6일경) 사이다. 소만과 망종 때 밭에선 보리가 완전하게 익고, 논에선 모내기를 준비한다. 누가 오든 엉덩이로 절해야 하는 바쁜 시기이지만, 귀한 알곡을 거두고 새 씨앗을 뿌리는 때이기에 더없이 기쁜 시기이기도 하다.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75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75

소서(小暑, 7월 7일경)는 여름의 시작이다. 밭갈이를 끝낸 소는 한라산으로 올라 여름을 피하지만, 잠시 숨을 돌린 사람들은 골갱이(호미)를 들어야 한다. 땡볕에 검질(잡초)이 드세기 때문이다. 특히 ‘조컴질’은 고약하다. ‘조컴질’은 조밭의 잡초라는 말이다. 초불, 두불, 세불, 횟수로는 세 번이지만 밭이 넓으면 한 달 내내 ‘조컴질’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  

대서(大暑 7월 23일경)는 여름의 절정이다. 사람의 손은 쉴 새 없다. ‘검질’을 매고 나면 ‘고지기무레’(해녀들이 바다에서 모자반의 일종인 고지기를 채집하는 물질을 말한다.) 를 돕기 위해 온 가족이 팔을 걷어붙인다. 겨울 농사 밑거름인 ‘고지기’를 많이 조물아야(채집해야) 내년이 편하다. 해녀의 ‘망사리’(해녀가 채집한 해산물을 담는 그물 주머니) 중 ‘고지기망사리’가 가장 큰 이유이다. 

이렇게 여름 용시(농사)가 끝나고 나면 달궈진 골갱이와 몸을 식힌다. 계곡을 찾아 물맞이를 나간다. 닭백숙을 먹으며 보신하는 음력 7월 15일은 백중날이다.

사진: 홍정표, 1970년대-백중날 물맞이
사진: 홍정표, 1970년대-백중날 물맞이

독일인 스퇴츠너는 1929년 제주에 왔다. 체류한 기간은 ‘소만’에서 ‘대서’까지다. 두 달여 기간 동안 스퇴츠너는 풍부한 감성으로 제주 자연을 체험하고, 예리한 직관으로 제주문화를 기록하고, 애정 어린 관심으로 제주 유물을 수집하였다.

구각전

섬 주민들은 예로부터 이어받은 무겁고 움푹 파인 목재 그릇을 사용하는데, 지름이 1미터 이상 넓은 그릇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육지에서는 예를 들자면 놋쇠로 만든 대야, 밥그릇, 접시, 촛대, 재떨이 등을 사용하는데 이 섬에서는 같은 용도로 사용하지만, 모두가 목재로 만들었다. 제주는 육지와 같은 문화이긴 하지만 특별히 목재 문화가 돋보였다. - 발터 스퇴츠너

스퇴츠너는 제주 목재 문화에 주목하였다. 목재 문화는 한반도 여타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한반도에 비해 놋쇠가 귀한 제주에서는 놋쇠 대신 나무를 이용하여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제주에는 나무가 얼마나 많았을까? 

조선시대 제주의 땅을 가른 주체는 국마(國馬), 백성, 소, 셋이다. 국마를 기르는 국마장(國馬場)은 대략 제주 땅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나머지 땅을 백성과 소가 나누었다. 가호당 밭 3,000평, 소 한 마리당 ‘촐왓’(소의 월동 사료를 키우는 밭) 1,000평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제주 인구는 208,331 명이었고(1925년 통계), 말은 22,500필이었고, 소는 40,924마리였다.(1930년 통계) 땅을 필요로 하는 개체수가 많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화산섬 제주의 열악한 토질이다. 

성종 24년(1493년), 성종실록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한 번 농사지으면 다음에는 반드시 5년, 6년, 7년을 묵혀서 땅을 쉬게 해야 경작해 먹을 수 있다” 다음은 김성구(1641~1707) 『남천록南遷錄』의 기록이다. ‘제주도는 2, 3년 연작하면 곡식이 여물지 않고, 또 새로운 밭을 개간하면 수 년을 쉬게 한 후 경작해야 한다.’(재인용: 김오진, 조선시대 제주도의 이상기후와 문화, 2018, ㈜푸른길, 128p~130p)  

말 그대로다. 제주도는 토질이 열악하여 연작(連作)이 어렵고, 1년 농사지으면 5∼7년을 쉬어야 하는 땅이 많다는 말이다. 중산간 오름 주변엔 1년 농사짓고 10년을 쉬어야 하는 땅도 적지 않다. 가호당 필요한 3,000평은 매년 연작이 가능한 밭을 말한다. 한 번 농사짓고 5년을 쉬어야 하는 농사꾼은 5년 동안 굶어야 할까? 입에 풀칠하기 위해선 3,000평이 아니라 일만 평의 땅이라도 개척해야 하지 않을까? 사정이 이러한데 나무에게 내어줄 땅이 있었을까?  

사진: 홍정표한라산 남단 중산간에서 서귀포 방향에서 촬영되었다. 나무가 거의 없다. 5.16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60년 대 중후반 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5.16 도로는 1962년 기공식을 열었고, 1969년 전 구간 완공되었다).&nbsp;
사진: 홍정표한라산 남단 중산간에서 서귀포 방향에서 촬영되었다. 나무가 거의 없다. 5.16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60년 대 중후반 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5.16 도로는 1962년 기공식을 열었고, 1969년 전 구간 완공되었다).&nbsp;

다른 사례를 보자. 제주도 대정읍 ‘구억리’에 ‘구각전’(九角田)이라는 밭이 있다. ‘구각전’은 곶자왈 경계에 붙어 있는 밭으로 그 모양이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밭의 모양을 사각형으로 상상하지만, ‘구각전’은 말 그대로 아홉 개의 구석, 각이 있는 밭이다. 용암지대인 곶자왈 끝까지 밀어붙여 밭을 만들다 보니, 밭의 경계가 용암이 흘러내린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이는 ‘구각전’만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밭이 ‘한경곶자왈’을 둘러싸고 있지만, 같은 모양 하나 없이 제각기 특별한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곶자왈의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밭을 일구었다. 위성사진에 보이는 ‘한경곶자왈’은 용암이 흘러내린 원시의 모습 그대로다. 이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인간이 자연과 사투를 벌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위 )한경곶자왈-1967년 항공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 공간포털)아래) 한경곶자왈 경계에 있는 밭, 실제 ‘구각전’이라 불리는 곳을 찾지 못하여 ‘네이버 위성지도’에서 찾은 비슷한 유형의 밭을 ‘구각전’의 사례로 든다.(네이버 위성지도) 
(위) 한경곶자왈-1967년 항공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 공간포털. (아래) 한경곶자왈 경계에 있는 밭, 실제 ‘구각전’이라 불리는 곳을 찾지 못하여 ‘네이버 위성지도’에서 찾은 비슷한 유형의 밭을 ‘구각전’의 사례로 든다.(네이버 위성지도) 

 

솔박 하나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81
Walther Stötzner, Kreuz und quer durch Korea, p.81

그러면 나무는 어디에 있었을까? 고지 600m 이상의 한라산과 하천 주변을 제외하면 곶자왈밖에 없다. 곶자왈이 곶자왈인 것은 곶자왈의 지반이 용암이기 때문이다. 돌을 깨어 밭을 일굴 수 없었기에 곶자왈이 숲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곶자왈은 특정 마을에만 분포되어 있어 한정되어 있고, 한라산은 높다. 제주 전체 목재 수요량으로 볼 때 제주에 나무가 충분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스퇴츠너 컬렉션이다. 나무로 만든 다양한 그릇이 전시되어 있다.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스퇴츠너 컬렉션이다. 나무로 만든 다양한 그릇이 전시되어 있다.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스퇴츠너 컬렉션이다. (11)은 담배 재떨이다. 굴무기(느티나무)로 만들었다. (9)는 담배통이다. 담뱃잎을 담는 부분을 ‘남통머리’라 부른다. ‘남통머리’는 굴무기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흑굴무기의 뿌리로 만든다고 한다. 
대요름 박세기: 해안에 밀려온 야자수 열매 씨앗의 껍질을 이용하여 만든 바가지다. 야자수를 대나무로 인식하여 그 열매를 ‘대요름’이라 불렀을까? 큰 열매여서 ‘대요름’이라 불렀을까? 『증보 탐라지增補耽羅誌』(1765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충암록(冲庵錄)에 야자가 바다에서 떠오는데 고을 사람들이 ‘죽실’(竹實)이라 부른다.”(재인용: 고광민, 제주도구, 한그루, 2022, 100p) 사진 속 ‘대요름 박세기’의 지름은 큰 것이 12.5cm, 작은 것은 긴 쪽:12cm, 짧은 쪽:8.5cm다. 이 또한 제주 ‘목재문화’의 한 사례라 해야 하지 않을까? (소장자: 고광민)
대요름 박세기: 해안에 밀려온 야자수 열매 씨앗의 껍질을 이용하여 만든 바가지다. 야자수를 대나무로 인식하여 그 열매를 ‘대요름’이라 불렀을까? 큰 열매여서 ‘대요름’이라 불렀을까? 『증보 탐라지增補耽羅誌』(1765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충암록(冲庵錄)에 야자가 바다에서 떠오는데 고을 사람들이 ‘죽실’(竹實)이라 부른다.”(재인용: 고광민, 제주도구, 한그루, 2022, 100p) 사진 속 ‘대요름 박세기’의 지름은 큰 것이 12.5cm, 작은 것은 긴 쪽:12cm, 짧은 쪽:8.5cm다. 이 또한 제주 ‘목재문화’의 한 사례라 해야 하지 않을까? (소장자: 고광민)

곶자왈은 한 마을이 소유한 것이 아니다. 곶자왈에 인접한 여러 마을이 경계를 나눠 소유했다. 한경곶자왈의 경우 8개 마을이 나눠 소유하고 있다. 목재 공급원인 곶자왈은 마을의 공동자산이다. 그러므로 곶자왈의 나무를 함부로 벨 수 없다. ‘낭허채’(나무 채집), ‘자왈정리’(가지치기)라 하여 특정한 날에 가호마다 1인씩 나와 가정과 마을에 필요한 땔감을 구했다.  

땔감용 나무가 아닌 목재를 구하기 위해선 마을에 돈을 지불해야 했다. 공짜로 나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한라산뿐이었다. 곶자왈이 없는 마을 사람이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한라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스퇴츠너의 사진 속 ‘솔박’ 하나도 한라산에서 어렵게 구한 나무로 만든 것일지 모른다. 며느리에게 물려줘야 할 귀한 유산이다.  <글=고승욱, 2편에서 계속>

 

글쓴이 고승욱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5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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