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경제 위기와 제주 사회개조 토대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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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경제 위기와 제주 사회개조 토대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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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선 시론-제주국제자유도시와 제주의 미래] (3) 경제 위기를 키운 신군부와 KDI, 그리고 제주도

1990년대 제주개발특별법 시대가 2001년 제주도가 제주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90년 이래 제주개발 문제와 제주의 미래를 위한 논쟁과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미래, 공동체의 미래, 제주 환경 파괴를 걱정하는 제주도민도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 논의는 개발 vs 보전 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개발과 환경 파괴 문제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와 민주주의도 중요하다. 도민의 삶도 중요하다. 그래서 현 제도를 만들어 낸 과거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겪는 다양한 현상이 왜 나타나는지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즉, 현재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작동시키는 논리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현실과 제도를 평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현실로서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이런 바탕에서 제주국제자유도시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어갈 수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와 제주의 미래]를 주제로 제주국제자유도시가 탄생하게 된 맥락을 긴 역사적 흐름 속에서 되짚어 보고, 제도가 어떤 논리로 설계되고 운영되고 있는지, 그 속에 오류는 없는지 검토하려 한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는 역사 속에서 경제와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안할 때마다 미래의 모습을 모색해 왔다. 지금이 바로 ‘그때’일 수 있다. 그래서 도민 각자가 원하는 세상을 상상하는 힘을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다. 미래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감각과 이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3) 신군부, 경제 위기와 제주 사회개조 토대를 만들다 

◇ 경제 위기를 키운 신군부와 KDI, 그리고 제주도

제주도의 토지와 경제, 사회는 60년대 이후 근대화를 목표로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수단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60년대 개발 자금이 차관으로 점차 변화되자, 중앙의 개발 자금 확보(외화벌이)를 위해 제주도가 국제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일본인 관광객 유치가 중요해졌고, 이 과정에서 기생관광이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외국인 관광객 증가는 미미했고, 국가의 개발 자금 확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70년대 외국인이 상주하여 경제활동을 하는 방식으로 개발하는 구상이 제시되었다. 제주 사회를 외국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사회로 전환하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수출 중심의 경제정책에서 원자재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원자재 보관 목적으로 중산간 토지를 이용하는 방안도 제시되었다. 이 역시 수출 기업의 원자재 수급을 원활하게 하고, 투자를 유치할 목적으로 제주도 토지를 이용하려는 방안이었다. 

70년대 제주 특정 자유지역 구상은 당시 시점에서 기업 중심의 경제와 국가 운영을 위해 제주를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앙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제주의 토지를 통해 중앙이 생각하는 효용을 채우는 것이 중요했다. 제주도민의 삶이 어떻게 되고 제주 사회가 어떻게 변하게 되며, 어떤 위험에 노출되는지 관심이 없었다. 

제2차 오일쇼크 이후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늘어날 국방비와 대외 개방 준비를 위해 서비스산업 육성과 세수(부가가치세) 증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역외금융센터를 설립하여 서울 금융 시장에 자금을 공급하고자 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제주를 휴양 중심으로 개발하여 서비스산업(관광개발사업)이 활성화되면 많은 관광객을 통해 기업의 수익과 자산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용력을 넘어선 관광으로 매력도가 떨어지는 문제를 알고도 그렇게 하고자 했다. 경쟁 심화로 인한 수익성 악화 문제는 인지하지 못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세계적인 불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기업의 수익성이 감소하는 문제를 예측하지 못했다. 은행 민영화 등 금융 자유화(경영 자율성 획득) 조치가 이루어졌다. 기업의 부동산 투기와 부동산 가격 상승 때문에, 자기자본이 취약한 기업이 건전하다는 잘못된 신호를 시장에 보내면서 90년대 말 위기가 만들어졌다. 

◇ 세계의 상황 

2차 대전 이후 평화를 위한 국제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미국의 야망은 베트남 전쟁과 제1차 오일 쇼크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쟁 비용 증가와 빈곤 퇴치를 위한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로 재정 적자가 발생했다. 케인즈주의 경제 노선과 복지국가 노선이 흔들렸다. 미국의 무역수지도 적자였다. 재정 적자와 무역수지 적자로 미국이 설계한 세계 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고정환율제와 금과 미 달러의 교환으로 유지되던 세계 경제가 1971년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 발표로 흔들렸다. 1976년 킹스턴 다자간 협상에서 변동환율제 전환이 합의되면서, 세계 무역 질서가 국가 통화의 국제 수요와 공급(시장)에 따라 결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특별한 위험이 발생하는 경우 국가가 개입하기도 했다. 

70년대 인플레이션과 실업 카툰, (출처: Stewart McCrae,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collection)

제1차 오일 쇼크로 미국 경제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 시기 이전에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역의 관계라고 보았다. 1차 오일 쇼크로 물가가 상승하면서 실업이 동시에 증가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미국 정부는 재정 지출을 늘려 경기를 진작시켰다. 미국 경제가 회복하는 듯 보였지만, 정부의 재정 지출 증대로 인한 물가 상승, 그리고 다시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고 다시 인플레이션이 증대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플레이션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연방준비제도의 폴 볼커 의장이 인플레이션 억제를 결정하면서, 1980년과 1981년에 금리를 인상했다. 영국도 상황이 비슷했다. 1980년 영국의 인플레이션이 18% 상승했다. 1988년 이자율이 7.38%로 다소 떨어졌지만, 1980년 이자율이 14%로 최고점에 달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투자 촉진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개인 소득세와 법인세 감세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냉전의 도래에 따라 군사비를 증대시키면서 세수 감소와 지출 증대로 재정 적자가 폭이 더욱 커졌다. 연준은 기존 고용 확대와 경제 성장에 초점을 둔 정책에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기준금리를 급속하게 인상했다. 경제 침체에 금리 인상으로 기업과 은행이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농산물 수출도 원활하지 못했다. 농민들의 불만이 가중되면서 극우 조직이 농촌사회에 등장했고, 90년대 초 각종 폭력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를 만회하고자 했다. 1985년 9월 미국은 G5 재무장관 회담(플라자 회담)에서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 절상(달러 절하)을 단행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인상한 결과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1981년부터 달러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가치가 강제적으로 하락했다.

일본의 대미 수출은 제2차 오일 쇼크와 미국의 경기 침체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화 절상 이후 일본의 대미 수출이 대폭 감소했다. 198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 전략이 제조업 중심에서 투자 중심으로 전환되었다.*1 일본 자본의 해외 직접투자가 증가했다. 그리고 홍콩의 역외금융센터를 통해 간접투자도 진행되었다. 90년대 한국 종합금융사가 홍콩의 역외금융센터에서 자금을 공급받았다. 한편, 우루과이에서 다자간 무역 장벽 제거를 목표로 협상이 진행되자 농산물 수입도 불가피해졌다. 

2차 오일쇼크 이후 동독의 경제도 취약해졌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도 70년대 후반 과도한 해외 차입으로 상업 은행의 부채 위기를 겪었다. 80년대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가 증대하고 있었다.

◇ 금융 자유화를 통한 국가 운영

1961년 외자도입 운용 방침이 마련되었고, 국가가 중심이 되어 유치한 외국 자본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성 때문에 1966년 외자도입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외국인은 기업 소유와 경영, 국내 기업 주식 소유 및 판매 등이 허용되었다. 국가는 상환해야 하는 차관 대신 외국 자본의 직접투자를 촉진하고자 했다. 그리고 72년 사채 시장이 사금융으로 제도화되면서, 상업 은행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오일 쇼크로 국제 이자율 부담 증가, 상업 은행을 통한 기업 금융 조달의 한계, 제4차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을 위해 더 많은 외국 자본을 유치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1975년 외자를 유치하여 기업에 금융 자본을 조달하는 종합금융회사 설립 및 운영을 규율하는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2 90년대 종합금융회사는 홍콩의 역외금융센터에서 주로 자금을 공급받았다.*3 최근 해외 연구에서 역외금융센터가 금융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고되고 있다.*4

신군부는 1980년 은행의 경영 자율화 조치 등 금융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정부 소유의 은행 주식이 매각되면서 은행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 한편, 국영 은행의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81년 한일은행, 82년 서울신탁은행, 83년 조흥은행이 매각되었다. 금융 산업 진입장벽이 완화되어, 80년대 5개 시중은행이 설립되었다. 은행 자율화를 위해 1983년‘금융기관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제2차 오일 쇼크로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신군부는 인플레이션 억제에 집중하며, 국민에게 일방적인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국가 주도 경제개발의 성과(행복)가 기업과 자본가에 집중되었고, 행복을 더 많이 가진 집단의 이익을 희생하여 농민과 서민, 노동자의 행복과 역량을 강화할 필요도 있었다. 80년대 초 도시 서민에게 부담을 주던 일부 조세체계가 개선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농어가 부채 문제가 제기되자, 부채 완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된 국민의 경제 회복력을 키울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회복력이 무시되었고, 기업의 회복력(국제 경쟁력 확보)이 중시되었다. 국민의 고통으로 확보한 국가 재정을 이후 대기업의 먹거리가 된 반도체 기술 개발에 투자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오일쇼크로 국내 자본이 해외로 이전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다루었다. 오일쇼크와 함께 국제 이자율 상승, 원/달러 환율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한국의 외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62년 이후 20년 동안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었지만, 원점으로 돌아갔다. 해외자본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국제사회가 냉전 질서로 복귀하자 국방비를 확대해야 했고, 이를 위해 국가 재정이 확대되어야 했으며 대외 개방 흐름에 대응하면서 경제를 성장시킬 서비스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70-80년대 외채 규모 추이/ 단위: 백만 달러, %. (출처:재무부, 『한국경제와 외자도입』 1991, p.20.)

그러나 이런 맹목적인 사고 때문에, 내부에서 위기를 키우게 되었다. 기업들이 부동산 개발과 투기에 뛰어들었고, 자본력을 갖추지 못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에 기업 수익성 약화 문제를 보지 못했다. 그 결과 한보 부도로 상징되는 기업 실패와 정부의 금융 관리 실패로 IMF 사태가 발생했다.*5

◇ 자유지역 구상 실현 수단 : 특별조치법

1975년 제주도특정자유지역 개발구상 조사보고서에서 제시된 외국인 투자유치와 수출입 자유지역으로 개발하는 구상의 실현을 위해 특례 도입 필요성이 제시되었다(이전의 기고 참조). 이런 관점에서 제주도 토지 이용과 소유와 관련된 특례를 실질적으로 다루는 법률 체계가 필요해진다. 이를 위해 1980년 ‘특정지역종합개발촉진에관한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다. 제주도 개발계획 근거가 일반법의 범주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법률에 따라 특별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각종 특례, 인허가 의제, 토지수용 등 개발 제도가 도입되면서 공리주의 논리에 따라 개발 사업자의 편의가 증대되었다. 특별조치법이 제주도개발특별법(10년 한시법)의 모태가 되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실책과 제주 사회개조 구상

1980년에 1975년의 제주도특정자유지역 구상의 타당성 검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83년에 미국 벡텔사에 의해 제주국제자유무역지역 육성을 위한 타당성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냉전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자유무역(항) 기능의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다만, 86년까지 제주의 민속문화와 자연을 활용하여 관광개발을 추진하며, 첨단산업단지 겸 국제금융 중심지 개발계획이 제안되었다. 따라 3개 관광단지(중문, 성산, 표선)를 중점 개발하고, 13개 관광지구가 지정되었다. 

화순항 일대 복합기능 국제자유지역(항) 구상도(1983년)

그러나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구체적인 구상을 하고 있었다. 1982년 인플레이션 상승률이 다소 안정화되자, 한국개발연구원은 청와대에 국가 운영 전략 수정을 제안했다. 주요 전략에 ‘경제 개방화’가 포함되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냉전으로 국방비 증가를 감당할 수 있는 재정수입(부가가치세) 확보와 우루과이 라운드(당시 새로운 협상 체제 전환)라는 개방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산업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신군부에 제시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외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 시장을 개방(역외금융센터 설치)하여 외국인 투자를 촉진해야 하며, 서비스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군부는 85년 소 값 하락 이후 초지 조성 권한을 시도로 이양하고 골프장 개발을 추진했다. 그리고 제주도 골프장 개발은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제주 사회를 개편하려는 신호였다. 한국개발연구원의 구상도 한국 경제 위기를 키우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80년대 후반 냉전이 해체되자, 한국개발연구원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 성장에 따라 레저 수요가 증대되는 등 대외 환경 변화를 강조하며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한국개발연구원은 1983년의 국제자유무역지역 육성 사업을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제주도를 장기 체류형 휴양 관광지로 개발하고, 국제자유무역지대와 역외금융센터 설치를 주장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중앙의 세수 증대 목적으로 관광산업 촉진 개발을 강조했다. 농업 사회 중심의 제주를 서비스산업 사회로 바꾸어 개방화 국제화 시대에 대응해야 하고, 중앙 정부의 세수 증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특히 중앙의 금융 자금을 원활하게 공급하는 역외금융센터 설치를 원했다. 이를 위해 복잡한 계획 체계를 단일 법률 체제에서 단일계획으로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주도 수용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관광객 수용 때문에 관광지 매력이 상실되는 문제가 있다고 보면서 제주도와 도민을 중앙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 

이런 사고는 중앙 중심적이기 때문에 편협할 뿐만 아니라, 집단사고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경제개발계획은 [경제]와 [계획] 개념으로 구분된다. 경제는 상품과 서비스 중심의 협소한 개념이며, 계획은 폭넓은 사고를 전제로 하는 전략개념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사고는 경제활동으로 생산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중심으로 전략을 생각했기 때문에, 휴양도시 전략이 나올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전략을 먼저 생각하고 경제를 생각하면. 농업을 유지하거나 활성화하는 방안이 도출될 수 있다. 그래서 계획(전략)을 편협한 사고를 하는 집단에 맡기면 사회가 집단사고 위험에 빠지게 되고, 지역이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국토계획과 지역계획에 지역 주민의 생각과 사고를 반영되지 못하는 중앙 통제식 계획 체제에서 발생한다. 

1984년 총선에서 그동안 누적된 불만이 표출되었다. 총선의 결과는 신군부와 민정당을 견제하라는 국민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지방자치 실시 카드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이 만든 경제개발과 국토개발의 중앙 통제 체제를 유지하면서, 지방의회만 부활하고 시도지사를 임명하는 사이비 지방자치를 구상했다. 그리고 주민자치를 부정했다. 87년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달성되었고, 시도지사도 직접 선출하게 되었지만, 중앙집권화된 권력 구조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헤드라인제주>

글쓴이 김평선은...

제주4.3유족으로 정치학을 전공하고 제주4.3에서 서북청년단의 폭력행위 동기를, 미군정의 제주도제 실시 사례에서 영토와 권력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시야를 넓혀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운영되어 온 과정을 정치철학, 권한 이양과 분권화 등 국가 운영을 위한 기술(statecraft)를 중심으로 공부해 오면서, 국가를 ‘권력과 지배’, 그리고 ‘자유’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1. Robert Corker, “The Changing Nature of Japanese Trade”, IMF, Finance & Development, Vol.28(2), June 1991, pp.6-9.
*2. 김대호, “종합금융회사의 설립 및 발전과 쇠퇴”, 『경영사학』, 제29집 2021. p.75.
*3. Kim Kihwan, “The 1997-98 Korean Financial Crisis: Causes, Policy Response and Lessons”, Crisis Prevention in Emerging Markets IMF-Singapore Government High level seminar 2006. July, p.5.
*4. Daniel Haberly, Dariusz Wójcik, “The end of the great inversion: offshore national banks and the global financial crisis”, Journal of Economic Geography, Vol.20(6), November 2020, pp.1263–1292,
*5. 정균화, “우리나라 기업의 과다차입과 과잉투자에 대한 정밀해부”, 『상장』 2003년, 2월호, pp,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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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국경제 해결책? 2025-03-15 23:42:58 | 223.***.***.40
늘어나는 빈집과 빈상가!
초저출산,초고령화,절대인구감소에 따른 잠재성장율 저하!
무너지는 제조업 경쟁력!

겨우 1%대 금년 경제성장율도 머지 않아 마이너스 성장율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위기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해결책의 하니로 지정학적 장점을 살려 대한민국을 한중일의 중심으로 육성시키는 것이다.

제조업이 아닌 문화,서비스산업등 비제조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서울이나 제주등 전국을 중국,일본의 일일생활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외 자본과 인력이 대한민국에 넘치면 이는 곧 국가안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작지만 다양성을 품고 있는 compact한 한국의 장점을 잘 살려 서울과 제주를 한중일의 제1,제2수도로 발전시킨다면 지금의 위기를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How to cook Jeju? 2025-03-15 17:31:18 | 223.***.***.47
제주는 단지 대한민국의 최남단 섬이 아니라 Asia의 중심이다.콤파스 중심을 제주에 놓고 원을 그리면 항공으로 2~3시간거리이내에 서울,북경,상해,동경,오사카,광주우,홍콩,타이페이,마닐라등 수 많은 거대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는 이런 지정학적 장점외에 섬이라는 특성과 4계절 그리고 천혜의 관광자원이라는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어 분명 이들 도시들과 구별된다.여기에 두바이나 도하같은 멋진 인공관광자원들을 더해 제주를 Asia의 중심으로 육성시키는게 제주는 물론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모델이 될 것이다.
이는 국가안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각국의 자본과 인력이 넘치는데 무슨 전쟁의 위협이 있겠는가?

제주는 서울이나 싱가포르의 3배 크기이다.
크게는 중산간을 기준으로 개발과 보존이 가능하다.

화순항 개발? 2025-03-15 16:48:02 | 223.***.***.140
수심도 가장 깊고 인구 1억8천만명의 중국 최고 부자들이 사는 곳 상해(절강성,강소성포함)와 가장 가까운 화순항을 이제라도 새롭게 재조명해봐야 한다.

상해(절강성,강소성)는 섬(岛)다운 섬,산(山)다운 산,눈(雪)다운 눈이 없는 곳이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보고(宝库)이다.

保存과 开发의 조화를 통해 제주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오래전인데 참 혜안이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