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누구도 배제받지 않는 사회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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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누구도 배제받지 않는 사회는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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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심(平靜心) 「명사」 외부의 자극에 동요되지 않는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지만, 우리말샘에 등록돼 있는 평정심의 뜻이다. 외부 자극에 동요되지 않는 고요함이라……. 이 매력적인 단어에 마음이 홀려서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이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동요하게 하는가. 평안하고 고요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부 자극이 극소화되면 평정심은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외부 자극이란 무엇인가.

자극(刺戟)「명사」 어떠한 작용을 주어 감각이나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게 함. 또는 그런 작용을 하는 사물.

외부란 바깥을 의미하기에 외부 자극이란 바깥에서 어떠한 작용을 주어 반응을 일어나게 하는 상태나 사물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자극을 주는 상태나 사물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는 고요한 경지를 평정심이라고 사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외부 자극을 받을 때 동요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 개인마다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자극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고 감각이 다른데 그렇다면 사람마다 도대체 어떠한 노력과 얼마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평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빈곤의 삶을 사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보다 숙식이나 더위 혹은 추위와 같은 외부 자극에 얼마나 많이 노출돼 있을까. 여성이나 노인, 아동·청소년은 성인보다 언어적 물리적 폭력에 대한 외부 자극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장애인이 거리를 걸을 때 비장애인과 비교해서 받게 될 외부 자극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감내해야 할 외부 자극은 얼마나 위험한 것일까. 코로나라는 세계적 역병의 시대, 잠깐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 전까지 운영되던 가게 점포 상점들에 ‘임대문의’가 적힌 것을 볼 때, 소상공인들이 겪는 외부 자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고민을 거듭할수록 종교에서 혹은 명상센터에서 자주 말하는 저 평정심이라는 말이 그간 공허한 울림으로 인식됐던 이유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외부 자극이라는 것이 사회 구조 속 계층마다 얼마나 다양하고 차별적으로 분포된 것인지, 굳이 객관화된 수치로 따지지 않더라도 조금의 상상력만 가동하면 표면화되는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다름을 차지하고서 오늘의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과 무엇을 맛있게 먹을지 고민하는 사람의 외부 자극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여성이 타주는 커피가 더 맛있다는 상사의 발언에 시달리며 생수병을 못 나르는 것이 바로 능력 부족의 증거가 되는 노인 아동 장애인이 받는 외부 자극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 사랑하고 있어도 그것이 비밀이 돼야 하는, 사랑이 마치 저주처럼 작용하는 사람들의 외부 자극은 분명히 이성애자와 다른 것이다. 피땀흘려 일하던 곳의 문들 닫아야 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일하던 점원들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몰리는 외부 자극은 내부의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 외부 자극에서 과연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이 외부 자극은 한 번 참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일도 밥을 삼켜야 살아갈 수 있고, 내일도 모멸을 견뎌내야 살아갈 수 있고, 내일도 집세와 공과금은 내어야 하고, 내일도 저주받은 사랑은 유지될 테니까. 그래서 다시 묻고 싶다. 밥을 먹고 모욕받지 않고 사랑을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들이, 아니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의 면면이 왜 낱낱이 거부되고 있는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이 왜 버티고 참아야 할 외부 자극이 되고 있는가. 그들에게 감히 평정심을 논할 수 있는가. 이 사회는 평정심 이전에 이 차별적인 외부 자극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는가.

외부 자극을 그나마 균등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제도화하는 것이다. 사회가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지막 보루가 되고 혐오 세력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방패가 되는 것이다. 여전히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바라며 평정심을 가질 수가 없다.

누군가 굶고 폭력에 시달리고 문턱조차 넘기 힘들고 죽음을 생각하는 이 살벌한 고통의 사회에서, 약자라는 이유로 상처를 외면하고 인권을 무시하고 있는 현실에서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이란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이기심인가.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이고 그 시민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시민 누구도 배제 받지 않는 사회,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아닌가. 우리는 과연 민주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사람 프리즘'의 글은 <웹매거진_멍Mung>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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