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태풍이 오는 날이 두렵지 않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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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태풍이 오는 날이 두렵지 않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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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주의보가 떴다. 처서인 오늘 조금씩 비를 내리다가 그치고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어려서부터 비가 내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신발이 젖고 양말이 젖고 그 상태에서 학교 수업을 들으면 조금 비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름 장마에는 슬리퍼를 신고 등교를 했다. 양말을 가방이나 호주머니에 넣고 참방참방 고인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걸었다. 학교에 도착하면 발을 씻고 손수건을 꺼내 닦고 양말을 신고 실내화를 신었다. 비가 두렵지 않은 사람은 비에 젖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비가 좋은 사람은 안락하게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내려서 바로 아파트 현관으로 이어지는 주차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아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비를 감상하고 차를 마시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서로가 닿지 않으려 애쓰며 습기와 냄새를 견디는 버스나 전철 내부에서 젖은 우산을 부여잡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나는, 바람에 비가 흩날려 애써 차려입은 옷이 엉망이 되고 머리카락이 휘날려서 툴툴대며 걸어서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야 했던 나는, 비가 싫었다.

그러나 태풍은 달랐다. 휘몰아치는 비바람 소리도 좋았고 나가 있으면 무방비로 다 젖어버려서 덜 젖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바람이 거세게 내 팔목을 밀어내 마침내 운동장 저 끝에 우산이 날아가 나뒹굴어도 달려가면서 좋았다. 어떨 땐 그저 비를 맞고 걷고 싶었다. 젖지 않을 방법이 없으니 두렵지도 않았다. 홀딱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면, 세 들어 살던 작은 집 안방 구들목에 먼저 도착한 동생을 안고 오랫동안 우리가 좋아했던 노란 꽃무늬 이불 속에서 엄마가 있었다. 어서 씻고 옷 갈아입고 들어오라고, 추위를 많이 타서 한여름에도 비를 맞으면 오들오들 떠는 내게 있어 이불 속은, 엄마와 동생의 반기는 말들은 작은 천국이었다. 태풍이 오면 그날이 늘 생각났다. 무수히 많은 비와 태풍을 거쳐왔을 텐데도 어린 시절, 저학년의 내가 맞이한 비바람과 이불과 엄마와 동생, 낮인데도 켜둔 형광등 불빛 같은 것들.

육지에 사는 가족들은 제주도 날씨를 열심히 보고 연락을 해온다. 날씨가 험해서 험한 날은 더 아픈 엄마가 걱정돼 안부차 전화를 하니 엄마는 자식이 바쁜데 방해가 될까 봐 몇 번이나 망설였다고 한다. 문단속 잘하라고, 조심하라고, 제주시는 중산간 마을들과 달리 큰 피해가 오는 경우는 드문 편이라고 안심을 시켰는데도 다시 문자가 왔다. 조심하라고. 이토록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은 정말로 큰 복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매번 더욱더 새삼스럽게 느낀다. 언제나 달려올 태세가 된 가족들, 언제나 달려갈 곳이 있는 나의 처지는 비가와도 새지 않는 처마 같다. 어쩌면 비를 좋아해야 하는 사람은 나인지 모른다고, 승용차와 지하주차장과 큰 창을 가진 사람들의 안락함이 아니라 비에 젖어도 따스한 이불 속이 마련된 나일 거라고 확신한다.

태풍은 공기와 바다를 순환 시켜 공기를 정화하지만, 그리고 나에겐 따듯한 기억으로 복기 되지만, 그런데도 비가 내리면 자신이 아니라 집이 젖을까, 집이 잠길까 두려운 사람들이 많다. 강풍과 억센 비에도 빠르게 달려 배달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닷가에 매어둔 배들이 걱정될 사람들이 많다. 지어놓은 농사가 일순간에 엉망이 될까 봐 뜬눈으로 지새워야 할 사람들이 많다. 반드시 재료가 있어야 장사를 할 수 있는데 배달이 지연되어 며칠 장사를 접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처마 밑이나 지하도에서 생활하는 하우스리스들의 젖은 생은 또 어떠한가.

자연재해가 몰려오면 이 모든 약자는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다. 내가 젖은 옷과 젖은 신발과 젖은 양말과 온갖 냄새와 사람들 틈의 열기로 비를 싫어할 때도 그들은 언제나 생이 흔들리는 체험으로 비를 두려워했으리라. 비에 젖어 채 귀가해서 가족의 품에 안겨 안도할 때, 그들은 돌아갈 집조차 없이 옷을 입은 채로 신을 신은 채로 젖은 것들을 말렸으리라. 쓰러진 농작물을 일으켜 세우고 몇천 원에 목숨을 걸고 배달을 하고 허탕을 친 하루로 뼛속까지 젖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단지 개인의 불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 시스템은 어디까지 시민을 지켜야 하는가는 헌법 제 10조에 명시돼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시민의 불행이 구조적 문제와 동떨어질 수 없다. 사회적 시스템은 따라서 태풍 하나에도, 적확하게 작동돼야 한다. 이불을 덮어줄 존재가 없는 수많은 개인인 시민의 인권을 국가는 보장해야 한다.

바람이 거칠어지고 있다. 잠 못들고 비바람이 두려울 사람들이 안전할 수 있기를, 태풍은 불어야 하고 불어올 테지만 부디 모두 무사하기를,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안녕하기를.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은...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사람 프리즘'의 글은 <웹매거진_멍Mung>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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