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수의 꽁트] (11) 어떤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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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의 꽁트] (11) 어떤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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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급히 택시를 정차 시켰다. 차를 내려서 조금만 이면도로 쪽으로 들어가면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였다. 어제 아침 김청수와 통화할 때부터 나는 우리가 졸업한 모교를 방문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청수와 나는 이 학교에서 3년을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였으므로 그 시절에 대한 나의 추억에는 그에 대한 기억이 함께 따라다니고 있는 셈이었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교문 안에는 사람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나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옛날 학교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역사 오랜 본관만을 남겨놓고 다른 것들은 모두 새로 들어선 낯선 건물들이었으므로 이를 바라보는 나의 머릿속은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인상이 어지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내가 이 학교를 떠난 후 흘러간 30년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듯이 나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다. 내 눈 앞의 풍경들과 내 기억 속의 모교 모습이 다른 것처럼, 내가 이 학교에 다닐 때 그려봤던 30년 후의 내 모습과 내가 현재 처해있는 삶의 좌표는 너무 달랐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방황과 도로(徒勞)의 세월이 시작되었던 것이 바로 이 학교 교문을 드나들던 때가 아닌가 싶었다.

김청수의 얘기로는 정지향은 분명히 나를 기억하고 있고 언젠가 나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더라고 했다. 게다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나의 소설들을 많이 읽어봤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김청수는 나의 고등학교 때 친구이고 정지향은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니까 그들 두 사람은 직접적인 친교의 기회가 없었다. 김청수가 정지향의 화단(畵壇) 활동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은 정지향의 작고한 남편 강만춘을 통해서였다. 김청수와 강만춘 두 사람은 모두 나하고는 고등학교 동창관계인데, 강만춘은 나하고는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강만춘이 김청수보다 나하고 더 가까이 지냈지만, 나중에는 강만춘이 나보다 김청수하고 더 가까워 졌는데 그것은 그네들은 지방 소도시인 이곳에 거주하고 나만 서울에 거주한 탓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격월(隔月)로 모이는 고교동문들의 재경동창회에 자주 나가는데, 김청수가 지난 번에 이 모임에 불쑥 나타나서 나에게 전해준 소식이 나의 마음을 동하게 했던 것이다. 서울에서의 그 모임에서 내가 정지향을 꼭 만나러 가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이번 달에 정지향의 개인전이 있음을 알아봐 주었고, 어제는 내가 이 친구에게 전화로 오늘의 고향 방문 계획을 말했더니, 정지향에게 그런 통고를 미리 하겠노라고까지 말했던 것이다.

실로 오래 만에 와보는 모교 방문이었지만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이제 곧 만날 정지향과 나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갈 것인가 하는 상상이었다. 정지향은 그 동안 내가 살아온 내력을 별로 알지 못할 터이니, 나하고 오늘 대면하는 것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있을지는 김청수가 그녀에게 전해준 소식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 생각되었다. 김청수는 전화 통화에서 매우 호의적인 전망을 내비쳤음이 생각났다.

정지향은 5년 전 남편의 죽음을 당한 다음에는 오랫동안 손 놓고 있었던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종전의 무덤덤한 세월 보내기와는 다른 열정적인 삶을 살고있으며 나를 만나면 소설가와 화가의 의미있는 교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옛날 나의 기억 속의 김청수는 정지향의 남편 강만춘에 대해 영 껄끄러운 선입견을 가지고 흠 잡기를 좋아했음이 생각나게 하는 말이었으며, 이는 또한 강만춘은 생전에 정지향하고는 교감을 나눌 적합한 파트너가 아니었음을 나에게 암시하는 말로도 들렸다.

옛날 고교시절에 김청수와 강만춘의 불화관계는 나로 인하여 더 거북한 것이 되었다고 기억된다. 원만한 학우형(型)인 김청수는 싸움 잘하는 왈패형인 강만춘을 싫어했는데 내가 강만춘을 싸고돈다는 이유로 김청수의 강만춘 혐오가 더욱 심해졌던 것 같다. 강만춘은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지만, 내가 그를 좋아할 다른 이유도 있었음이 사실이다. 공부만 잘하지 무골호인형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소문난 싸움꾼인 이 친구를 나의 안전을 지키는 보호막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처했던 삼각관계가 더욱 미묘하게 꼬이게 된 것은, 교내웅변대회 때문이었다고 기억된다. 나는 글재주가 뛰어났지만 말솜씨는 말더듬을 겨우 면할 정도였고, 김청수와 강만춘은 모두 구변이 뛰어난 반면에 학과성적은 보통 이하였다. 그런데 교내웅변대회에서 내가 강만춘의 웅변 원고를 써준 것을 알고 김청수가 토라져 버린 것이다. 내가 쓴 웅변원고로 나섰던 강만춘이 대회 일등을 함으로써 세 사람의 관계는 더욱 거북해졌던 것 같다.

그 당시 웅변대회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때는 학교강당이란 게 없었던지라, 바로 내 눈 앞의 저 운동장에 모인 전교생들 앞에서 김청수와 강만춘이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뛰어난 글재주를 갖고 있으면서도 말재주꾼 친구의 뒷바라지밖에는 할 줄 모르는 한심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 당시 이 같은 나의 천분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이를 바탕으로 나의 미래를 설계했다고 할 수 있다. 말더듬으로 타고난 나의 운명적인 핸디캡을 벌충하는 길은 뛰어난 글재주를 연마하고 발휘하는 것이라는 결심이었다.

내가 말더듬이었다는 기억이 제일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초등학교 시절 정지향 앞에 있을 때였다. 정지향 앞에만 가면 더욱 말을 더듬게 된 것은 그녀의 얼굴이 뛰어나게 예뻤기 때문이라고 기억된다. 그녀가 입은 옷이 흔히 볼 수 없는 아주 고급옷이었다는 것도 나를 기 죽게 하였다. 그녀는 그 당시 우리 지역 군수(郡守)의 손녀딸이었고 소문난 부자이기도 했는데, 언제나 궁상맞은 행색이었던 나는 귀공녀 같은 그녀 앞에만 가면 폭삭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학교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못 가져간 나의 처지를 눈치 챈 정지향이가 자기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했을 때 나는 그것이 그렇게 창피스러웠다. 그런 호의를 보이는 것은 분명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나는 왜 그것을 창피하게만 여겼던 것일까. 나는 정지향 앞에만 서면 언제나 말을 더듬었다고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나를 그 당시처럼 빙충맞은 남자로 기억하고 있을까, 이것이 그녀를 찾아가는 나의 의문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닐 때 정지향을 찾아가 만나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나의 부질없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지향은 서울의 어느 유명대학 미술과에 재학중임을 알고있으면서도 단 한번 데이트 신청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좋은 기회가 한번은 있었다. 우리가 대학 3학년생이었을 때 정지향으로부터 엽서 한 장을 받았는데, 자기네 미술과 3학년 미술전시회에 대한 안내장이었다. 나는 이 엽서를 들고 한참을 고민하였지만, 끝내는 같은 초등학교 동창인 강만춘에게 넘겨버렸다. 결국 나 대신 이 미술전시회에 찾아간 강만춘이 정지향하고 결혼하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처지가 딱한 것은 사실이었다. 말 더듬는 지방학생에게 돌아오는 알바이트 자리는 없었고, 그냥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힘든 처지에 정지향을 만나 어떻게 할 것인지 막막하였던 것이다. 6년만에 대학을 졸업한 내가 이를 악물고 대기업체 취직에 성공한 것은 정지향 앞에 떳떳이 나타나기 위함이었다고 자평하고 싶다. 뛰어난 글재주라고 해봐야 정지향 같은 귀공녀를 넘볼 만한 밑천은 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몇 해 넘기지 못하고 정지향은 강만춘의 여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번에는 이들 신랑신부의 오랜 친구 자격으로 그들의 우인대표 연설을 맡았던 나였고 그 이후 나는 이들을 만나기를 극력 피해오다가 5년 전에는 강만춘의 작고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먹고 살 만큼의 생계 수단을 얻었다고 생각되자 나는 결국 퇴사의 결단을 내렸지만, 방황의 길은 끝이 없었다. 소설가로 얼마간의 성공을 하고 사회적인 신분상승을 인정받은 다음에 결혼하자는 계획으로 있다보니 50세가 다 된 나는 아직도 미혼이다.

씁쓸한 추억의 장면들이 어른거리는 모교의 운동장을 한 바퀴 둘러본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정적에 쌓인 교문 밖으로 나섰다. 여기에서 정 화백의 미술전시장인 **갤러리까지는 그냥 걸어가기로 하였다. 서울에서 나설 때에는 초봄의 날씨가 춥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 사이에 바람결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정지향은 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이것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이제 그녀 앞에 나타나는 나의 모습은 옛날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힘을 싣기로 했다. 그때처럼 말을 더듬지도 않는다. 옛날 같은 가난뱅이도 아니다. 김 청수가 전하는 바로는, 정지향은 나의 작품을 읽어봤다고도 했다.

얼마큼 걷다보니 어느덧 덥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코트를 입을까 말까 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벗어서 손에 들기로 했다. 정 화백의 미술전시장인 **갤러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자그마하지만 아담한 건물이었다. 이 정도의 중소도시에 이만한 전시장이 있는 것도 대견한 일이다 싶었다. 조심스럽게 갤러리에 들어선 나의 시선은 정지향 화백의 모습이 어디에 있을지 찾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장 입구 카운터에서 나를 맞는 사람은 대학생 같이 보이는 젊은 남자였고, 그 안쪽을 둘러보아도 관객들 너댓 사람이 작품을 감상하며 거니는 모습만이 보였다.

--어서 오십쇼. 코트를 들고 계신 걸 보니 어디 멀리서 오신 것 같네요.

--맞아요. 서울서 왔는데, 정지향 화백하고는 초등학교 때 친구였소.

--아, 그러십니까. 저는 정 화백의 아들입니다.

--그래요? 정 화백에게 이렇게 큰 아드님이 있었구나.

--제가 막냅니다. 제 위로 형님이 두 사람이나 있어요.

--그래요? 아들만 3형제라는 말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어머닌 든든한 아들 3총사가 호위무사로 지키고 있습지요.

--아직 학생인 거 같은데.

--네, 대학 2학년인데 오늘 주말이라서 어머니 대신 전시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말씀은 들었습니다. 옛날 친구분이 오늘 오신다고 말이죠. 어머닌 어제 저녁 어떤 지인의 개인전 오픈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로 가셨는데 오늘 오후에 오신다고 하셨어요. 그럼, 저기로 가셔서 잠시 편히 쉬시지요.

젊은이는 전시장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께로 나를 인도하고 나서 물었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하셨는데, 뭘 좀 드시지요.

--아, 시원한 사이다나 있으면 좋겠는데.

--네, 사이다는 여기 있습니다. 그 코트는 이리 주시면 제가 여기 옷걸이에 걸어 두겠습니다.

카운터로 돌아가 앉은 젊은이는 새로 들어온 어떤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체격도 좋고 붙임성이 있어 보여서 호위무사라는 말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느닷없이 밀려드는 상상 공상의 나래들을 뿌리치면서 시선을 갤러리 안 쪽으로 돌렸다. 여기 진열된 것들이 정지향이 근래 몇 년을 두고 정성을 바쳐 완성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하니 그 속에서 그녀의 아우라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이다를 다 마신 다음에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서 작품들이 진열된 하얀 벽 쪽으로 이동하였다.

미술전람회에 가본 적이 별로 없는 나에게 정 화백의 작품 감상은 사실상 막막한 일이었다. 나는 진열 작품들 앞에 한참이나 서서는 그 그림들 속에서 뭔가 감흥이나 의미 같은 것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것들은 추상화가 아니라 구상화여서 다행이었다. 그것도 비슷비슷한 풍경화가 아니라 인물화였고 주로 나이 지긋한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을 근접 시선으로 그린 작품들이어서 미술 문외한인 나의 마음에도 어떤 울림 같은 것을 자아내 주었다.

진열된 작품들을 모두 둘러본 나는 정 화백의 스타일 같은 것이 대충 짐작되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자기 옆 누구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달랑 외롭게 혼자만 있는 인물은 하나도 없으니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 외롭게 사는 사람이 안중에 없다는 것인지, 이제까지 걸었던 막연한 기대가 스러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주춤거리던 발길을 전시장 밖으로 돌리고 말았다. 카운터의 젊은이에게 바쁜 사정이 있다고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지향은 오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울 나들이를 갔다는 것이 아닌가. 어제 저녁 서울에서 무슨 행사가 있었다면, 오늘 이 시간에는 여기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좀 서운하긴 했지만, 오늘 여기까지 와서 한 가지는 얻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오랫동안 정지향에게 프로포즈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소설가 양영수>

<양영수의 꽁트>는...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바야흐로 영상시대라고 한다. 이야기문학을 감상하는 것도 문자매체보다 영상매체를 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영상매체 속에서는 금방금방 장면이 바뀌는 스토리라인을 사람이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에 깊이있는 사색과 음미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 마음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체리듬과 심리적인 템포에 따라서 메시지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는 문자매체를 이용하는 독서가 좋은 방법이다.

꽁트 연재를 통해 필자가 바라는 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양영수 작가 

제주 태생의 소설가.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 정년퇴임.

그 동안 내놓은 작품들로는 단편집 '마당 넓은 기와집' (2008년), 장편소설 '불 타는 섬' (2014년,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복면의 세월'(2019)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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