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13) 볕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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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미의 사는 이야기] (13) 볕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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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축제 기간 중에 강의를 듣던 나는 ‘새내기학생’이라는 핑계로 객기가 올라와서는, 강의를 듣던 교수님께 ‘밥 사 주세요!’ 하고, 되도 않는 땡깡‘을 부렸던 때, 교수님은 흔쾌히 시간을 내어 술을 사 주셨다.

그래서 나는 모른 척하고 넙죽넙죽 따라주시는 술을 다 마시고 마침, 또 제자가 하는 노점을 지나칠 수가 없어 샀다면서 건네주시는 핸드폰걸이를 좋아라고... 홀랑 받아서 핸드폰에 걸고 다니다 성의 없는 처신으로 그만 잃어버리고는 며칠쯤 걱정을 하다가 금세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몇 달이나 잊어버리고 살다가 얼마 전, 교수님을 뵈었다.
방학을 끝내면서 취업을 했던 날로부터 첫 월급을 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과 방학 동안에 안부인사 한번 드리지 못한 무심한 제자라는 죄스러움을 벗어보고자 문자와 메일을 드렸었는데 교수님이 반갑게 또 연락을 해주신 거였다.

그리고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뵌 교수님.
정말 오랜만에 뵈어 반갑기만 한 교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던 것인데도 결국 또, 교수님에게서 저녁을?얻어먹고는 뻔뻔하게 웃으며 “고맙습니다.” 한마디밖엔 못했다.

사람과의 교제가 쉽지 않았을 내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싶으셨다고 하셨지만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대는 바람에 결국엔 아무데도 가지 않고 술이라고는 못 마시는 내가 한 병의 맥주를 낑낑대며 비우는 길고 오랜 시간을 지켜보면서 웃기만 하셨다.

잔에 가득 채워지면 들기 힘들 것 같다고 맥주를 몇 모금씩을 잔에 따라주시던 교수님께서는 여전히 세상에 주저하며 거리를 두려는 내 몸짓과 마음을 보셨는지, 이 세상은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그것이 결코 나를 향해 다가오지는 않는다고, 세상이 내가 다가갈 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지는 더더욱 않는다고...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에 마음껏 도전을 해보라고, 누구도 내 삶을 살아주거나, 아쉬워해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셨다.

선택이라는 것은 항상, 나를 먼저 염두에 두기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게 했던 내 지난 시간은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내 가족들을 참 많이도 아프게 했었다.

비록 내 지난날의 선택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선택들이 모두 나를 염두에 두고 할 만큼 내가 당당하거나 신념이 강하지도 못한 나약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 내가 선택 한 것들은 그 시간에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게 차선의 선택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 자리에서 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길 없는 밀림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발을 걸을 수밖에는 없던 시간들...

그 길에 발을 들여 나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늘 죽음이란 유혹과 동거를 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긴 시간들을 지나오는 동안 가족들은 내가 들이미는 칼날에 모두가 피범벅이 되어 가슴에 가시만 남은 고슴도치가 되어 웅크리고 앉아 무엇도 달갑지 않고 무엇에도 마음을 줄 수 없는 독을 안고 살아가는 나를 지키느라 무던히도 속을 앓아가며 살아야 했다.

그런 시간의 덧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덕거리며 긴 터널의 끝에 간신히 서 있던 내게, 나를 위한 길을 선택하고 하고 싶은 것들에 주저하지 말라 용기 주시는 교수님의 말들은 이제 겨우 신을 신고 선 아이에게 한걸음 뒤에 물러앉아 두 손 내밀어 '오라' 다독여주는 부모의 환한 웃음처럼 두려움이 고개 들던 내 가슴을 가라앉게 한다.

가족의 그늘에서 나와 이제 1년하고도 반년.
낯선 이들과 부딪혀가며 홀로 살기 위한 방법들을 찾아 내 나름으로는 많이도 다녔고 많이도 만나면서 마음 상하는 일도 겪었고, 혼자 살기 결심한 마음을 후회한 적도 수십 번이다. 

그리고 홀로서기 위한 가장 큰 짐.
생활을 위한 선택으로 직장을 얻은 지 한 달.
아직도 갈 길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어서 무엇을 먼저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 언제나 제자리를 맴맴 돌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여전히 쩔쩔매게만 되는 나.

그런 내게 그 날.
저녁을 함께 하며 들려주셨던 교수님의 많은 것들은 내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용기라는 게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면 가슴에 충만해지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다고 위안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고 싶은 도피의 길을 미리 생각하고 싶은 얄팍한 간사함.

오늘.
나는 빨래처럼 구겨진 내 속마음을 볕 좋은 날, 마당에 낮게 세워진 바지랑대를 높이 곧추세우고 팡! 팡! 먼지 털고 널어 볕받이를 해본다.

나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슴에 인(忍)으로 새기기 위해...

<강윤미 / 헤드라인제주 객원필진>

* 필자인 강윤미 님은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학년에 다니다 휴학 중입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강의실을 오가는, 그러나 항상 밝은 얼굴을 하는 강윤미 님의 모습은 아랏벌을 항상 훈훈하게 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이번 학기에 휴학을 하게 돼, 아랏벌의 빈자리는 더욱 커 보이게 합니다.
그의 나이, 이제 마흔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늦깍이로 대학에 입문해 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분입니다.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항상 직면해 있지만, 그는 365일 하루하루를 매우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강윤미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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