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권한 없어", 왜 갑자기 '유체이탈' 화법?
제주도청 정문 앞 '제2공항 건설계획 재검토 촉구 천막농성장' 분위기가 상당히 격앙돼 있다. 제주도정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권한도 없는 '힘없는 지방자치단체' 논리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중국출장을 마치고 귀임한 10일, 제주특별자치도는 안동우 정무부지사를 통해 발표한 제2공항 관련 제주도정의 입장을 발표했다.
성산읍반대대책위원회 김경배 부위원장이 단식농성을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면서 건강문제가 크게 우려되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급하게 기자간담회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내용은 국토교통부와 반대주민들간에 합의점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면서 두가지 입장이 덧붙여졌다.
하나는 반대주민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제주도의 입장에서는 전체 제주도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즉, 반대주민들 뿐만 아니라 한마디로 '다수 의견'을 헤아려 정책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같은 날 천주교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했던 이야기와 똑같은 것이다. 강우일 주교는 이 부분에 대해 다수결 논리에 우려를 표하면서 , 생존권이 걸린 당사자인 반대주민의 의견에 비중을 더 둬야 함을 강조했다.
대다수 도민사회 의견이라는 명분하에 정작 이해당사자인 해당지역 주민들의 의견이 '소수 논리'로 폄훼되거나 위축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 부분은 원 지사도 흔쾌히 화답을 했다.
그러나 두번째 입장은 상당히 의아스럽게 다가왔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제2공항 사업이 제주도가 하는게 아니다. 국토부가 모든걸 결정.진행하는 것이고 그 결정권에 대해 저희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제2공항 건설은 제주도에서 하는게 아니라 국토부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주도정은 아무런 힘도 없다는 취지의 논리다. '이래라 저래라'도 못하는 처지임을 항변한 것이다.
이 발언은 단순히 업무영역의 관할 기관을 언급한 차원이 아니라, 책임 회피적 논리로 전해졌다. 한마디로 '어이상실'이다.
불과 2년에 있었던 일 마저 '기억상실'에 걸린 듯,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11월10일, 공항 후보지 발표는 분명 국토부와 제주도의 협의하에 공동으로 이뤄진 것이다. 당시 두 기관은 정부와 제주도에서 같은 시간에 동시에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제주공항 인프라 확충 대안 선정을 위한 타당성 용역' 결과를 공개와 함께 공항 예정지까지 확정해 발표했다.
당초 용역에서는 공항건설 대안을 비교검토하고, 여러 후보지에 대한 평가결과가 공개되는 수준일 것으로 예상됐으나,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가 공항 후보지가 발표됐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그야말로 '깜짝 발표'였다.
이 발표가 있기 불과 며칠 전 도의회에서 단수 후보지로 발표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자 공항 후보지까지 덥석 정해버릴 경우 주민들의 반발이 예상된다면서 강력히 만류했다.
그러나 당시 제주도정은 공항입지는 과학적 분석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특수성이 있고, 사전에 의견수렴 내지 주민 동의절차를 거칠 경우 부동산 가격 상승 및 투기현상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면서 수용하지 않았다. 그때 제주도가 반대했더라면 단일입지 발표는 미뤄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미 뒤늦은 얘기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 결정방법은 분명 잘못됐다.
사전타당성 용역의 당초 취지에 맞게 후보지로 올라있던 4곳의 지역 주민들에게 입지 결정 가능성을 사전에 예고하고, 주민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비교평가 데이터를 제시하고 의견수렴 절차를 거쳤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결정시기는 조금 늦어졌을지는 몰라도, 문제가 이토록 복잡하게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방적 입지선정이란 1차적 원인, 그리고 이후 나타난 타당성 조사용역의 부실 문제, 이 두 가지 점 때문에 극한 갈등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귀책사유의 중심에 국토부와 함께 제주도정이 있다.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지나친 현실 왜곡이다. 지금의 공항 인프라 확충 논의는 정부의 국가전략 내지 국가차원에서 시급히 요구되어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 부터 제주도 차원의 지속적인 건의와 요청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방 관련 '국책사업'과는 성격 자체가 다른 것이다. 공항건설 관련은 제주도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국책사업이기 때문에 제주도는 아무런 결정권한도 없고 정부에서 하자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다는 말은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내년 지방선거에서 일방향적인 입지선정에 대한 절차적 문제에 대한 책임론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다 하더라도 그 발언은 적절하지 못했다.
이러한 발언은 도청 정문 앞에서는 목숨을 건 단식농성이 이어지고 있는데, 제주도정은 기자간담회를 갖기까지 '변명 구실'이나 '반박 논리'만 고심해 온 것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또한 제주도가 마치 국토부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나약한 존재'인 것처럼 하면서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고, 특별자치도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발언으로도 비춰진다.
사실 어느 시점인가 부터, 제2공항 문제는 국토부와 반대주민간 대립문제의 구도로 설정되고, 제주도는 제3자 위치에서 '중재'하는 역할로 뒤로 빠져 있다.
제주도는 "접점을 찾아보겠다"는 중재자 역할만 강조하고 있다. 국토부와 주민들간의 문제인데 제주도정이 나서서 주민들 의견 잘 전달하면서 중재해보겠다는 것이다. 유체이탈 화법의 극치이자, 비겁한 책임회피에 다름없다.
강우일 주교가 원 지사에게 천막농성 주민들을 만날 것을 권유하면서, 왜 '진정성을 갖고'라는 말을 그토록 강조했는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은 아니었을까.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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