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자락을 넘어가며 봄바람이 가쁜 숨 토해내듯 들려주는 애절했던 비극의 현장이…. 69년이라는 긴 상흔의 세월동안 쉼없이 출렁거렸을 저 파도물결에 묻어나는 그날의 절규가….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참혹했던 그날의 잔상과 함께 통곡의 환청으로 우리들의 눈과 귀는 멀어버린 지 이미 오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주의 4월은 쓰라리고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비운의 영령들을 추모하고자 모인 우리들은 그 쓰라림과 아픔을 온 몸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유족 및 제주도민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우리는 긴 세월동안 제주4․3에 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여 왔습니다. 그러한 신념하에 올곧은 행보를 지속해 왔으며, 특별법 제정 및 진상보고서 채택, 평화공원 조성 및 국가원수의 공식 사과, 그리고 국가기념일 지정 등의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냈습니다. 그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는 화해와 상생을 근간으로 하여 제주4·3의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키워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에는 용서와 화합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와 함께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용서와 관용이 선행되어야 하고 대승적 차원으로 화합을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는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자세와 도의적 책임의식이 필수적입니다. 국가는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절대적 피해자인 국민의 아픔과 슬픔을 감싸주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암울했던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인권침해의 중대과실을 범한 국가가 피해자에게 법적인 배·보상의 의무를 다해야만 합니다. 그동안 간과하였던 배·보상에 대한 정당한 요구를 겸허히 수용하고 4·3해결의 장으로 진정성 있게 다가오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국가가 국민들에게 그토록 강조하는 법과 원칙에 순응하는 길이며, 인류 공통의 과제인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나가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제주4·3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의 책임을 묻는 작업도 시급히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시기에 벌어진 제주4·3사건의 반인륜적 피해의 배후에는 미군정의 비호가 있었음이 명백합니다. 인권을 중심으로 한 국제법적인 접근을 통하여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정당하게 묻고, 그에 상응하는 사과와 후속조치들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치권의 적극적인 협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부디 이 문제에 대해서 자발적이며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민의를 대변하고 국가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정치권의 본연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과거의 역사는 결코 감추거나 왜곡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특히 제주4·3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지거나 편협된 시각으로 해석되어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단언컨대, 소중한 우리의 역사를 훼손시키지 않고 온건히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구태와 적폐를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와 국가의 혁신을 소망하는 국민의 기대가 실현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무너져버렸던 인권의 소중함을 일으켜 세우고, 국민 개개인이 국가의 주인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제주의 4월을 되찾아 4·3의 악몽으로 인해 퇴화되었던 우리의 눈과 귀로 따스한 봄기운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 따스함에 과거 얼어붙었던 평화와 인권의 기운이 해빙되어 퍼져나가 이 땅 위에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영령들이시여!
바라건대 저희 후손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이제는 부디 해원하시고 영면하시옵소서! 이곳 제주에 진정한 4월이 찾아올 수 있도록 굽어 살펴 주소서!
감사합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 양 윤 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