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 선거 '방해공작' 노골화 총장실 점거 7명 '제명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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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 선거 '방해공작' 노골화 총장실 점거 7명 '제명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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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5] 1986년 '무더기 제명처분'과 '옥중당선'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 사진은 제대신문 1986년 11월19일자 보도사진. 총장실 점거사태와 관련하여 7명에 대한 무더기 제명조치가 있는 날 이뤄진 후보자 합동유세에서는 현길호 후보가 구금된 상태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가 적었다. 사진은 제주대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총학생회장 후보 합동연설회.
[5] 1986년 '무더기 제명처분'과 '옥중당선'

1987년 11월17일,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제주대학교 본관 앞에서 집회를 갖고 있던 학생 중 30-40명이 갑자기 본관 2층 총장실로 뛰어올라가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총장실이 점거된지 불과 몇 분만에 페퍼포그를 동원한 무장경찰이 학내로 진입했다. 경찰은 본관 앞(현 국기게양대 앞)에 진을 치고 총장실 점거농성 학생을 곧바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있은지 이틀 후인 11월19일. 제주대학교는 운동권 학생들에 대해 전무후무한 무더기 제명조치를 단행한다. 제명대상은 11월20일, 그러니까 꼭 선거 하루를 남겨놓고 있었던 총학생회장 후보였던 현길호를 비롯해 7명이 포함됐다.

이 제명조치로 학내는 연일 격렬한 시위가 빚어졌고, 많은 학생들은 수업거부 등을 하며 이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월20일 선거에서는 운동권 출신 후보인 현길호가 유치장 구금상태에 있으면서도, 제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옥중당선'된다. 군사독재정권의 서슬퍼런 폭정 속에서도, 제명처분된 운동권 학생의 옥중당선은 제주대 학생운동이 이미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그럼, 왜 무더기 제명사태를 초래한 총장실 점거농성이 발생했을까. 총장실 점거농성은 수일을 두고 계획된 사안이 아니었다.

#단과대학 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 당선되자, '방해공작'

1985년 11월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대중적 정치투쟁을 지향하는 제주대 학생운동권은 학습소그룹인 '언더' 출신이 아닌 박희수를 총학생회장 후보를 추천하고 연대를 통해 총학생회장에 당선시킨다. 이듬해인 1986년 11월에는 연대적 후보추천이 아니라, 학습소그룹의 정통 운동권인 현길호(법학 2)를 정후보로, 강창봉(해양환경 2)을 부후보로 출마시킨다.

이 선거에는 모두 4팀이 경합을 벌였다. 후보가 난립하면서 선거운동도 치열했다. 총학생회장 선거에 처음으로 운동권 후보가 출마하자 학교당국은 물론 경찰과 기관에서는 바싹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총학생회장 선거가 실시되기 보름여 전인 11월6일 실시된 단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서 인문대학에서 운동권 출신후보가 당선되었다.
인문대학에서의 운동권후보 당선은 1985년 김현수에 이어 두번째다. 더욱이 인문대학 선거에서는 운동권인 황인호(국문 2) 문영희(일문 2)는 54.1%(359표)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사회과학대학에서도 1986년 문대림(현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에 이어 1987년도 회장 선거에서도 또다시 운동권 후보인 오용욱이가 당선되었다. 써클연합회도 1986년 김영산에 이어 1987년도 회장 선거에서도 운동권의 김정열이 당선되었다. 11월10일 등록마감된 총여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언더 출신의 송영란(일문 2) 고희권(국교 2)조가 단독출마해 무투표 당선됐다.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 학생회로 대거 진출하면서 학생운동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토대로 급부상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 등 기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운동권학생이 단과학대학 뿐만 아니라 총학생회장까지 당선될 경우 그동안 육지부 대학에 비하여 시위가 그다지 많지 않던 제주에서 반정부시위가 극심해질 우려가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운동권출신으로 단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됐던 모 인사는 "1986년 9-10월에는 시위가 별로 없었다. 학생운동권 진영이 모두 '선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학생운동권 진영이 단과대학과 총여학생회, 써클연합회 선거에서 속속 당선되자 경찰은 당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 선거 일주일 앞두고 후보자와 참모 등 전격 연행

어쨌든 공안당국은 총학생회장에 운동권 학생이 당선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듯 하다. 이른바 운동권학생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방해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공안당국의 '방해공작'이 있었음을 짐작케하는 사건이 바로, 1986년 11월13일 현길호(법학 2) 강창봉(해양환경 2) 김종래(일문 4) 정원태(사학 1)군 등 4명을 전격 연행하는 사건이다.

경찰은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운동권진영의 총학생회장 후보 뿐만 아니라 참모들까지 전격 연행했다.

현길호 강학봉 후보 선거의 총괄적 기획 역할을 맡고 있던 정원태씨(현 제주감협 근무)는 연행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김종래인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 선거를 일주일 정도 남겨놓은 상황에서 현길호 후보 선거홍보물을 찾으러 제주시 옛 방송통신대 부근에 있는 00인쇄소에 갔다. 그 곳에서 선거홍보물을 찾고 인쇄소를 나온 후 학교로 올라가기 위하여 한 10-20m 나가니 두명의 남자가 가로막았다. 언뜻 보기에도 경찰이었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는 홍보물을 가리키며)그게 뭐냐'고 물었다. '너희들이 알아서 뭐할거냐'며 옥신각신했다. 그리고는 바로 뒤돌아서서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다른 길목에 또다른 사복경찰 2명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경찰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날 경찰에 연행된 정원태는 경찰서에서 얼마없어 붙잡혀온 현길호를 볼 수 있었다. 현길호의 진술도 이와 비슷하다.

"유인물을 인쇄소에 맡겼는데, 그 유인물이 유출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유출되었는지, 그 과정은 잘 모르겠으나 아마 경찰이 인쇄소에 사전에 들러 선거방해를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선거 당시 제주시 시민회관 근처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연행되던 그날(11월13일) 사복경찰 두명이 집에 찾아와서는 '확인해볼게 있다'며 연행해갔어요."

#'광주학살' 한 문장 놓고 경찰 연행해 '구류 10일'

선거참모인 정원태와 후보인 현길호가 경찰에 연행된 이유는 '억지 올가미' 성격이 짙었다. 첫날 조사에서 정원태와 현길호 등이 경찰심문에서 주로 받았던 부분은 선거유인물에 적힌 내용 중 '광주학살' 부분이었다. 이 한 문장을 놓고 조사는 밤새도록 계속됐다.

연행된 학생들 대부분 처음에는 별 문제될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현길호로부터 당시 분위기를 들어봤다.
"경찰서에 끌려가서 밤샘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큰 문제는 없었어요. 첫 조사를 마친 후, 혐의사실이 그렇게 무겁지 않아 다음날이면 석방될 듯한 분위기였어요. 조사하는 경찰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였구요.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사건이 대공과로 이첩되었어요. 대공과 조사가 끝난 후 즉결심판에 회부되었고, 즉결심판에서는 바로 구류처분이 이뤄지더라구요. 구류처분으로 유치장살이를 하고 나온다면 선거는 이미 끝나버리는 상황이었어요."

11월15일 열린 제주지법의 즉결심판에서 현길호는 구류 10일, 정원태는 구류 3일을 처분받았다. 11월20일이 총학생회장 선거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현길호는 선거가 끝난 후 3일 후에, 정원태는 선거 2일전에 출소가 가능했다. 사실상 현길호 후보의 정상적 선거는 불가능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명은 유언비어유포혐의다.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언비어 유포'라는 올가미를 씌워 운동권의 총학생회 진출을 가로막은 것이다. 모처럼 조성된 학생운동권의 학생회 대거 진출 기회는 무산될 위기에 있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운동권 학생 명단이 들어있는 노트가 경찰에 의해 압수당하는 일명 '노트사건'으로 운동권진영이 최대 위기에 몰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에따라 운동권진영은 총 비상이 걸렸다. 11월15 혹은 16일쯤일 학습소그룹, 소위 '언더' 진영의 지도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비밀리에 논의를 갖는다. 이 자리에서 17일 총장실 점거계획이 논의됐다. 총장실 점거를 통해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고, 8부능성을 넘은 총학생회장 선거가 수포로 돌아가는 일을 막자는게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또 이들이 총장실 점거를 계획한 것은 경찰 등 공안당국의 운동권학생 학생회 진출 방해책동과 더불어 학교당국도 경찰과 이러한 일을 은밀히 공유했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17일 기습적으로 총장실을 점거해 '연행학생(현길호, 정원태) 석방요구'를 하기로 한 이들은 '디머'(주동자)로 나설 학생으로 지경호(사회 4) 현맹수(사회 4) 유창부(경영 3) 현혜숙(과교 3) 김현실(수교 4 휴학) 황인호(국문 2) 모성룡(무역 3) 등을 결정한다. 종전 각종 시위에서 디머가 2-3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크게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경호-현맹수 등 주동 '총장실 점거계획' 비밀리에 논의

이중 지경호 현맹수는 1986년 들어 제주대 학생운동진영에 있어 최고 선배격으로, '어른' 역할을 하고 있었다. 80학번인 현맹수는 본래 '언더' 출신은 아니었다.

군복무(1982-1984년)를 마치고 1985년 복학한 그는 그해 '사회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한다. 그 속에서 그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되고, 정통 언더출신은 아니지만 사회문제를 진보적으로 접근하며 운동권진영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3학년때 그의 활동은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3학년이었던 어느날, 5월 횃불시위를 주도했던 김계완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저에게 '함께 일해보자'는 권유를 하더라구요. 일이라는게 시내에 가서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는 정도였어요. 그래도 그 당시에는 선뜻 나서기가 그래서 '지금 3학년인데 나서는 것 자체가 좀 그럴 것 같다. 내년 쯤에 해보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 1986년 운동권학생들의 학생회 진출을 막기 위해 노골적인 방해공작을 펼치자, 이를 막기 위해 앞장서 싸웠던 현맹수씨. 그는 헤드라인제주와의 인터뷰에서 "그 때 일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1986년 봄, 4학년 지도부가 구성될 당시 그는 적극적 자세로 학생운동진영에 나선다. 그 첫 결과물이 바로 그해 4월 발족한 '민주헌법쟁취위원회(위원장 김영산)'에 홍순자(영문 4)와 함께 부위원장을 맡아 '디머'로 나서게 된 것이다. 4월8, 9일에 걸친 이틀간의 시위주도 혐의로 그는 경찰에 연행돼 즉결심판에서 구류 10일 처분을 받았고, 또 학교당국으로부터는 유기정학 2주의 학사징계를 받았다.

이러한 전력이 있는 그가 지경호 등과 함께 11월17일 총장실 점거사태의 주동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11월17일 낮쯤, 학내에서 현길호와 정원태 2명의 연행학생을 석방할 것을 촉구하는 집회가 벌어졌다. 본관 앞 광장에서 집회를 하던 중 30-40명쯤 되는 학생들이 순식간에 본관 계단으로 뛰어올라가 2층에 위치한 총장실을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총장실 점거는 주로 3, 4학년 학생들이었으나 1, 2학년 학생들 중에서도 일부 참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학생운동권 진영 분위기에서는 '언더' 조직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점거농성이나 시위주도는 '경찰 연행'을 작정한 고학년 중심으로 이뤄지던게 관례였다. 그러나 이날 총장실 점거농성에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골고루 참여가 이뤄졌다.

나머지 언더조직의 운동권진영은 총장실 점거와 동시에 본관 앞 광장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총장실 점거하자 마자 경찰 학내로 진입...'정보형사 감금설' 나돌아

총장실 점거가 성공적으로 이뤄지자 마자 점거에 들어간 학생들은 책상과 의자 등으로 총장실 문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경찰이 진압할 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총장실 점거 후 1시간도 없어 검은색 페퍼포그를 앞세운 진압경찰이 교문안으로 진입, 총장실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종전에도 학내에서 총장실 혹은 도서관 농성은 간헐적으로 있었으나 이처럼 경찰이 순식간에 진압작전을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경찰의 이같은 신속한 진압작전 돌입에 나서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학교당국의 요청으로 이미 시위진압 준비에 나섰던 경찰이 그대로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것이 그 첫번째 설이다.

두번째는 총장실 점거과정에서 '정보형사의 감금'이 있었다는 와전된 정보가 경찰로 전해지면서 경찰이 이에 발빠르게 대처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당시 총장실 점거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회상한다.
"집회를 하다가 기습적으로 총장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보니, 총장실 집무실과 바로 인접한 왼쪽편(총장실 집무실) 사무실에 정보과 형사 몇명이 있었다. 우리가 기습적으로 들어가니 그들은 깜짝 놀란 듯 문을 잠궈버렸다."

두번째 설의 경우 총장실 옆 사무실에 있다가 문을 잠그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두문불출했던 정보과 형사가 경찰에 자신들이 감금된 것처럼 전달했을 가능성을 두고 나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후자가 신속한 경찰출동의 이유로 꼽는 시각이 많으나, 이러한 상황은 어쨌든 운동권학생의 학생회 진출 방해공작과 연결선상에 있었다.

#경찰 총장실 진입하자, 농성학생들 '비밀문' 통해 빠져나가

본관 앞까지 밀고 들어온 경찰은 곧바로 광장에 있는 시위학생들을 향해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아대며 진압에 나섰다. 최루연기로 시위학생들이 일부 흩어지면서 경찰과의 대치선이 거리를 두게되자, 곧바로 총장실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경찰은 총장실내 경찰투입에 앞서 최루탄을 총장실 바깥 유리창을 향해 쏘았다. 최루탄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총장실 내부는 최루연기로 가득했다. 이어 총장실 진입을 위해 경찰이 바리케이트가 쳐진 철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리케이트를 철거한 후 진입한 경찰은 총장실에서 농성중인 학생 단 한명도 체포할 수가 없었다. 경찰이 진입하기 전에 이미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완전한 포위망에, 구석으로 몰아넣어 쉽게 연행할 것으로 기대했던 던 경찰은 허탈해했다.

경찰이 진입하기 직전, 농성학생들은 총장실내부에 있던 '비밀문'을 찾아내고 그 비밀문을 통해 모두 밖으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비밀문은 본관 남측, 당시 우체국이 있었던 2층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농성학생들이 그 통로를 통해 모두 달아나 버리자, 경찰은 2, 3층 동아리방을 샅샅이 뒤지며 동아리방에 있던 '죄없는' 학생들만 연행해갔다. 그 수가 수십명이 넘었다(공식 연행자수 33명).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경찰이 총장실 앞 광장에서 야외음악당 방면의 학생들과 대치해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명 '꽃병'이라 불리우는 화염병이 등장했다.

야외음악당과 4동(현 교양동) 쪽에서 총장실 쪽 진압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투석전을 벌이고 있을 당시, 갑자기 총장실에서 불꽃을 담은 병 한 개가 날아오는 것이었다. 순간 밖에서 투석전을 벌이던 학생들은 탄성과 함께 그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봤다. 그 화염병은 콜라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폭파되지 않고 떼르르 구르다 말았지만 운동권 학생들조차 당시에는 화염병을 구경할 수 없었기에 이 장면은 내내 기억에 남아 후일담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 총장실 점거사태에 연루돼 학교당국으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은 황인호씨(국교 2, 당시 인문대학 학생회장선거 당선자, 현 북경외국어학원 원장)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아마도 경찰은 총장실 옆 사무실에 있었던 정보형사들이 감금된 것으로 생각하고 학교안으로 재빨리 들어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총장실 내부에 있었던 농성학생들은 경찰이 진압작전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는 곧 모두 연행될 것으로 생각하고, 사생결단식 버티기를 하자는 식의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성학생 중 한명이 총장실내 책꽂이 뒤에 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 문을 열어보니 우체국 방향으로 향해 있었는데, 그 문을 통해 모두 무사히 빠져 나왔던 거죠."

현맹수씨도 이 부분에 대해 비슷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현길호와 선거참모인 정원태가 경찰에 붙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총장실 점거) 하루전인가, 아니면 이틀전 밤에 모두 모여서 총장실 점거계획을 논의했어요. 현길호를 석방하라는게 가장 큰 이유였고, 어용총장을 몰아내자는 이유도 있었죠. 총장실에서 모두 붙잡혀가자는 각오로 있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그 '비밀문'을 발견하게 된 거에요."

그날 밤, 이 사건의 주동자급들은 2-3명씩 짝을 이뤄 모두 대학을 빠져나갔다. 일단 다음 시위때까지 몸을 피신하자는 생각이었다.

#학교당국 긴급 학.처장 회의 열고 7명 '제명 처분'

총장실 점거사태의 주동자격인 지경호와 현맹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저녁시간을 이용해 대학 뒷편 숲을 통해 제주산업정보대학 쪽으로 빠져나갈 요령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는 불심검문에 걸릴 위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했던 대로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이미 이들이 걸어서 도망칠 것을 예견했던 경찰들이 제주산업정보대학 방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지경호와 현맹수는 방향을 바꿔 제주시 봉개동쪽으로 걸어갔다. 늦은 밤, 무작정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예비군들로부터 불심검문을 받았다.
"한참 걸어가는데, 아마 밤 11시쯤 되었을 거에요. 군복 입은 사람들이 보이더라구요. 처음에는 경찰인줄 알았어요. 자세히 보니 예비군들이었어요. 그 예비군들이 저희에게 묻더군요. '이 밤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느냐'고. 우리는 적당한 핑계거리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오다가 깜빡 잠이 들어서 종점까지 왔다가 걸어서 가는 중이라고 둘러댔죠."

시내에 무사히 도착한 이들은 총학생회장 선거 하루전날인 19일자로 제명처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제주대학교는 19일 긴급 학.처장회의를 열고 최근 총장실 점거 등에 관련된 학생 7명을 제명처분했다.

▲제명처분 학생 = 지경호(사회 4) 현맹수(사회 4) 유창부(경영 3) 현혜숙(과교 3) 김현실(수교 4 휴학) 황인호(국문 2) 현길호(법 2)
▲경찰 지명수배(제대신문 보도기사) = 지경호(사회 4) 현맹수(사회 4) 유창부(경영 3) 모성룡(무역 3) 현혜숙(과교 3) 황인호(국문 2)

#'유언비어 날포' 등이 제명처분 사유...개교 이래 가장 치욕스런 일로 꼽혀

제주대는 학칙51조 1항4호 및 학생징계기준 11항을 들며, 현맹수와 지경호, 황인호, 유창부에 대해서는 '총장실 점거난동'혐의로 제명처분했다.
김현실과 현혜숙은 시위주동혐의로 제명처분됐고, 현길호는 유언비어 날조유포혐의를 적용햇다.

총장실 점거사태 연루자 뿐만 아니라, 총학생회장 후보인 현길호까지 제명처분을 시켜버린 것이다. 이는 다분히 총장실 점거사태에 대한 책임 차원이 아니라 학생운동권의 학생회 진출차단을 위한 성격이 짙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무더기 제명조치'는 제주대학교 개교이래 가장 치욕적인 일로 꼽힌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이 군사독재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하며 무고한 학생들을 대학에서 쫓아낸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제주신문 1986년 11월20일자 7면>
시위관련 학생 7명 제명처분
제주대학교는 19일 긴급 학.처장회의를 열고 최근 총장실 점거 등에 관련된 학생 7명을 제명처분했다.
제주대가 학칙51조 1항4호 및 학생징계기준 11항에 따라 제명된 학생은 현맹수(사회학과 4년) 지경호(사회학과 4년) 황인호(국문학과 2년) 유창부(경영학과 3년. 이상 총장실 점거난동)군과 김현실(수학교육과 3년휴학) 현혜숙(과학교육과 3년. 이상 시위주동)양, 현길호 군(법학과 2년. 유언비어 날조유포) 등 7명이다.
<제주신문 1986년 11월20일자 7면>

제주대생 또 시위
제주대학생 1백50여명(경찰집계)이 19일 하오 1시30분께부터 총학생회장선거 유세를 마치고 '학원자율보장하라' '학생제명처분 취소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 진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진압으로 하오 5시30분께 자진해산했다.
경찰은 이날 시위에서 적극 가담한 학생 1명을 연행했다.
한편 경찰은 지난 17일 제주대 총장실 점거사건과 관련학생 32명 등 연행학생 33명 중 24명을 무혐의 또는 훈방으로 귀가조치했고, 9명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를 펴는가 하면 시위를 주동한 6명을 수배하고 있다.
<제주신문 1986년 11월20일 7면>

▲ <제대신문 1986년 11월29일자>
총학생회장 보궐선거여부 논란
지난 20일 선거결과 제명된 현길호 군 총학생회장에 당선

87학년도 총.부학생회장 선거가 지난20일 실시된 결과 기호1번 현길호(법 2) 강창봉(해양환경 2)조가 당선됐다. 각 단대별로 설치된 투표소에서 일제히 실시된 이번 선거는 저녁 9시 야간강좌부 투표를 마지막으로 끝내고 10시부터는 총대의원회 사무실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김계환. 체교 3)의 개표개시에 따라 개표가 시작됐다.
이번 선거는 총유권자 6200명 중 3745명이 참가해 유효표는 3691표인데 전체투표율은 60.4%로 지난해 65.69%보다 다소 저조한 투표율을 나타냈다. 단대별 투표율은 인문대 60.7%, 사과대 53.1%, 사범대 64.6%, 농대 68.2%, 해양대 67.3%, 이공대 66.4%, 야간강좌부 38.9%이다.
3691표의 유효표 중 후보자별 득표수와 득표율을 보면 기호1번 현길호(법 2) 강창봉(해양환경 2) 천575표(42.7%), 기호2번 강창현(사교 2) 김현철(국윤교 2)조 948표(25.7%), 기호3번 정창훈(상교 2) 김권진(정보공 2)조 8백24표(22.4%), 기호4번 양시경(사회 2) 한재순(일문 2)조 340표(9.2%)이다.
한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19일자로 제명처분당한 현길호 후보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됨에 따라 이에 대해 별다른 상황변동이 없을 시에는 총학생회장의 임기가 시작되는 87년 3월1일이후 15일 이내에 총학생회장 보궐선거를 실시키로 하였다.
여학생 정.부회장은 지난 10일 입후보등록을 마감한 결과 송영란(일문 2) 고희권(국교 2)조가 단독출마해 무투표 당선됐다. 한편, 단대별 정.부회장 선거도 지난 6일 사과대.해양대를 제외한 단대에서 실시됐다.
각 단대별 입후보자 득표율은 다음과 같다.
△인문대=황인호(국문 2) 문영희(일문 2)조 54.1%(359표) △사범대=조용일(영교 2) 홍경호(수교 2)조 34.5%(3백82표) △농과대=김문화(농화학 2) 강성종(농화학 2)조 33%(1백92표) △이공대=이용철(식공 2) 김창부(생물 2)조 39.1%(3백9표)
<제대신문 1986년 11월29일>

▲ <제대신문 1986년 11월29일자>
4차에 걸쳐 비상학생총회 열려
-7명 '제명' 철회요구, 지경호군 등 단식농성 중 연행돼

지난 17일 총장실 점거사건과 선거유인물 제작혐의로 본교생 7명에 대해 19일 제명처분과 함께 경찰의 지명수배(6명)가 18일 내려졌다.
제명처분을 당한 학생은 지경호(사회 4) 현맹수(사회 4) 유창부(경영 3) 현혜숙(과교 3) 김현실(수교 4 휴학) 황인호(국문 2) 현길호(법 2)이고 지명수배를 당한 학생은 지경호(사회 4) 현맹수(사회 4) 유창부(경영 3) 모성룡(무역 3) 현혜숙(과교 3) 황인호(국문 2) 등이다.
또한 17일 총장실 점거와 이의 진압과정에서 33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돼 19일 모두 풀려났고 19일 교내시위에 이어 20.21.24.26일 4차의 비상학생총회와 함께 21일부터는 '제명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전 학과가 수업거부를 결의했는데 24일부터 일부 학과에서 수업을 시작해 26일부터 거의 정상화가 됐다.
한편 경찰에 지명수배중이던 지경호.현맹수군은 24일 본관 2층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던 중 경찰에 연행됐다.
27일에는 제주대학교 장기집권음모분쇄투쟁위원회(위원장 고창후 법 4) 발대식에 이어 2백여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해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자진 해산했다.
한편 본교생 현길호(법학 2) 강창봉(해양환경 2) 김종래(일문 4) 정원태(사학 1)군등 4명이 총.부학생회장선거에 관련된 유인물을 제작하다 13일 경찰에 연행됐다.
이중 현길호.정원태군은 유언비어유포혐의로 각각 구류 10일과 3일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9월에는 '애국도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제작, 시내에 배포한 고창후(법학 4) 변동하(사회 4)군과 이상희(국문 4)양등 3명이 유언비어제작살포죄로 각각 구류 10일과 5일을 선고받았다.
<제대신문 1986년 11월29일자>

선거 하루전날 벌어진 이 무더기 제명사태는 학교당국과 경찰의 예상과는 달리, 학생운동권 진영은 물론이고 일반학생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촉발제로 작용한다.

제명처분이 내려지자 마자 많은 학생들이 비상학생총회 등을 하며 수업거부에 나서거나, 억울하게 붙잡혀간 현길호 후보를 지지하기 시작한다. 학생회관 한 모퉁이에는 '현길호 후보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글이 나붙기도 했다.

#방해공작 속에서도 제명처분된 현길호 후보 당선

그러나 결국 4팀이 경합해 치러진 11월20일 선거결과는 그 시각까지 유치장에서 살고 있던 현길호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말 그대로 '옥중당선'이었다. 개표결과 현길호 후보는 42.7%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당선확정 공고는 이뤄지지 않았다. 19일자로 제명처분받았기 때문에 당선공고를 하지 않고, 이듬해 재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됐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현길호 후보가 무난하게 당선된 것은 경찰과 학교당국의 노골적인 방해공작이 오히려 표를 결집시켰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길호 선거참모를 맡았던 정원태씨의 얘기다.
"선거홍보물을 찾아 나오다 경찰에 잡혀가 구류를 살다가 선거 이틀전쯤에 나왔는데, 사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선거캠프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도 별로 없었고, 총장실 점거사태 후유증으로 다들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경찰과 학교당국이 총장실 점거사태를 무리하게 강제진압하기 위해 경찰을 학내로 투입시키면서 엉뚱한 학생들을 연행해가고, 19일 무더기 제명처분, 그것도 구류를 살고 있는 후보자까지 제명처분한 것이 오히려 일반학생들의 감정을 자극시켰고, 이는 운동권진영 후보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현길호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했다.
"즉결심판에서 구류 10일 처분을 받았다. 유치장에서 선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유치장에서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더니 하루전날에는 내가 제명처분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그것도 많은 선배분들과 함께. 나 때문에 총장실 점거가 이뤄진 것이어서 학교당국의 처사에 납득이 안갔다. 일이 갑자기 그렇게 커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선거결과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제명처분이 먼저 이뤄졌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당국의 비이성적 행태, 그리고 경찰의 노골적인 학생운동 탄압은 일반 학생대중을 오히려 친 학생운동진영으로 합류시키는 역결과를 초래했고,  학생운동진영은 오히려 학생대중들로부터 강한 신임을 얻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11월20일 현길호의 '옥중당선' 이후 계속된 대규모 수업거부사태와 수천명의 학생들이 '무더기 제명사태'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던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또 이듬해인 1987년 3월 재선거에서 현길호와 같은 정통 학생운동권 출신인 송형관(현 CBS 기자)을 당선시키고, 수많은 학생들을 결집시키며 1987년 6월항쟁의 거리로 나서게 만든 것은 바로 '무더기 제명사태'와 '옥중당선'이라는 사건과 깊게 줄기를 같이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더기 제명사태 관련자, 그 이후는...>

지경호와 현맹수는 제명조치와 함께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은 후 제주시내에 피신해 있다가 11월24일 제주대 본관 2층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간다. 그들은 단식농성에서 '제명조치 철회'와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다, 그날 저녁 경찰에 의해 연행된다.

경찰에 연행된 이들은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와 방화예비혐의(현맹수씨는 이 부분과 관련해, 총장실 점거농성시 방화하려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경찰이 올가미를 씌웠다고 주장했다.)로 구속기소된다.

구속되어 제주교도소로 송치된 이들은 1987년 2월 대학졸업식이 끝난 다음에야 선고공판이 이뤄져 징역형(집행유예)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현맹수씨는 석방된 후, 1987년 하반기 제명학생에 대한 복학조치로 대학에 복학한 후, 1988년 2월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곧바로 고향인 서귀포시 신효동에 내려와 농사일을 시작했다.

   
 
  ▲ 현맹수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다, 잠시 회상에 잠겼다.  
 

"처음에 농사를 짓기로 하고 고향에 온 것은,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농민운동'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어요. 그렇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더라구요. 막상 이곳에 오니까, 제가 감방갔다 온 사실을 안 동네 어른들 시선도 곱지 않고, 이런저런 감시도 있고, 그래서 이곳에서 농민회 결성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살다보니 지금까지 농사일만 하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는 "지금도 (그때 일을)후회는 안한다. 가족들에게도 당당히 말한다. 그 당시에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며 지금 농사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수난을 겪었던 지경호씨는 현재 안덕면에서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옥중당선'의 주인공인 현길호씨(42, 전 청와대 행정관)는 제명조치가 이뤄진 이듬해 3월, 시위를 주도한다.

▲ 1986년 11월 총학생회장 선거 일주일여를 앞두고 경찰에 연행돼 구류처분을 받았던 현길호씨. 그는 그해 선거에서 학교당국과 경찰의 '방해공작'에도 옥중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특위를 하나 띄워서 시위를 벌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1987년 3월 본관 앞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독재타도'를 외치며 한번의 시위를 주도한 그는, 그 시위가 끝나자 마자 군에 입대한다(보충역). 총장실 점거사태 때 제명처분 받으면서 학생신분이 사라져 입대영장이 나온 것이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직장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가 2001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 캠프에 합류하면서 정당활동을 시작한다.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후보경선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2005년 4월부터 2007년 3월까지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했다. 현재에는 서울에서 '참평포럼'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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