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관찰할 수 있어야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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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관찰할 수 있어야 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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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생산하기만 하면 팔렸던 감귤도 노지재배 감귤을 필두로 하우스에서 재배된 만감류도 서서히 경쟁력을 잃어가는 것 같다. 농업인들이 주장하듯이 경륜이 오래되었으면 더욱 감귤산업이 잘 되어야 할 터인데도 그 원인을 모른 채 유관기관이나 농업인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하면 미래 성장 동력으로 이어질 것 같아 1조원이라는 막대한 지원이 되었음에도 그 결과는 기대치에 크게 빗나가고 있다. 그것은 경륜을 바탕으로 제주감귤산업의 미래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시대에 걸맞게 영농활동을 통해 체득과정에 의해 몸소 익혀가는 과정이 쌓여 정점에 이르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새로운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숙련되었어야 경륜이 쌓였다 할 것이다.

단지 영농에 종사한 햇수로 경력이나 경륜이 붙어 다고 말하기에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스스로 경력이나 경륜에 의해 체득화가 지식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밟을 적에는 불필요한 경험을 통제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데도, 이에 대한 교양프로그램이나 수양과정이 없이 수입된 지식의 연찬장에서 배운 정보가 마치 지식인양 착각하여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온 게 큰 원인이 된 것이다. 보편적인 지식과 영농현장에서 펼쳐지는 지식은 차이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영농행위를 하여 그 결과에 대해 평가하고, 반성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문제점 해결을 위해 전문상담을 하거나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찾아낸 것이 참지식인 것이다.

참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보고 싶거나 봐야하는 감귤세계를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전체를 볼 수 있어야만 감귤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유동성의 전체성을 알 수가 있다. 온주밀감을 재배했던 당시의 감귤세계와 새로운 품종이 도입되고, 하우스 재배,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서 감귤세계는 크게 변하였다. 온주밀감을 재배하던 당시의 안목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새로워진 감귤세계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과거에 익힌 기술로 미래 감귤을 재배할 수 있다고 설명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현재 감귤생산 현장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고, 이와 같은 .현상이 자연적인 현상인지, 영농행위의 결과에 의한 현상인지를 관찰에 의해 인식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 지식으로 축적될 수 있어야 다음으로 나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 감귤세계는 그 자리에 멈춰버린다.

일례를 들어 설명하자면. 서귀포 앞 바다에는 섭섬, 문섬, 범섬이 있다. 관광객들이나 지나는 사람들이 그 섬들을 본다고는 하지만 진짜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대개는 이미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토대로 해서 판단해 버리고 만다. 시선을 그 섬에 직접 접촉시키거나 붙이지 못하고 중간에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래서 보는 일은 인간으로서 상당한 내공이 있어야 가능하다. 본다고 하려면 개방된 인격을 가지고 대상에 대하여 전면적이고 성실한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접촉한 다음에는 오랫동안 시선을 거기에 머무르게 한다. 관찰하고 관찰하면 어느 순간 보는 사람이나 보이는 대상이 구태를 벗어나고, 허물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전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대상을 통하여 내가 새로워지고, 대상 또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존재성을 보여준다. 이 신기한 절차와 결과가 문자를 매개로 정련되어 남겨지면, 우리는 그것을 시詩라고 부른다. 그래서 시인은 원초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보는 사람 한민목은 섬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섬」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2012). 기존의 이해를 판단하면 울타리는 높은 것이고 길을 막는 것이다. 그렇다고 판단하여 시선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섬에 직접 접촉시켜 머물게 한 시인의 노고를 통하여 우리는 가장 낮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길이 되어 버리는 울타리를 두른 새로운 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보는 사람은 이전에 존재해 본적이 없는 진실을 우리 앞에 턱 하니 선물했다. 새로운 섬이 등장한 것이다. 없던 진실을 알게 만드는 일, 이것이 바로 창조다. 창조는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집요한 보기를 통해서 열리는 새로운 빛이다. 시인이 인간 가운데 지배자의 위치를 점하는 이유이다. 지배자는 빌려 쓰거나 따라하지 않는다. 지배자는 창조의 힘으로 압도한다. 정치가 되었건, 학문이 되었건, 산업이 되었건 새로워진 일을 감행하려면 우선 보아야 한다.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는 구태의연한 의식으로 채워진 자신이 허물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을 어느 부류의 수양론에서는 허심虛心이라고도 하고, 무심無心이라고도한다.

그래서 새로운 일은 결국 새로워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새로워진 사람은 볼 수가 있고, 볼 수 있으면 새로워진다. 보는 능력이 없이도 지배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 감귤세계를 내다보는 안목에서 말한다면 기존 교육프로그램을 멀리하고, 알고 있는 지식이 내가 터득한 것이 아니면 버려야하며, 내 나름대로의 수양과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농업인 스스로 전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일률적으로 전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품종마다 착화습성이 어떻게 다른지, 생육상은 어떻게 다른지, 온도, 수분관리 등에 맞춰 해야 할 일들이 매우 많아지고 있음에도 과거와 크게 달라지고 있지 못하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현재를 밀고 나아가 아직은 분명한 모습으로 정해지지 않은 어떤 곳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런대 다가올 미래는 미래의 문법으로 따져야 하겠지만 미래의 문법은 아직 충분히 숙성되지 않아서 미래를 보는 일마저도 현재의 문법으로 계산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숙성된 미래의 문법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때, 누군가는 비문법적 행동으로 새로운 곳을 향하여 건너뛰려 덤빈다. 이것을 보통은 무모함이라고 말하고 모험이라고도 말한다. 무모함이나 모험은 분명히 미래를 향한 행위들이다. 이러한 무모한 실천과 행동이 없이 그저 눈대중이나 계산속으로 나온 판단에만 의존해서 이 궁리 저 궁리에 빠져있거나 갑론을박하는 논쟁에만 빠져 있으면 현재의 감귤산업은 어찌되겠는가. 급격히 무너질 따름이다.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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