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당시 학살 당한 일가족, 훼손된 유해 마을 주민이 수습해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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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당시 학살 당한 일가족, 훼손된 유해 마을 주민이 수습해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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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 제보한 강군섭 할아버지 "당시 시신 훼손돼 버려졌을 것"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과 관련한 제보자인 강군섭 할아버지가 31일 자신이 전해들은 4.3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제주4.3 희생자 유해 3구가 발견과 관련한 제보자인 강군섭 할아버지가 31일 자신이 전해들은 4.3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오랜 세월 차디찬 땅 속에 묻혀 있던 억울한 죽음의 희생자 유해 3구가 73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가운데, 유해의 위치를 결정적으로 제보한 강군섭 할아버지(79)는 당시 시신이 훼손된 뒤 방치된 것을 마을 주민이 수습해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강 할아버지는 31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속칭 '우구리동산'에서 진행된 4.3유해 발굴 보고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유해의 위치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이날 현장 설명에서 이 유해들은 일가족 7명이 학살당한 이 마을 출신 강원길(당시 48세)과, 다른 가족인 김계화 여인(당시 32세)과 그 아들 강홍구(당시 11세)로 추정되고 있다.  

강 할아버지는 자신이 어렸을 적 아버지로부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고, 이후 군 복무를 하다 전역한 뒤인 1973년쯤, 다른 친족으로부터 유해의 존재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강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제 형에게 돌아가신 분들 제사를 지내라고 했는데, 형이 반발해서 옆에 있던 저에게 지내라고 했다"며 "이후 31살때 전역해 고향에 돌아오니 다른 친족으로부터 유해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발굴된 시신은 3구 모두 두개골이었는데, 강 할아버지는 이들이 다른 곳에서 살해된 뒤 시신이 훼손된 상태로 암매장지에서 방치됐고, 이후 마을 주민이 시신의 머리를 발견하자 이 곳으로 옮겨 매장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 이유로 유해가 매장돼 있는 위치를 들었을때 신원까지 들은 것은, 유해가 매장될 당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봤다.

강 할아버지는 "이 근방에 토굴이 있었는데, 희생자들은 토굴 근방에 묻혔을 것"이라며 "그런데 이 곳에서 두개골만 발견된 것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유해의)얼굴이 식별이 가능했을때, (동네 사람들이)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매장을 했을 것이고, (이곳에 매장된 분들이)누구라고 (신원을)친족에게 말해줬을 것"이라며 "그런 것으로 봐서, 희생됐을 당시 시신이 인위적으로 훼손됐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강 할아버지는 "4.3평화재단과 제주도가 열정적으로 유해발굴해 주시는데 감사드린다"면서 "나머지 유해도 어서 발굴되기를 바란다"고 전햇다.

한편 4‧3위원회의 희생자 신고자료와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등을 종합하면, 강원길은 가시리 폭남동 주민으로, 당시 부인인 고열평(당시 47세), 딸 강대열(당시 12세, 이명 강순열), 아들 강봉일(7), 딸 강태일(5)와 둘째 부인 오차여(당시 46세) 등 일가족 7명이 모두 몰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희생자 김계화 여인은 강태춘(당시 33세)의 부인으로 아들 강홍구와 함께 이번에 발굴된 유해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살 된 갓 난 아들 강홍주도 죽임을 당했다. 그날 남편 강태춘도 총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지만, 얼마 뒤 사망했다. 다만 딸 강순자(당시 10세), 아들 강홍권(당시 6세)은 할머니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죽음을 모면했다. 

발굴조사단은 유해 4구가 묻혀 있다는 제보자의 주장을 감안, 아직 찾지 못한 유해 1구 발굴작업은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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