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감자, 고구마 재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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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감자, 고구마 재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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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36) 재배작물 도입의 역사

서류(root and tuber crops, 薯類)는 감자나 고구마 등의 작물로서 덩이줄기나 덩이뿌리를 이용하는 작물을 말한다. 대표적인 서류인 감자와 고구마는 제주인에 있어 척박란 제주토양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긴요한 작물이었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서류 재배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주변의 고원지대로 알려져 있다. 5세기 경 부터 잉카족이 주식으로 사용되고 페루를 중심으로 한 인디언들이 감자를 먹고 살았다고 전한다. 1492년, 컬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안데스산맥 중심의 페루, 칠레 등 남미에서만 자라던 감자는 1560년경부터 스페인과 영국, 이탈리아, 독일 등의 유럽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며 식량자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감자는 17세기 아일랜드 대기근과 전쟁을 치루면서 감자가 식량으로 영양이 풍부하고 아주 유용한 좋은 음식물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감자는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면서 중요한 식량작물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감자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19세기 1824~25년경에 청나라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한다. 청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직접적으로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청 사람들이 조선에 인삼을 도둑질하러 넘어왔을 때 먹고 버티려고 감자를 심었던 게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도입되어 감자는 한반도 북방 지역과 강원도 산간까지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한반도 남부까지 전해지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이미 17세기에 일본에서 들여온 고구마가 남부 지방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어서 감자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반대로 북부지방에 감자가 빠르게 전파된 이유도 고구마는 추위에 약해서 추운 북부지역에 별로 전파되지 못한 대신 감자가 빠르게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어 제주에는 1800년대 후반대에나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계에 의하면 1950~60년대의 제주의 감자재배 면적은 200~300ha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급격히 증가하여 1990년 말 재배면적이 6,000ha를 상회하여 전국 재배면적의 30%의 수준이고 생산액은 1,000억원에 이르는 중요한 소득 작목이 되었다.

감자하면 강원도였으나 이 시기에는 제주감자 재배면적이 강원도 보다 많았다. 또한 가을재배 월동 후 출하로 햇감자의 이미지로 가격이 상승하여 제주 감자 재배의 호황기였으나 2005년을 기점으로 계속적인 연작재배로 인한 병 발생 및 상품율 하락과 월동 채소의 급격한 재배면적 증가로 2014년 재배 면적이 1,833ha로 감소 하였다.

제주의 감자재배는 1966년부터 가을감자 원원종을 생산 공급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1970년에 남작품종에서 일본에서 도입 된 대지마품종이 주 품종이 되었고 그 후 1990년대까지 감자 재배면적은 계속 증가하였다.

재배작형도 봄감자, 가을감자, 겨울감자, 고랭지 여름 감자 등 4가지 재배형으로 발전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감자재배 면적이 급속히 증가하여 재배면적 5,438ha에 씨감자 소요량은 10,876M/T가 필요하였지만 제주지역 자체 종자생산 보급은 가을감자보급종의 4%, 정부 보급종 소요량의 12%에 불과하여 종서해결이 시급하였다. 제주지역에 씨감자 자급을 위해 1995년 도농업기술원에서는 감자기술센터를 설치하여 양액재배에 의한 미니씨감자 생산을 시작하였다. 감자기술센터는 지금의 농산물원종장의 모태가 되었다.

2000년대 미니 씨감자 생산(왼쪽)과 1970년대 절간 고구마 건조 모습 .
2000년대 미니 씨감자 생산(왼쪽)과 1970년대 절간 고구마 건조 모습 .

고구마의 원산지는 재배역사가 오래되고 근연식물의 분포가 많은 중앙아메리카로서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와 남미 베네주엘라에 위치한 오리노코강 하구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적어도 2000년이상 인간에 의해 고구마가 이용되었다.

1605년경에는 푸젠성으로부터 류우쿠우(琉球)와 대만에, 류우쿠우로부터 일본 본토에 전달되었으며, 1723년에 일본 본토로부터 쓰시마섬(對馬島)에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처음 들어온 것은 조선시대인 영조39년(1763년) 10월로 그 당시 일본에 통신정사로 갔던 조엄이 쓰시마섬에서 고구마를 보고 이것이 구황작물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씨고구마를 구하여 부산진으로 보내온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조엄은 귀국 길에 다시 씨고구마를 구해서 동래지방 및 제주도에 심도록하였다.

고구마의 국내전파에는 이광려, 강계현 등이 서울지방에 고구마를 보급하려고 애썼으나 씨고구마의 보관방법을 몰라서 실패하였고, 동래부사로 있던 강필리는 동래부사 재임중 고구마의 채종 및 전파에 많은 힘을 썼으며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라는 책까지 남겼으나 (영조42년 : 1766)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50년 후인 순조13년(1813년)에는 김장순, 선종한 두 사람이 고구마 보급에 많은 노력을 하였고, 9년간의 재배경험을 기초로 감저신보(甘藷新譜)라는 책을 썼으며 다시 순조34년(1834년) 전라관찰사인 서유구는 종저보(種藷譜)를 지어 호남지방에 고구마 재배를 권장하였다.

고구마의 어원은 쓰시마섬(대마도)의 고꼬이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며, 남방에서 도입되었기 때문에 남저(南藷)라고도 한다. 제주도에 고구마 도입은 1795년 제주목사 윤시동이 부임하면서 조엄과 강필리의 도움을 받아 도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고구마(감져)는 제주인들의 주식이었으며 생활경제의 밑천이었다. 당시 제주지역의 마을들은 반농 반어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으며 농업은 봄에 보리와 가을에 고구마가 주 재배 작물이었다.

제주도의 고구마 재배는 공업용, 식용, 사료용 등 그 이용도가 광범위 하였다. 고구마 재배는 보리 뒷그루에 고구마를 심으면 10월에 수확을 하게 되는데 집 옆에 1.5m정도 구덩이를 파서 짚을 깔고 ‘감져눌’을 만들어 고구마를 보관하였다. 이 ‘감져눌’은 땅 밑온도 변화가 적어 2월까지도 보관이 가능하였으며 ‘감져눌’에 보관한 고구마는 쌀이 없는 제주민들의 겨울 식량이 되었던 것이다.

제주에서 고구마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이후이다. 구황작물은 물론 전분의 원료로서 술과 알코올 제조에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재배면적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인 제주도사는 고구마를 구황작물 또는 적지작물로 정하여 재배를 확대시켰으며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육지 경인지방 및 대도시까지 공급되었다.

1943년 일제가 제주에 주정공장을 세운 후 고구마는 절간 고구마(일명 빼떼기)로도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식량작물 또는 구황작물로서 당시 제주인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전분원료와 주정원료 등 공업원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농가의 주요 소득원을 하는 중요한 경제작물이 되었다.

1960년대 들어오면서 정부는 주정원료로 수입하던 당밀을 고구마로 대체하는 정책으로 바꾸면서 산지개간사업을 전면적으로 실시함에 따라 고구마 재배면적은 1960년에 4~5천ha에서 1965년도에는 15천ha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965년을 고비로 재배면적은 해마다 감소하여 1980년에는 10천ha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10a당 전국 평균 수량도 1945년에 680kg이던 것이 1980년에는 2,005kg로 증가하였다

고구마 재배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로 이 시기 고구마는 제주경제를 좌우하는 작물로서 주요 소득 작물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고구마 전분을 이용하여 생산하던 당면과 주정원료가 값싼 수입 산으로 대체되고 감귤이 새로운 소득 작물로 떠오르면서 고구마 재배면적은 점점 감소하게 되었다.

한 때 고구마 재배면적은 15,000ha에 이르기도 하였으며 1990년에는 3,783ha로 감소되었다가 2010년 이후에는 100ha 내외로 줄어들었으며 가공용보다는 식용으로 재배하고 있다.

최근 들면서 제주의 향토자원을 활용한 고부가 신성장 식품산업 필요성 대두되었고 전분공장 설립과 더불어 제주 서부지역 감자 주산지 연작 장해로 고구마 재배면적 증가함에 따라 용도에 맞는 고구마 품종 선발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식용, 가공용을 구분하여 식용은 식미에 있어서 좋은 품종, 가공용은 전분수율이 높은 품종을 육성하는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참고자료: 남인희(1985), <제주농업의 백년>; 제주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2016), <제주농촌진흥 60년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특별자치도청(2019), <농축산식품현황>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원 등을 두루 거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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