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그 선사인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종족인가에 관하여는 많은 주장이 있다. 제주도의 원주족과 관련한 논란은 많으나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 유적은 애월읍 어음리에 있는 어음동굴 유적이다. 1973년에 처음 발견된 이 동굴에서 수집된 유물을 보면 황곰과 붉은 사슴, 노루, 그밖의 동물뼈 화석과 현무암제의 인공박편, 골각기, 목탄 등 50여 점에 달한다. 이 가운데 황곰의 경우는 거의 완전에 가까운 골체 화석이었으며, 그밖에 사슴 등 동물뼈의 화석 가운데는 석기를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어 선사인이 먹고 버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유적의 편년을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구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6~7만 년 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동굴 지표용암 사이에서 나온 골각기와 석기 조각이 구석기 중기 문화인인 무스테리안의 전형적인 양식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동굴 유적의 발견으로 제주도에도 구석기인이 살았던 사실이 증명되었으나 이때는 제주도가 섬이 되기 이전의 일로, 특히 황곰이 살았던 사실은 제주도가 후빙기 이전에는 대륙과 연륙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서귀포 바위그늘 유적 등 구석기 유적이 몇 기 더 발견되고 있어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제주에는 선사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때 살았던 구석기인을 제주인의 조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뒤에도 제주도에서는 화산 활동이 계속되었으며, 그럴 때에는 섬이 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이동이나 피난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제주인의 조상이 될 수 있는 선주민은 신석기인 이후로 찾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때는 제주도가 섬이 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집단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이동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인류의 이동이나 역사의 징후 등으로 보아 제주도에서도 몇 차례의 이동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제주도가 언제 섬이 되는가부터 보기로 하자. 대체로 그 시기는 제4기 홍적세의 빙하 시대가 끝나고 충적세로 접어드는 시기로 보고 있다.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으로 추정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 빙하가 녹으면서 동북아시아에서도 해수면이 약 130m 이상 상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붙어 있던 제주도가 섬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는 또 구석기 시대가 끝나고 신석기 시대가 열릴 무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제주도에서는 제주 고산리 유적이 형성되고 있을 무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산리에 거주했던 신석기 집단은 섬이 된 뒤에도 계속 눌러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 고산리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87년이었는데, 그뒤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형석기 5천여 점, 융기문토기·고산리식 민무늬 토기 등 1천여 점, 석촉·찌르개·긁개·홈날·뚜르개·세석기 등 총 10만여 점에 이르는 출토물을 수집했다. 그 유물 본포 범위만 보아도 15만㎡에 이르는 것으로, 매우 큰 집단이 거주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신석기 시대 이후의 유적은 제주 고산리 유적 외에도 제주도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제주시 관내에서만 보아도 용담동 유적을 위시하여 삼양동 유적, 외도동 유적, 오라동 유적, 도남동 유적 등 많은 유적이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유적은 대체로 BC 7,000년경부터 BC 1세기에 이르는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에 걸친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유적의 발견으로 보아 제주도에는 제주시를 중심으로 제주도 전역에 걸쳐 선사인들이 거주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집단 유적 상태를 보면 신석기 시대에는 소수 집단이 흩어져 거주하던 것이 청동기 시대 이후로 오면 대거 집단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농목 문화가 발달하면서 집단 생활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선사인들은 어떤 문화의 전파로를 타고 제주도에 들어온 어떤 종족일까? 여기에 대한 학자 간의 의견 차이는 크다.
제주의 성씨인 고씨·부씨·양씨 3씨(三氏) 성을 제외하면 모두 다른 지역에서 들어와 정착한 성씨들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제주에 들어와 정착했든 그 후손들은 제주에 최초로 정착한 선조를 입도조라 칭하였다. 입도조란 바로 수령이 파견되던 섬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도 외에도 진도나 완도 등에도 입도조가 존재한다.
제주의 토착성 씨인 고씨·부씨·양씨를 제외하면, 제주의 성씨는 모두 다른 지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이들이 어떠한 이유로 제주에 들어와 정착했든, 그 후손들은 제주에 최초로 정착한 선조를 입도조라 칭하였다. 제주 입도조 가운데는 유배된 사람들이 많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조선 개국에 반대했던 두문동 72인 가운데 제주도에 유배된 한천(韓천)은 가시리, 김만희(金萬希)는 곽지리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후일 각각 청주 한씨,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의 입도조가 된다. 이를 전후해 이미(李美)·변세청(邊世淸)·허손(許遜) 등도 조선 개국에 반대한 이유로 제주에 유배되었는데, 각기 경주 이씨 익제공파, 원주 변씨, 양천 허씨 입도조가 되었다. 제주에 유배되었던 한천·김만희·이미를 지칭해 제주에서는 끝내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란 의미에서 삼절신(三節臣)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신덕왕후와 사촌지간으로 전라 감사에 있던 강영은 1402년 제주도 함덕에 유배되었고 신천 강씨도 입도조가 되었다. 고부 이씨 입도조인 이세번은 조광조의 무죄를 호소하다가 조선 중종 17년(1522)에 대정현 신도리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7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병을 얻어 제주에서 사망하자, 병 간호를 위해 제주에 왔던 가족들은 제주에 정착하여 고부 이씨 입도조가 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모를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된 이익(李翼)은 제주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고홍진·김진용·문영준 등 제자를 길러내어 제주 교육 발전에 막대한 역할을 행하였다. 그는 제주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경주 이씨 국당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제주에 유배된 김응주(金膺珠)는 제주에서 소실을 맞아 자손을 낳고 유배에서 풀리자 되돌아가는데, 그의 아들은 제주에 남아 김해 김씨 사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당시 김응주는 제주 목사 김여수와 친척이었으므로 유배 생활 중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제주에 유배된 박승조(朴承祖)는 아들 박자호를 데리고 제주도 곽지리에 정착하여 유배 생활을 하다가 유배가 풀리자 본인만 돌아갔다. 따라서 그의 아들은 제주에 뿌리를 내려 밀양 박씨 규정공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왕족이었던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은 당시 심기원 등이 인조를 거부하고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데 당사자로 연루되어 1644년(인조 22)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1645년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일찍이 그의 서자 이팽형(李彭馨)이 현실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제주에 들어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아들을 낳아 전주 이씨 계성군파의 입도조가 되었다.
현종 때 제주에 유배된 이지달(李枝達)은 서인과 남인의 예송 논쟁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제주에서 소실을 얻어 아들 이보운을 낳았다. 유배에서 풀리자 그는 아들을 남기고 본인만 올라가게 되면서 수안 이씨의 입도조가 되었다.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유배된 김예보는 유배에서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여 김해 김씨 회의공 김경서파의 입도조가 된다.
제주는 선주민인 고양부 이외에 유배가 제주의 새로운 입도조를 만들었다. 특히 제주의 유배문화는 제주의 성씨를 다채롭게 하는 역할을 했다. 절해고도의 섬 제주에 유배온 일부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제주에서 현지 여인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자식을 낳았다. 유배인은 유배에서 풀려나 제주를 떠났지만 처와 자식은 유배인을 따라 가지 않고 제주에 남아 가계를 이어갔다. 이 같이 제주의 성씨는 제주의 선주민과 입도조로 구분 할 수 있어 제주 역사의 맥을 같이 하고 있다.
※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양진건(1999), <그섬에 유배된 사람들, 제주도 유배인 열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원 등을 두루 거쳤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