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최후 시민군' 함께한 여고생…46년 만에 전한 5월의 기억
17세 소녀, 그 후 46년...서귀포 6월항쟁 기념행사서 생생한 증언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 아버지의 한마디…2019년 왜곡 계기 침묵 깨
"이제는 살아남은 사람의 몫"…5·18과 6월항쟁 잇는 민주주의 가치
1980년 5월, 광주. 당시 광주동신여고 2학년이던 17살 소녀. 그는 친구들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기 위해 도청 앞을 찾았다. 그날의 발걸음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켰던 당시 여고생이 46년 만에 그날의 기억을 시민들에게 전했다.
5·18 광주민중항쟁 최후의 시민군동지회 김경임 부회장(63)이 그 주인공이다.
김 부회장은 27일 오후 5시 서귀포시축협 축산플라자에서 열린 서귀포6월민주항쟁기념사업회(회장 이영일) 주최 6월 민주항쟁 39주년 기념식 및 초청 특별강연회에서 '5월과 6월, 우리는 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1980년 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 부회장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치열한 시가전 이후 전남도청에서 자원봉사 활동에 나섰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재진입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도청에 남아 '최후의 시민군'과 함께했다.
그는 "그때는 광주에 큰 사건이 났다는 정도만 알았다"며 "고등학생인 내가 5·18에 참여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고 회상했다.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유학을 온 그는 학교와 자취방만 오가던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진 5월 22일, 친구들과 찾은 전남도청 앞에서 그의 삶은 방향을 틀었다.
도청 앞 광장에는 수많은 시민이 모여 있었고, 확성기에서는 "계엄군이 시민을 죽였다"는 외침이 이어졌다. 경찰 출신 아버지 밑에서 '군인과 경찰은 국민을 지키는 존재'라고 배우며 자란 김 부회장에게는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리어카에 실려 오는 시신들을 보는 순간 '이게 사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가치관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죠."
충격을 받은 그는 도청에서 "여학생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맡은 일은 취사반이었다. 칼질도 제대로 하지 못해 식판에 음식을 담아 나르는 일을 했지만, 하루 종일 수백 명의 시민군과 자원봉사자들의 식사를 준비하며 자연스럽게 도청에 남게 됐다.
처음에는 잠시 돕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면서 그는 계엄군이 진입하기 직전까지 도청을 떠나지 못했다.
5월 26일 밤,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취사반장은 "여학생들은 무조건 나가야 한다. 명령이다"라며 모두를 도청 밖으로 내보냈다. 김 부회장도 길을 안내받아 자취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발길은 집이 아닌 다시 도청으로 향했다.
김 부회장은 "당시 17살 여고생이었던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며 "저를 내보낸 취사반장 오빠는 분명 '도청에 남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정작 자신은 다시 도청으로 들어갔다. '왜 오빠는 집에 가지 않을까. 아직 도청에 누군가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집에 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면서도 "그때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 도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깜깜한 밤,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소식에 광주는 쥐 죽은 듯 적막했다. 불빛 하나 없는 거리를 지나 어렵게 다시 도청에 들어간 김 부회장은 자신이 일했던 2층 식당으로 향했지만 문은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마당으로 내려온 그는 우연히 자신을 밖으로 안내했던 취사반장과 다시 마주쳤다. 취사반장은 "분명 내보냈는데 왜 다시 왔느냐"며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랐고, "여기 있으면 죽는다"며 그를 다시 피신시키려 했다.
김 부회장은 "도청 밖으로 나가는 길은 이미 모두 막혀 있었다"며 "취사반장 오빠는 저를 도청 3층으로 데려가 도지사 휴게실로 쓰이던 방에 숨겨주며 '여기 있으라'고 한 뒤 다시 자신의 임무를 위해 떠났다"고 말했다.
3층에 몸을 숨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과 함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콩 볶는 소리처럼 '따다다다' 총소리가 들렸어요. 전쟁을 겪어본 적은 없지만 '전쟁이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취사반장은 "혼자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있는 게 낫다"며 그를 데리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깨진 유리 파편 위를 오리걸음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했지만 끝내 2층 복도에서 붙잡혔다.
죽은 듯 엎드려 있던 김 부회장을 계엄군이 총구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살았네."
그 말은 46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다. 계엄군은 총구로 다시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창문 아래에 머리를 숙인 채 있으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다시 총구로 등을 밀며 "고개는 절대 들지 말고 발만 보며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김 부회장은 고개를 숙인 채 복도를 걸었지만, 어두운 건물을 빠져나와 갑자기 환한 빛이 비추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전남도청 마당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곳곳에 널브러진 희생자들의 시신이었다.
이후 다른 시민들과 함께 상무대로 연행됐고, 광산경찰서 유치장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상무대와 유치장에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공포의 나날이었다. 전남도청에서 끌려나온 뒤 수일 동안 옷도 갈아입지 못했고, 씻지도 못했다. 부모에게 자신의 생존 소식조차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유치장에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다른 수감자들이 경찰에 항의했고, 경찰은 가족에게 필요한 물품을 가져오도록 편지를 쓸 수 있게 했다. 며칠 뒤 경찰 출신인 아버지가 면회를 왔다. 딸을 마주한 아버지의 첫마디는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였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어요.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이 어떤 심정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30여 일 뒤인 7월 3일 유치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석방 이후 시작됐다.
학교로 돌아오자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투명인간'처럼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훗날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학교에서 "강경임에게 절대 말을 걸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졌다는 것이었다.
집안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게 5·18은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금기였다. 가족에게는 "절대 5·18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내려졌고, 그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침묵해야 했다.
그 침묵은 무려 40년 동안 이어졌다.
전남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다 몇 해전 정년 퇴임을 한 김 부회장은 "5·18은 솔직히 잊고 싶은 기억"이라며 "내 인생에 5·18은 없었던 일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40년을 침묵 속에 살았다.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함께 살아온 남편조차 내가 5·18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털어놨다.
남편에게조차 5·18 경험을 털어놓지 못했던 그는 2019년 5·18 왜곡 발언을 접한 뒤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고, 2021년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크게 놀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상처를 안고 살아왔느냐고 하더라고요."
김 부회장은 "지금은 누구보다 든든하게 저를 지지해 주고 있다"며 "이번 제주 일정도 함께 왔지만 아직은 당시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어 행사장에는 혼자 참석했다"고 말했다.
광주의 기억을 털어놓은 2021년, 그는 옛 전남도청 복원 과정에서 연락을 받고 40년 만에 처음 도청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주려 했던 '취사반장 오빠'의 이름이 박병규(당시 동국대 1학년)였으며,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김 부회장은 "너무 부끄러웠고, 살아 있는 것조차 미안했다"며 "그동안 침묵했던 시간을 후회했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5·18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조금 편해졌습니다. 제 세대가 거의 마지막 증언 세대입니다. 제가 세상을 떠나면 이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점점 사라집니다."
이어 "이제는 피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 살아남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헤드라인제주>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함성..."5월과 6월,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역사"
서귀포 6월항쟁기념사업회 주최, 6월항쟁 39주년 기념식 및 특별강연회
서귀포6월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전국협의회와 제주대학교민주동문회가 후원한 6월 민주항쟁 39주년 기념식 및 특별강연회가 27일 열렸다. 이날 행사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6월 민주항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에는 서귀포6월민주항쟁 관계자들을 비롯해 임문철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김정수 제주대학교민주동문회장, 김태찬 공법단체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상임부회장, 고의숙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 당선인, 김용범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이사 등이 참석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하다 체포된 진희종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당시 전남대 재학)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영일 회장은 개회사에서 "서귀포6월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귀포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이들이 뜻을 모아 결성한 단체"라며 "당시 대학이 없던 서귀포에서 시민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 행진을 벌였던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귀포에서는 시민 2000여 명이 참여한 거리 행진이 펼쳐졌고, 이는 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며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업회를 꾸려 지금까지 기념행사를 이어오고 있다"고 밝혔다.
또 "6월 민주항쟁은 1980년 광주의 숭고한 희생 위에 피어난 민주주의의 역사적 결실"이라며 "회원들의 나이가 들면서 활동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한 노력만큼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민주주의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활동도 계속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열일곱 살의 나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전남도청을 지킨 김경임 부회장의 증언을 통해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의미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문철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격려사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삶은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기억해야 할 역사"라며 "6월 민주항쟁의 주역들이 남긴 발자취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후세 교육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 6월 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 제주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참여자들의 공적이 제대로 조명되고 기록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김정수 제주대학교 민주동문회장은 "6월 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해 국가폭력과 인권의 문제를 잊지 않고 더 나은 민주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찬 공법단체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상임부회장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수감 중이어서 현장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여러분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4·3과 5·18, 6월 민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인 만큼 왜곡과 훼손에 맞서 올바른 역사교육과 민주주의 교육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의숙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 당선인은 축사에서 "1987년 대학 신입생으로 6월 민주항쟁을 겪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됐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출발점도 바로 그때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4·3과 5·18,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진 민주주의의 역사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이뤄진 만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며 "교육감으로서 미래세대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역사교육과 민주시민교육에 더욱 힘쓰겠다"고 밝혔다.
또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지켜낸 결과"라며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여러분의 역사를 교육 현장에서 이어갈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 말미에는 서귀포6월민주항쟁정신계승사업회 등 전국 19개 단체로 구성된 '민주화운동기념계승단체 전국협의회'는 제39주년 6·10민주항쟁 기념 선언문을 발표했다.
협의회는 선언문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진영 논리와 무책임한 선동에 흔들리지 않고 지역사회 곳곳에서 상식과 법치가 바로 서며 이웃 간 신뢰가 회복될 수 있도록 일상에서 실천해 나갈 것"이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인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의 정신이 헌법 전문에 담겨 모든 국민의 권리로 보장받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39년 전 독재를 무너뜨렸던 시민들의 기백과 민주주의를 향한 보편적 신뢰를 바탕으로 온전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해 단호하고도 묵직한 발걸음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한편 1987년 6월 항쟁에서 서귀포시 지역은 매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함성이 전국에 울려퍼진 그해 6월, 국토 최남단인 서귀포시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귀포시내 거리에서도 경찰의 삼엄한 원천봉쇄망을 뚫고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시민들의 거대한 항쟁이 있었다.
청년들이 주도한 서귀포 항쟁은 들불처럼 확산된 독재권력에 대한 국민들 분노가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마침내 독재정권으로 하여금 무릎을 끓게 했다.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서귀포시 지역 거리시위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6.10 민주항쟁의 열기를 보여주는 국내 중요 사료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헤드라인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