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알뜨르비행장은 어떻게 세계적인 명소가 되는가
[기고] 정훈교 문화콘텐츠그룹 시인보호구역 상임대표(제주특별자치도 문화협력위원회 위원)
제주 서남쪽 송악산 아래, 알뜨르비행장에 처음 서면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아무것도 없네."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바다, 오래된 콘크리트 격납고, 그리고 바람뿐인 풍경. 누군가에게는 그저 허허벌판일 뿐이다. 그러나 문화기획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허허벌판은 아무것도 없는 결핍의 공간이 아니다. 하얀 백지는 불가능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다.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한 장의 낙서가 될 수도 있고,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작이 될 수도 있다. 지역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첫 밑그림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알뜨르는 이미 평범한 장소가 아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건설한 비행장과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19기의 콘크리트 격납고가 있고, 제주도민들이 강제 동원되어 판 동굴진지가 곳곳으로 이어진다.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섯알오름 일대에서 예비검속된 수많은 도민이 학살당한 제주4·3의 처절한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뿐인가. 한국전쟁 기간에는 육군 제1훈련소(강병대)가 들어서 신병 훈련장으로 사용되었으며, 비행장 주변에는 유엔군 제3 모슬포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어 1만 명이 넘는 중공군 포로가 수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전쟁의 모든 언어가 모인 곳에서, 평화의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실험실이 될 수 있는 공간은 대한민국을 통틀어 흔치 않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저 보존해야 할 유적, 기념해야 할 역사로만 가두어두고 있지는 않은가. 역사는 기억되어야 하지만, 그 기억은 멈춰 있는 구조물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흔히 지역을 개발한다고 하면 건물부터 떠올린다. 무엇을 지을 것인지, 얼마나 큰 시설을 만들 것인지, 얼마의 예산을 투입할 것인지가 논의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세계적인 명소는 건물의 크기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먼 길을 찾아오는 이유는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의미와 콘텐츠가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하드웨어는 사람을 오게 하지만,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것은 결국 문화와 콘텐츠라는 소프트웨어다. 제주의 진정한 경쟁력 역시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자연에서 나온다. 알뜨르의 격납고는 낡은 군사시설이 아니라 평화를 향한 입구가 되고, 동굴진지는 인권과 공존을 묻는 공간이 되며, 넓은 들판은 세계와 만나는 문화무대가 될 수 있다. 제주에는 좋은 건축물도 있고, 새로운 컨벤션 시설도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건물만으로 사람은 머물지 않는다. 회의가 끝나면 떠나고, 행사가 끝나면 공간도 함께 멈춘다. 건물은 이용할 뿐, 기억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것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콘텐츠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공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서사다.
최근 위성곤 제주도지사 당선인이 알뜨르비행장 스포츠타운 조성 계획을 철회하고, 다시 평화공원 조성 방향으로 전환한다고 밝힌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계획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알뜨르의 미래를 다시 그릴 수 있는 시간이 열렸다는 점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공간이 왜 제주를 넘어 세계에 필요한 장소인지부터 함께 설계해야 한다.
내가 상상하는 알뜨르는 단순한 평화공원이 아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상징적인 평화문화센터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랜드마크만으로 세계적인 명소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건축은 사람을 오게 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문화와 콘텐츠는 사람을 머물게 한다. 세계적인 명소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탄생한다. 그리고 진짜 경쟁력은 그 안을 채울 콘텐츠에서 시작된다. 낮에는 학생들이 AI와 XR(확장현실) 기술을 통해 일제강점기와 제주4·3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한다. 좁은 격납고 내부, 과거 전투기가 있던 자리에는 오직 한 점의 미디어아트나 조형물만을 배치하여, 그 시절의 압도적인 침묵과 죄를 씻어내는 '성찰의 시간'을 대면하게 한다. 해가 지면 넓은 들판은 거대한 야외 공연장으로 변모하여 제주의 역사와 신화를 담은 상설 공연이 사계절 내내 이어지고, 어둠이 내린 격납고의 둥근 콘크리트 표면은 역사의 상흔을 증언하는 입체적인 빛의 무대가 된다. 나아가 매년 세계 평화예술제가 열리면 각국의 예술가들이 몇 달씩 머물며 창작에 몰두하고, 세계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은 국제 평화캠프와 여름학교에서 함께 배우고 토론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하루만 머물다 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며칠을 머물고 다시 찾아오는 관계인구가 된다. 공연을 보기 위해, 예술제에 참여하기 위해, 창작을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숙박과 음식점, 문화예술과 교육, 국제교류가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지역경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이 그림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알뜨르 부지의 상당 부분은 국방부 소유이고, 재원과 행정 협의, 주민과의 합의라는 현실의 과제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다. 콘텐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먼저 만들어질 때 토지와 예산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제주에는 아름다운 자연은 많지만, 평화를 핵심 콘텐츠로 세계와 연결되는 문화거점은 아직 없다. 알뜨르는 그 가능성을 품고 있는 드문 공간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또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세계가 함께 배우고 창조하는 평화문화도시다. 전쟁의 흔적은 평화교육이 되고, 제주4·3의 기억은 인권과 화해를 배우는 세계의 언어가 되며, 허허벌판은 세계의 청년과 예술가들이 미래를 그리는 무대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원을 조성하고 건물을 먼저 세우는 일이 아니다. 앞으로 100년 동안 세계인이 제주에 머무는 이유를 설계하는 일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사람을 머물게 하며, 머무름은 관계를 만들고, 관계는 지역의 미래를 바꾼다. 알뜨르의 첫 번째 설계도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서사여야 한다. 하얀 백지는 불가능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다. 알뜨르는 더 이상 허허벌판 백지가 아니다.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제주다운 곳이며,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오는 문화의 중심지가 될 잠재력을 지닌 곳, 제주가 새로운 미래를 그려낼 수 있는 곳이다. <정훈교 문화콘텐츠그룹 시인보호구역 상임대표(제주특별자치도 문화협력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