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극단 오이가 소극장에 피워낸 뜨거운 '숨'
: OTT 시대, 우리가 여전히 연극을 보는 이유
김대훈 / 칼럼니스트 · 행정학 연구자
방 안에 앉아 손가락 하나로 수천 편의 콘텐츠를 골라보는 시대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는 이미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극장보다 화면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공연장으로 향한다. 왜일까.
극단 오이의 2인극 <숨>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선명한 대답이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며 건네받은 티켓은 한 장의 명함 같았다. 뒷면에는 배우의 친필 사인과 짧은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거창하지 않지만, 공연을 대하는 태도와 진심이 느껴지는 디테일이었다. 객석에 앉자 쳄발로 선율이 공간을 채웠고, 이내 안내방송이 흘렀다.
"배우의 호흡과 침묵 또한 공연의 일부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문장은 이후 실제 대사로 다시 등장한다. 공연은 시작 전부터 이미 관객에게 이 작품의 감상법을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던 셈이다.
낡은 분장실, 두 세대가 마주 선 거울
<숨>은 치매 진단을 받은 중년 여성 연극배우 '최영자'와, 드라마·예능·광고를 넘나드는 스타 배우 '하얀'이 하루 동안 낡은 분장실에서 마주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 사람은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무대에 서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화려한 성공 뒤에 불안과 외로움을 감춘 채 살아간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두 인물은 공연 전후의 긴장과 고백, 무대 위 돌발 상황을 함께 겪으며 결국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극은 '마주 보는 2인극'이라는 독특한 구조 위에 선다. 각자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분할 조명이 두 인물을 가르고, 쳄발로에서 피아노와 현악으로 이어지는 배경음악은 과장 없이 감정의 결을 받쳐준다. 특히 두 배우가 대사를 맞추는 장면은 단순한 극 중 연습을 넘어 세대 간 소통의 은유로 읽혔다. 서로 다른 시대의 감각과 몸짓이 충돌하면서도 결국 한 장면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특히 젊은 스타 '하얀' 역을 맡은 김소여 배우는, 오랜 신체 훈련의 공력이 묻어나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미세한 안면 근육을 활용한 표정 연기로 내면의 불안을 훌륭하게 시각화해 냈다.
소극장의 한계를 장점으로 바꾼 무대
이번 공연에서 단연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대 연출이었다. 검은 바닥과 대비되도록 칠하지 않은 각목으로 액자형 무대의 윤곽을 세우고, 반투명 막을 경계로 무대 앞과 뒤를 입체적으로 오갔다. 가운데가 뚫린 흰색 나무 의자는 시공간을 관통해 바라보게 만드는 상징적인 오브제로 기능했다.
간단한 소품 이동만으로 '무대 뒤 분장실'과 '무대 위 공연장'이 순식간에 교차하는 순간, 관객인 나는 마치 그 공간을 함께 건너 이동하는 듯한 감각을 체험했다. 과거 관람했던 <더 드레서>에서 느꼈던 백스테이지 특유의 입체적인 긴장감이 이 작은 소극장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소극장의 물리적 제약을 오히려 장점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제주 소극장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무대였다.
절정, 그리고 우리가 연극을 보는 이유
극 전반부, 두 캐릭터가 핑퐁처럼 주고받는 대사 템포는 상당히 빠르다고 생각했다. 초반 일부 장면에서는 감정의 밀도가 다소 빠르게 소비되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공연이 후반부로 향하며 그 이유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초반의 가벼운 호흡은 마지막 감정의 낙폭을 위한 치밀한 준비였다.
극의 감초 역할을 맡은 멀티 배우도 인상적이었다. 모자 등 소품을 활용한 재빠른 전환이 경쾌했고, 극 전체에 활력을 더했다. 맡은 인물마다 호흡과 보폭의 차이가 조금 더 분명했다면 각 캐릭터의 개성이 한층 또렷해졌을 것이라는 작은 아쉬움은 남는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오히려 이 배우의 다음 무대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의 절정.
무너져 내리는 기억과 배우로서의 자존심이 충돌하는 순간, 객석의 공기까지 함께 흔들렸다. 토해내듯 쏟아지는 대사와 뚝뚝 떨어지는 눈물 앞에서 나는 잠시 몸이 굳어버렸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배우의 숨소리, 객석의 침묵,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똑같이 만날 수 없는 시간. 그것은 화면이 아니라 현장에서만 완성되는 감각이다. 아주 오랜만에, OTT가 결코 줄 수 없는 감동을 무대에서 받았다. 연극을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연 기간과 횟수가 짧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더 많은 관객들이 이 뜨거운 무대의 호흡을 직접 느껴보기를, 그리하여 관객과 창작자 모두에게 더 큰 감동으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약해 본다. <김대훈 / 칼럼니스트 · 행정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