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실의 알고듣는 클래식](43)게오르그 필리프 텔레만의 바순소나타

Bassoon Sonata TWV 41 f1

2025-09-03     정은실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에는 낮은 톤의 안정되고 묵직한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계절에도 깊이가 있다면 아마 요즘처럼 11월에서 12월로 바뀌어가는 때가 가장 깊숙히 들어 와 있는 계절이 아닐까 한다. 가을은 깊어가고, 그렇다고 봄을 향해 한참 달려가는 겨울도 아닌 간이역 계절,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악기가 있다. 바순(Bassoon)이다.

어느 겨울이 있었다. 을씨년스런 겨울의 초입에서 거미줄 처럼 얽힌 사람과의 관계성으로 머리가 복잡해 있을 때였다. 그때 코트깃을 여미고 한참 명동의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필자의 뒤에서 마치 뒷덜미를 낚아채듯 잡아당기는 음률에 발이 멈췄던 적이 있다. 명동의 음반가게 25시 음악사에서 흘러나오는 바순 음률이다. 그 나름으로 당장 발길을 돌려 티롤 음악다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신청해서 들었던 곡이 텔레만의 바순소나타다. 삐걱거리는 티롤다방의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맞는 티롤의 두툼한 원목 탁자는 어디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문인들과 클래식애호가들이 다녀가면서 담배불로 지져놓은 탁자의 한 귀퉁이에서 듣던 텔레만의 바순소나타는 그래서 필자에게 더욱 정감있게 다가온다.

그 후 줄곧 뉴욕에 살면서도 문득문득 바순의 음률이 못견디게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단지 바순의 음률 뿐 아니라 그 시절을 반추하고 싶은 생각에 다시 슬며시 텔레만의 바순소나타를 듣는다. 음악의 힘이 참으로 놀랍다. 마치 기억의 창고문을 여는 열쇠같이 음악을 들으며 하나하나 추억의 편린들을 꺼내어 추억여행에 잠겨본다.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나 그보다도 귀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소유하는 것 만큼 큰 부자가 또 있을까, 바순소나타를 들으면 한껏 감성은 고조로 오르고 마침내 환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풍요로움을 가득 안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텔레만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로 헨델과 바흐와 조우하며 지냈던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헨델, 바흐, 비발디 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천여곡을 작곡한 텔레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곡을 작곡한 다작의 작곡가였다. 물론 곡 중에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텔레만이라 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식탁음악으로 알려진 타펠뮤지크(Tafelmusik-table music)을 들 수 있다. 바로크 시대 바흐는 과학적, 수학적으로 자로 잰 듯한 평균율에 몰두해 있었고 헨델은 왕을 위한 궁정음악에 심혈을 기울인 반면 텔레만은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탁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평인들의 식사는 아니었을 터이지만 비록 귀족의 식사라 할 지라도 특별한 날의 밥상이 아닌 평일 식탁에서의 음악이라니, 이보다 더 실용적인 음악이 있었을까 싶다. 어느 날, 필자도 한번 시도해보고 싶어서 텔레만의 타펠뮤직을 틀어놓고 밥을 먹어 본 적이 있다. 그동안 바쁘게 달음질 하듯 살아온 탓인지 음악도 제대로 안 들리고 밥도 먹는둥 마는둥 했다. 그러나 볕 좋은 어느 날, 티 한잔을 마시면서 드는 타펠뮤직은 향기롭기 그지없다. 마치 바로크 시대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느낌으로 한하고 앉아 있고만 싶어지는 곡이다.

텔레만 곡 중에서 타펠뮤직 다음으로 유명세를 타는 곡이 있다면 아마도 바순소나타일 것이다. 10세기 경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던 바순은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겹리드를 사용하는 목관악기 중 가장 낮은 음역대를 소화해내는 바순은 파곳(Fagot)이라고도 부른다. 이태리어로 막대기란 의미다. 낮은 음역으로 인해 슬픈 음률이나 진지하고 중후한 감정을 나타내는 음률을 잘 소화해 내는 악기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바순의 매력은 안정감과 낮은 음에서 풍겨나오는 깊고 우아한 매력이다. 특히 텔레만의 바순소나타는 십여분 밖에 안 되지만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옛날, 언젠가 한두번은 들었던 느낌이 드는 익숙한 음률이다. 그 정도로 우리에게 친근감이 드는 음률로 처음 듣는 사람도 허밍으로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리 어렵지 않은 곡이다. 1악장 트리스테 2악장 알레그로 3악장 안단테 4악장 비바체로 구성된 이 곡은 전체가 악장 구분없이 이어져서 흐른다. 특히 1악장 트리스테(Triste-슬픔)의 매력은 한번 듣고 이 곡에 파묻혀버리는 강한 매력을 지닌 악장이다.

다음 달을 기다리는 간이역 계절에, 잠깐 쉬어가는 마음으로 듣는 텔레만의 바순소나타는 우리에게 가슴 뭉클하도록 진한 추억과 향수를 느끼게 한다.

텔레만의 곡에 붙은 TWV는 텔레만 작품번호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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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정은실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칼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