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18) 천 개의 꽃 그러안은 포용의 꽃더미, 여름날의 수국

2025-07-24     배공순

수국의 계절이다. 수국을 바라보면 행복한 감정이 꽃처럼 피어난다. 몽실몽실한 얼굴이 정겨워 미소가 번진다. 여럿이서 원만한 하나를 이루고. 그 안에서 모두는 조화롭다. 옹색해 보이는 꽃잎 하나 없고 옆자리를 넘보는 욕심쟁이도 없다. 기꺼이 연대하며 농담의 낯빛으로 어우러져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오색 축포를 쏘듯 피어나 풍만한 자태를 펼치는 수국은 이파리조차 청청하고 늡늡하다.

둥그스럼한 형상에서 우리는 포근함을 느낀다. 그래선지 제주의 너울대는 오름은 보는 이를 너그러운 심성으로 이끈다. 야트막한 능선이 굽이치는 남녘의 산야 또한 바라볼수록 만사태평 편안하게 품어준다. 자연스레 굽은 오솔길, 어깨를 잇대고 물결치는 다랑논, 앞산의 부드러운 산그리메에서 평온한 삶의 여유를 누린다. 만년설을 이고 삼각으로 치솟은 이국적인 산이나 깎아지른 계곡은 경외와 찬탄을 자아내지만, 왠지 모르게 묵직한 위압감을 주지 않던가.

수국은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탐스러운 꽃을 피운다. 주어진 토양을 탓하지도 않는다. 산성이 많으면 푸른 꽃을 피우고, 알칼리성이 강하면 분홍 꽃을 피워낸다. 어찌 보면, 땅의 성질을 이용해 꽃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신통방통한 재주꾼 아닐까. 재주를 부리려니 그토록 많은 물을 들이켜는지 모르겠다. 농부들이 물을 붓다시피 하며 수국을 키우는 걸 보면. 그래선지 ‘물먹는 하마’라는 별명을 얻었고, 장마철에 더욱 선명하게 피어나 ‘비 오는 날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몇 년 전 제주를 오가며 ‘오름 아카데미’에 재미들이던 여름 어느 날, 오름 탐방차 영주산에 올랐다. 땀을 닦으며 들어선 오솔길에서 푸른 산수국 무리를 만났다. 너무 진하지도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푸른 빛이 묘하게 다가왔다. 우북한 잎새에 싸인 작고 수수한 꽃이 애처러워 보였다. ‘말 못 한 사랑’이라는 꽃말 탓인지 가슴에 퍼런 멍 자국 하나 얹고 사는 여인 같아서였을까. 소담하게, 수줍은 듯 피어있던 푸른 수국의 잔영이 서늘하게 남아있다.

그 수국밭에선 가짜 꽃들이 얼굴을 치켜들고 벌을 부르는 중이었다. 작은 저 꽃이 벌의 눈에 보일까, 유혹에 끌릴 만큼 아름다워 보이기는 할까. 궁금해하는 사이 서너 마리 벌이 윙윙거리며 날아들었다. 까닭 없이 마음이 놓여 오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국은 영리하다. 곤충을 불러들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다. 수국은 큼지막한 가짜 꽃잎이 진짜 꽃잎을 감싸고 있다. 커다란 꽃을 살랑거리면 화려한 가짜에 끌려 벌들이 날아와서는 진짜 꽃의 꿀을 빨며 수분 受粉을 한다. 수국이 굳이 두 가지 꽃잎을 만드는 이유는 최소 투자로 최대 수익을 내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이 아닌가. 꽃 전체를 크게 만드는 것보다, 화사한 가짜 몇 개로 호객하는 것이 효율이 높다는 건 어찌 알았을까. 그러니 영리하달 밖에.

이처럼 진화를 거듭해 온 수국이건만, 더 영악한 개체가 있으니. 인간의 솜씨가 개입하는 순간, 열매 맺지 못하는 불임의 꽃이 되고 말았다. 수분이 필요 없는 가짜 꽃봉오리, 이것이 더없이 풍성하고 탐스러워 이제는 벌을 제쳐두고 뭇 인간을 불러 모은다.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은 기꺼이 허리 숙여 꽃을 보며 속삭인다. 꽃잎을 만지며 촉각으로 꽃을 소유하고 마음 안에 담는다.

모 구청 과장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직원들과 가평에 있는 아침고요수목원으로 정원 답사를 나섰다. 마침, 수국이 만개하는 때라 수국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색색깔의 크고 작은 수국이 총출동해 수국 천지였다. 환상적이었다. 분홍, 하양, 노랑, 보라 등 색의 다양함에다 품종도 수없이 많았다. 미국에서 들어왔다는 '미국수국', 꽃이 공처럼 생긴 '수국', 경기, 강원 지역에서 자생하는 '산수국', 산수국에서 유래된 '탐라산수국', '꽃산수국', '떡잎산수국' 울릉도에서 나는 '등수국', '바위수국',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나무수국', 그 외에도 라임라이트, 애니벨, 별수국, 블루밍블루…. 사방팔방에 수국꽃이 넘쳤다.

꽃 사이 나비 되어 나르는 내 팔을 잡으며 가담가담 센스 넘치는 이경자 팀장이 말했다.

“과장님은 한 송이 수국 같아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수국은 그저 커다란 꽃이려니 했는데 그 속에 수많은 꽃을 품고 있음을 보았단다. 하나이면서 여럿을 보듬은 모습, 그 안에서 작은 꽃들이 온전하게 하나를 이루게 하는 부드러운 힘, 문득 그것이 나를 닮았더라는 거였다. 내겐 과분한, 생각지 않은 찬사에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이라도 그러하다면 더욱 수국을 닮아보리라. 그 후로 나는 수국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수국은 내게로 와 가장 사랑스러운 꽃이 되었다.

여러 가지로, 모여 있으나 품지 못하는 요즘이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다 하나일 수 없고 하나가 되지도 않는다. 어쩌면 꼭 하나일 필요도 없다. 그저 담담하게 서로를 인정하고 하얀 수국처럼 순수하고 거짓 없이 스며들면 좋으련만…. 산성 토양 화산섬에서 파란 꽃을 피우는 제주 산수국처럼 흔연스레 받아들이고 배려하면서 말이다.

휴애리, 종달리, 카멜리아힐의 수국을 보고 싶어 그저 달싹거리기만 했다. 다시 기다림이 시작되는 지금, 여기저기 흐드러지던 수국은 어느새 지고 있다. 이제 다음을 기약하며 지는 꽃송이를 잘라주어야 할 때다. 몫을 다한 생명은 거두어야만 더 풍성해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 아닌가. 때로 명징한 푸른색으로 겨울 새벽 세숫물처럼이나 “쨍”하니 나를 깨우는 수국, 푸른 수국이 전하는 말을 다소곳이 음미해 볼 일이다.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수필가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