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15) 푸른 초원의 섬,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

2025-04-21     배공순
격납고와

만화방창萬化方暢의 4월, 겨우내 묵언 중이던 꽃망울이 앞다퉈 입술을 연다. 유채밭 이랑에 샛노란 물결이 너울거리는데, 보라색 아기별 꽃은 초롱초롱하다. 푸른 바다는 싱그러운 봄을 품고 간지럼타듯 출렁댄다. 움츠렸던 만물이 움트는 산야는 눈이 부시다. 생기발랄하고 평화롭다.

제주공항의 비행기는 사람들을 쏟아내고 사람들은 오름으로 바닷가 올레로 그림자를 지고 달려간다. 열 군데 명소마다 열 가지 매력을 지닌 제주, 그 아름다움의 뒤란에는 아픔의 흔적이 숨어 있다. 그에 비켜서지 않고 아물지 않은 상흔을 마주 보는 것. 새로이 관심이 높아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 그것이다. 전쟁이나 학살이 일어난 역사적인 현장, 크나큰 재난 재해가 몰아쳤던 흔적을 찾아 깊이 사유하며 교훈을 되새기는 탐방으로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이나 ‘그리프 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한다. 뼈아픈 과거의 속살을 바라보기 시작했음은, 어느덧 내면이 단단해졌다는 것. 그리고 어두운 역사의 그 무게를 감당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두터워진 것이리라.

푸름

꽤 오래전, 좋은 이들과 제주투어를 할 때였다. 일상을 벗어난 자유로움에 마음은 두둥실 구름 위로 올라섰다. 어느 드넓은 억새밭이 하얀 파도처럼 바람에 일렁거렸다. 억새밭 사이로 퐁당 들어가 누웠다 일어나서는, 다시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르며 아이들처럼 즐거워했던 그곳. 알고 보니 일제 강점기의 생채기를 품고 있는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당시에는 물결치는 억새꽃이 풍성하고 이름조차 독특한 비행장이었다는 것뿐, 자세한 건 알지 못했다.

비행장은 예로부터 농사짓던 농지 겸 목초지였다. 일제 강점기 때 제주민들은 ‘앞에 있는 넓은 들’에 들어서는 군용 비행장 공사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비행장 여기저기에는 튼튼한 격납고 이십여 개가 세워졌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일본 본토를 지키는 동시에 중일전쟁의 기착지로 삼기 위해 방공호와 지하갱도 등을 만들면서 대규모 군사시설로 확장되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강제노역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비행장을 비롯해 송악산 해안가에 여러 개의 일제 진지동굴을 파게 했고 제주 전역을 요새화하느라 눈에 불을 켰다. 한반도 본토의 노동자들을 강제 징집해 건설 현장에 밀어 넣었고, 가미카제 특공대까지 운영하며 최후의 발악을 했으니….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중노동에 시달리고 밤에는 일본군의 감시하에서 불안에 떨어야 했다.

격납고

그들의 피눈물이 어룽진 채 섬처럼 남은 콘크리트 격납고들.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알뜨르 드넓은 대지 위에 웅크리고 있다. 그 어두컴컴한 속내에 잠들어 있는 건 무엇인가. 힘없는 나라의 비통함과 끌려온 노동자들의 한 맺힌 울분이 아닐까. 이제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남아 처절한 고통을 겪었던 그때의 참상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으니, 당시 희생된 노동자의 아픔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사진작가들의 색다른 피사체가 되었고 다크 투어리즘의 명소가 된 알뜨르 비행장. 그 중 어느 격납고 안에는 일제의 제로센 비행기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비행기는 녹슨 세월의 옷을 입은 채 묵묵히 서 있고, 다녀간 이들의 애잔한 마음을 담은 리본들만 평화로운 초원을 건너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지난해 베트남 여행 때, 호이안의 코코넛 마을 강에서 이색적인 바구니 배를 탔다. 화려하게 치장한 수백 대의 바구니 배가 줄지어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바구니 배를 운행하는 남자들은 깡마르고 체구가 작았다. 배를 젓는 사람들 외에 둥근 배를 어슷하게 기울여 정신 달아나게 돌리는 묘기를 부리거나, 신나는 한국가요를 부르며 춤추는 청년들은 여행자들에게 기다란 노를 들이밀며 팁을 받느라 부산했다. 유쾌한 분위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들이 따이한이라는 말을 듣고 나자 울적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인과의 혼혈로 태어나 ‘라이 따이한’이라 불리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생계 수단으로 배려한 것이 뱃사공이라 했다.

코넛
코넛

우리 역사에서 외침으로 고난을 겪은 일은 헤아릴 수도 없다. 언제라고 남의 나라를 넘본 적이 없는 우리건만, 6, 70년대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투입되며 그 나라에 이런저런 상흔을 남겼던 것. 짓밟힌 자의 고통은 지금도 진행 중이기에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더듬어봐야 하는 일 아닌가 하는 상념에 잠시 잠긴다. 그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서로에게도 명징한 사유와 너볏한 배려와 이물감 없는 어울림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노란 옷을 차려입은 동박새 노래에 “투둑, 툭!” 붉은 동백꽃이 진다. 유채밭 너머 분홍 꽃은 새뜻한데 푸른 바다는 여린 풀 내음을 안고 일렁거린다. 산자락 고사리는 오므린 손등을 펴가며 땅껍질을 헤집고, 버드나무 곱슬한 새순도 햇살에 곰실거린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푸른 들에 흩어져 있는 격납고는 어디에도 없는 또 하나의 풍경으로 서 있다. 지나간 날을 새기며 꽃구름 피어나는 몽환적인 봄을 낙낙한 마음으로 맞이하면 어떨까. 그 기억의 끝에서 희망의 발걸음은 시작될 터이니….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수필가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