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경제개발계획, 제4부 권력이 되다

[김평선 시론-제주국제자유도시와 제주의 미래] (2) 박정희 경제개발계획, 제4부 권력이 되다

2025-03-05     김평선

1990년대 제주개발특별법 시대가 2001년 제주도가 제주국제자유도시로 지정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90년 이래 제주개발 문제와 제주의 미래를 위한 논쟁과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미래, 공동체의 미래, 제주 환경 파괴를 걱정하는 제주도민도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 논의는 개발 vs 보전 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개발과 환경 파괴 문제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와 민주주의도 중요하다. 도민의 삶도 중요하다. 그래서 현 제도를 만들어 낸 과거를 바로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겪는 다양한 현상이 왜 나타나는지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즉, 현재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작동시키는 논리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현실과 제도를 평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분명하게 보이는 현실로서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이런 바탕에서 제주국제자유도시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어갈 수 있다.

[제주국제자유도시와 제주의 미래]를 주제로 제주국제자유도시가 탄생하게 된 맥락을 긴 역사적 흐름 속에서 되짚어 보고, 제도가 어떤 논리로 설계되고 운영되고 있는지, 그 속에 오류는 없는지 검토하려 한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는 역사 속에서 경제와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안할 때마다 미래의 모습을 모색해 왔다. 지금이 바로 ‘그때’일 수 있다. 그래서 도민 각자가 원하는 세상을 상상하는 힘을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다. 미래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감각과 이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글쓴이>

(2) 박정희 경제개발계획, 제4부 권력이 되다.

18세기도 마찬가지였지만, 19세기 유럽 및 세계에서 국가와 기업, 개인이 행복을 추구했지만, 국가부도 사태, 은행 파산 등 경제 위기가 반복되었다. 특히 19세기 중반 이후 장기 경기침체 시기를 경험했다. 식민지 쟁탈 전쟁이 확산되면서, 결국 1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1차 대전으로 잠시 경제가 좋았던 미국은 1929년 대공황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루즈벨트와 민주당 정권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는 자유방임 원칙을 깨고 빈부와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을 위한 뉴딜을 앞세웠다. 뉴딜은 임금과 가격 규제를 통한 공정한 경쟁 및 노동권 보장을 통한 협상력 증진, 금융 구제, 주식·채권 등 제2차 금융 시장 규제, 대규모 SOC(댐, 도로 등) 건설 프로젝트, 주택 개선을 통한 주택 건설 시장 활성화, 조림 및 자연 보전을 위한 공공근로사업, 농축산물의 과잉생산 감축 및 농축산물 가격 인상을 통한 농민 구매력 증대 등 총수요를 늘리고자 했다. 

뉴딜

그러나 90년대 이후 뉴딜정책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아졌다. 자산과 기업가 정신에 의해 사회 ‘합의’가 제한된 자본 중심의 미국 사회를 지적한 호프스태터는 “열정만 있었을 뿐, 철학이 없었다”며 뉴딜정책의 사유 빈곤 문제를 지적했다. 뉴딜 정책은 모순적인 측면도 존재했고, 정책 연계도 부족했다. 총수요 발생보다 정부 재정 지출이 더 많아 세수 증대 효과가 미미했다. 정책의 지속 가능성이 담보되지 못해 연방정부는 재정 적자에 직면했다. 미국의 뉴딜정책 중 농업 생산량 감축 정책의 민주성 측면에서 보면, 농민과 형식적으로 논의할 뿐 농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다. 당시 농민의 순소득 감소는 높은 생산 비용 문제도 있었다고 지적되었지만, 현장에서 정책을 관리 집행하는 전문가들은 맹목적으로 정부 목표에 따라 농민에게 농업 생산량 감축을 독려했다. 조림과 국유림 보전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테네시강 유역 개발사업을 추진하며 환경을 더 파괴하는 모순이 있었다. 뉴딜정책은 모든 미국인의 이익 증대만 맹목적으로 추구했다. 이후 미국 경제가 활력을 찾은 것은 유럽에서 2차 대전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 미국의 전후 경제개발계획 모델 : 벤담의 공리주의 + 사회개조

2차 대전 후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 관료들에게 늘어난 생산 규모와 군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대공황 공포 영향인지 모르지만, 40년대 미국 사회에서 완전고용 사회가 화두로 대두되었다. 미국 연방정부는 전후 완전고용 체계를 구상했다.* 1 미국 정책 결정자들은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경험하면서 유럽 국가들의 금융과 경제가 미국 경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미국은 철저한 자유무역과 경제개발을 선택했다. 가트(GATT) 무역 체제는 철저한 자유무역을 지향했다. 자유무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 불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MF가 창설되었다. 

CIA,

5.10 선거 직후, 6월 미국 의회는 한국 원조와 지원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0월 CIA는 ‘한국의 생존 전망’ 보고서에서 한국군 지원과 조원, 경제개발 등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종결 이후 유엔과 미국의 지원 정책은 한국경제를 전쟁 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국의 정치, 경제학자, 전문가들은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유럽 부흥 정책, 남아메리카와 필리핀에서 실험한 경제개발 사업 경험이 전부였다. 미국 관료들은 유럽의 마셜플랜에서 얻은 교훈, 즉 기술을 지원하면 제3세계 경제가 발전한다고 단순하게 낙관했다. 그래서 50년대 중반 기술 지원 중심의 ‘포인트 포’ 해외원조 정책이 시작되었다.

유럽 부흥 계획 차원에서 일부 국가에서 경제개발계획이 실행되었지만, 미국 지식인과 유럽 지식인들이 경제개발계획의 성격과 효과를 놓고 논쟁했다. 유럽 지식인들과 논쟁한 프리드먼(John Friedmann)은 1959년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쟁점이 해소되었다고 선언했다. 프리드먼은 19세기 이래 유럽과 식민지 사회를 지배한 벤담의 공리주의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사회개조’를 포착했다. 이후 프리드먼은 국토계획이 사회체계를 변화시키는 가이드 역할을 하며, 지역계획은 국토계획에 따라 지역의 인간 활동을 조직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 2 

프리드먼은 미주기구(OAS)의 자문을 맡고 나서 브라질(1955-1958), 1963년 설치된 한미경제협력위원회(USOM), ICA에서 개발계획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1961년부터 MIT 대학의 조교수로 부임하면서 경제개발계획과 도시계획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학과 공동으로 이론화 작업과 포드재단의 지원을 받아 칠레의 도시계획과 지역개발 자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 미국의 개발금융(차관)과 1차 오일쇼크, 그리고 자유지역 구상

1957년 미국 상원이 해외 무상원조 정책의 효과성에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57년 브루킹스 연구소의 행정 관점의 보고서*3를 시작으로 다양한 보고서가 상원 특별위원회에 제출되었고, 자체 조사도 진행되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4개국, 유럽, 중미 국가 등의 해외원조 프로그램 보고서가 작성되어 상원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미국 사회는 해외 투자를 할 기회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상원 청문회가 개최되면서 원조 중심의 대외정책이 부정되기 시작했다. 이 결과 1961년 케네디 정부는 원조 수혜국의 개혁과 자조를 강조하면서 차관(개발금융) 지원 중심으로 외교정책을 수정했다. 이후 무상원조 비중이 감소했다. 이런 맥락에서 1963년 한미경제협력위원회(USOM)가 설치되고 경제 지원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프리드먼의 공리주의와 사회개조 생각에 따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산업기업 육성 전략이 되었고, 국토계획이 농업사회를 산업사회로 개조하는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국토계획에서 산업단지(생산)와 소비를 위한 도시가 다루어졌다. 국토계획의 가이드(지침)에 따라 지역 개발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1963년 국토건설종합계획법 제정 이후 국토에 산업입지, 도시건설 등이 포함된 국토건설종합계획이 1965년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 관료들이 외자 유치를 위한 투자처로 제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1960년 제주도 관광객이 1만 명을 넘어섰다. 1964년 국무총리 직속으로 제주도지역개발연구회가 설치되고, 외자 유치를 위해 제주도 전역을 투자 자유지역으로 개발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투자 자유지역 구상 대신 중앙은 제주도를 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특정 지역’으로 고시(1966년)하고, 1967년 제주도를 ‘국제 관광지’로 개발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한 중앙 언론은 제주도를 ‘황금의 땅’으로 표현했다. 

한편, 1969년 초지법이 제정되면서 중산간 초지가 기업의 산업 효용 증대 목적으로 부각되었다. 초지법에 따라 넓은 초지를 여러 사람이 분점하여 이용하는 것보다 기업이 이용하는 것이 효용이 더 크다는 논리가 작동되었다. 제주도 중산간에 기업 목장을 조성하기 위해 국공유지 매각 등 행정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은 방목지를 잃었다. 대한항공이 초지를 매입하여 제동목장을 운영한 이후 현재 지하수 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제주도

1972년 10월 유신 단행과 제1차 오일쇼크(1973~1974) 직후, 중앙은 또 제주도 내 특정 지역을 특정 자유지역으로 개발하는 구상을 검토했다. 1970년 마산 수출자유지역(외국인 투자 전용 공단)으로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고,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 등 화해 분위기로 인해 중앙은 제주의 특정 지역을 외국인 투자유치와 수출입 자유지역 지역으로 개발하는 구상안을 마련했다. 제주의 특정 지역을 수출가공자유지역, 원자재(원유, 원목) 비축 자유지역(중산간), 면세 상품교역 자유지역, 자유무역과 스위스 은행을 모델로 한 ‘자유금융시장’ 구상이 포함되었다. 중산간 일대의 대규모 개발, 수자원 개발, 외국인 토지 소유와 매각 특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한편 인구 집중에 따른 부동산 상승, 외국인 거주로 인한 이질감, 행정 관리 문제 등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자유 희생, 소외 문제는 지적되지도 않았다. 제주도 전체를 개발하면서 나타나는 환경 문제도 고려되지 못했다. 개발로 인한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생산비용 증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중 화해 분위기를 낙관하면서 국제질서의 불안정 특성을 무시했다.

사실 제주국제자유도시 특례 제도는 식민지 시대 조선총독부가 활용한 제도이다. 특히 총력전 수행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특례 제도(예, 전시행정특례, 전시범죄처벌특례)를 자주 활용했다. 이 제도가 5.16 직후부터 각종 특례법에서 자유를 희생시키며 특정 효용을 추구하는 도구로 자주 활용되었다. 산업 분야의 특례법으로 1962년 ‘공업지구조성을위한토지수용특례법’이 제정되었다. 특례 제도로 구로공단 건설 과정에서 농민의 토지가 강탈되었고, 최근 법원이 권리 박탈을 인정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유신헌법 국민투표 실시 과정에서 특례 제도(국민투표에관한특례법)가 도입되었다. 특례 도입으로 선거 행정이 간소화되고, 유신헌법 반대 토론회와 반대를 알리는 홍보 등이 금지되었다. 

◇ 국가 운영 지식과 기술 결여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이 사회, 경제, 정치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60-70년대 중앙은 국가 운영을 위한 지식과 기술에 관심도 없었고, 해외 위기 요인에 취약한 경제를 만들어 왔다. 60년대 중앙은 인플레이션이 경제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인식하지도 못했다. 은행들이 신용보다 담보를 선호하면서 기업들이 부동산 매입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주도했다. 70년대 중화학공업 육정 정책을 추진하면서 막대한 재원을 해외에서 차입했지만, 중화학공업이 산업 전반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고, 공공 외채 이자율 부담만 늘었다. 기업의 자본이 축적되지 못했고, 차입으로 기업을 운영하면서 80년대 해외 이자 부담이 증가했다. 중앙정부는 내·외부 위기에 취한 경제개발과 성장만 추구했다. 

겉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장의 토대가 취약해지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과 국토종합건설계획 영향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농민과 서민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인플레이션 증가율이 1960년대 초에 점차 상승하여 1964년에 최고 32%를 기록했다. 불만의 목소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부는 60년대 인플레이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등 국가를 운영하는 방법을 몰랐다. 1971년 총선에서 도시 유권자들이 야당을 선택함으로써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1971년부터 인플레이션이 경제정책에서 중요시되었지만, 제1차 오일쇼크로 효과가 무너졌다. 

◇ 경제개발계획, 제4부 권력이 되다.

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은 부(富)를 소수에 집중시키며 입법, 행정, 사법 외 제4부 권력이 되어갔다. 하지만 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제개발계획을 견제하고 제어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는 무력했고, 환경영향평가 제도도 견제하지 못했다. 관료 지배가 공고화되었다.

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후인 72년 5월, 청와대 내부에 ‘대만의 안정적 고도성장 요인 분석 보고’ 자료를 통해 대만인의 근검절약 성향, 투자유치와 높은 이자율 정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안정이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중앙은 국민에게 근검절약을 외쳤지만, 부동산 개발을 추진하며 부유층과 재벌의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지 못해 스스로 몰락했다. 박정희 경제개발계획이 사회, 경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국가 운영 지식과 기술이 없었던 중앙정부는 위기가 찾아오면, 제주를 외화벌이 수단, 투자유치 수단으로 바라보았다.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외부 위기(차관 금융 지원, 오일쇼크로 인한 국내 자본 유출)가 찾아오면, 중앙은 자신의 효용, 경제개발에 필요한 금융과 자본 확보를 위해 제주 자유지역을 검토했다. 제주도 공간과 도민은 수단과 도구에 불과했다. 프리드먼의 생각처럼, 중앙은 자유지역을 위해 제주도민의 경제적 삶을 조직하고자 했다. 중앙은 사회관계와 지방자치, 민주주의가 자유 도시를 위해 복무하는 시대를 만들어갔다. 

맹목적으로 벤담을 추종한 정권이 몰락했지만, 제주도를 바라보는 중앙의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외부 경제 흐름의 변화에 따라 제주도에 대한 중앙의 구상이 다소 변화되었을 뿐 큰 차이가 없었다. 제주를 바라보고 구상하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았고, 목표가 유사했다. 문제는 중앙이 추구한 행복(효용)과 제주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인식이 문제였다. 

2차 오일쇼크 직후 중앙은 이전과 다른 이유로 경제성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유사한 전략이 제시되었다. 80년대 후반 제주도 개발을 다루는 법률 체계를 일원화하는 구상이 제시되면서 민주화 이행과 더불어 제주도개발특별법 시대로 전환되었다. 

글쓴이 김평선은 제주4.3유족으로 정치학을 전공하고 제주4.3에서 서북청년단의 폭력행위 동기를, 미군정의 제주도제 실시 사례에서 영토와 권력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시야를 넓혀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운영되어 온 과정을 정치철학, 권한 이양과 분권화 등 국가 운영을 위한 기술(statecraft)를 중심으로 공부해 오면서, 국가를 ‘권력과 지배’, 그리고 ‘자유’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 1. U.S. National Resources Planning Board, Post-War Planning: Full Employment, Security, Building America September 1942.
* 2. John Friedmann, "Regional Planning and Nation-Building: An Agenda for International Research" Economic Development and Cultural Change , Oct., 1967, Vol. 16, No. 1 (Oct.,1967), pp.119-129.
* 3. Brookings Institution, Administrative Aspects of United States Foreign Assistance Programs Washington : U. S. Govt. Print. Off., 1957.

 

글쓴이 김평선은... 

제주4.3유족으로 정치학을 전공하고 제주4.3에서 서북청년단의 폭력행위 동기를, 미군정의 제주도제 실시 사례에서 영토와 권력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시야를 넓혀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운영되어 온 과정을 정치철학, 권한 이양과 분권화 등 국가 운영을 위한 기술(statecraft)를 중심으로 공부해 오면서, 국가를 ‘권력과 지배’, 그리고 ‘자유’ 관점에서 탐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