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12) 가파도의 겨울, 새 꿈을 노래하는 보리 새싹

2025-01-21     배공순

섬 속의 섬 가파도에 오른다. 1월의 가파도는 푸른 빛이 돈다. 머지않아 제주 바람에 굼실대는 군무를 준비하는지, 한 뼘 가까이 자란 보리 새싹이 검은 땅을 싱그러운 푸름으로 채색 중이다. 어린싹이 주는 풋풋함이 짙푸른 겨울 바다처럼 상큼하다.

마을로 들어서니 제법 크다, 공방도 있고 특이한 카페와 포토존이 있어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파도 이야기를 벽화로 그려놓은 길은 내용도, 그림도 보는 재미가 있어 좋다. 내내 무인도였던 가파도는 영조 재위 때인 1751년에야 나라에서 운영하는 목장을 만들면서 마을이 생겼단다.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 삼백 년도 안 된다니, 나는 가파도를 새싹 같은 섬이라 부르고 싶다.

가파도 보리밭이 어린 시절로 나를 이끌었다. 내가 자란 동네는 초겨울이면 보리밭에 에워싸이곤 했다. 논두렁 밭두렁은 마을 앞에서부터 범상찮은 추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세모와 길쭉한 원형과 구불거리는 별별 네모들이 굽이치다가 소나무 동산이라도 만나면 겹겹이 초승달을 그렸다. 그리고는 저마다 싱그러운 푸름으로 그 안을 그득하게 채워놓곤 했다.

여린 싹이 돋을 즈음 엄마는 치맛자락을 추켜 올리며 보리밭으로 가신다. 고랑에 앉았다 일어서시면 바구니에는 새싹이 소복하게 담긴다. 청신한 풋내를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가신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보리싹 된장국을 보글보글 끓이신다. 쌀뜨물을 받아 장독에서 퍼 온 묵은 된장을 풀고 멸치 몇 마리 넣었을 뿐인데, 그 된장국은 새싹 향이 도는 구수한 별미였다. 몇 번을 끓여봐도 그 맛을 흉내 내기 쉽지 않지만, 올해도 보릿국을 끓이며 엄마 냄새를 그리워한다.

보리싹이 자라기를 고대하던 오빠들은 이 무렵 어서 떡을 해내라며 발싸심한다. 시루에 삶은 팥과 찹쌀가루, 보리 새싹과 말려둔 주황빛 호박고지를 켜켜이 올려 찌는 ‘보리 새싹 호박 찰떡’은 엄마만의 명품 떡인 까닭이다.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니 색깔도 예쁘려니와 어우러진 맛이 좋아서 떡 찌는 시루 앞에 옹기종기 모여 기다리곤 했으니, 서너 번 그 떡을 쪄내고 나서야 설날을 맞이하곤 했다.

이젠 ‘빙삭이 웃으멍 꼬닥고닥’ 걸을 차례, 찬찬히 섬의 향기를 담뿍 느껴 볼 참이다. 마을과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 사이를 걷노라니 바다 건너 산방산 뒤로 수묵화인 듯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 어디에서나 웬만하면 보이는 한라산이지만, 섬에 서서 멀찌감치 바라보는 느낌은 색다르다. 제주를, 한반도를 지켜주는 영산인지라 한라산이 보이면 수호신이 곁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듬직하고 평온해진다.

네모난 돌담 안의 ‘상동 우물’을 들여다본다. 주민들이 직접 팠다는 우물 덕에 제주 유인도 중 유일하게 물 걱정이 없다는 가파도. 식수가 부족한 섬에서 더없이 소중한 물이었을 테니 그야말로 생명수가 아닌가. 우물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함부로 바위 위에 올라가거나 걸터앉으면 거센 바람을 일으킨다는 큰 왕돌, ‘보름바위’와도 눈을 맞춘다. 검은 돌과 소라껍데기로 장식한 마을 담장에서 주인장의 바지런한 손길을 느끼며 모퉁이를 돌아서자, 바람을 피해 엎드린 야생화가 무덕무덕 피어 복스럽다. ‘놀멍 쉬멍’ 가다 보니 배꼽시계가 울린다.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원조 해물 짜장 짬뽕집으로 들어선다. 싱싱한 꽃게와 홍합에 뿔소라, 싱싱한 해조류까지 푸짐하게 내어주는 해물짬뽕은 보기만 해도 가파도 바다 향에 배가 부르다.

얼마를 걸었을까. 우북한 백년초에 눈길을 앗겼다가 바닷가 화산 돌을 향해 파도를 밀어 올리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본다.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가 보인다. 파도에 밀려 잠겨버릴 것 같은데도, 마라도는 홀로 아무렇지 않다. 기름하게 엎드린 기차 같은 실루엣이 단조로운 수평선에 재미를 더한다. 문득 이곳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형제섬에 사이좋은 형제가 살았는데 아우가 형편이 어려워 형에게 돈을 꾸었단다. 이를 갚지 못해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던 동생에게 형이 말하기를 갚아도 되고 말아도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가파도, 마라도라는 훈훈한 이야기 말이다.

그에 보탤 이야기는, 1653년 네덜란드의 선박이 표류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곳이 가파도라는 것. 가파도 해역은 거센 기류와 조류가 부딪쳐 나가는 수역이어서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는 외항선들의 표류와 파선이 잦았다. 그 배를 이끌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선장은 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뒤 『하멜표류기』를 썼는데 〈하란선 제주도 난판기〉와 〈조선왕국기〉로 구성된 책이다. 난파 경위와 그들이 겪은 체험과 감상, 일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살며 경험한 조선의 지리, 풍토, 교육, 종교, 형법 제도 등 다양한 기록을 담았다. 그로 인해 은둔의 나라 조선이 처음으로, 비교적 정확히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멜은 산 설고 물 설은 낯선 땅에 억류되어 사는 동안 온갖 풍상을 견뎌냈다. 그런 중에도 이채로운 이국에서의 삶을 글로 남긴 덕에 당시 조선의 모습과 풍속들이 하멜의 이름과 더불어 면면히 살아있는 것. 이렇듯, 삶의 과정에서 감내하기 힘든, 예기치 못한 고난이 의외의 결실로 이어짐을 간간이 본다. 정도전이 9년간의 유배와 낭인 생활에서 체득한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건국의 초석을 놓았고, 정약용 또한 18년의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 가운데 정치, 행정, 경제 분야 등의 방대한 저서를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피할 길 없는 모진 순간과 살아가는 과정의 숱한 선택이 선한 결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 매 순간 일희일비할 일이 아님을 한줄기 볕뉘를 쏘인 듯 새삼 되새긴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꼬닥꼬닥’ 걷다 보니 보리밭길로 들어선다. 청보리가 어느덧 자라 푸른 파도처럼 누웠다 일어서는 유려한 풍경을 상상한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이 부르는 소리 있~어~어 나를 멈~춘다.” 시원찮은 목청을 돋우어 부른 가곡이 새싹 위로 흐른다. 푸른 보리밭이 소녀적 감성을 건드린 모양이다, 그 시절 부푼 꿈을 꾸던 소녀는 간 곳이 없지만, 심안의 푸르름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뜨거운 커피잔을 손으로 감싸들고 섬에서 가장 높은 곳, ‘소망 전망대’에 선다. 가파도를 에워싸고 들썩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소망한다. 포도송이 같은 모든 이의 꿈이 알알이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이 땅이 평화롭기를. 찬 바람에 시달려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보리 새싹처럼, 새 꿈은 자라고 농익어 이윽고 황금빛 이삭으로 여물어갈 테니…,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가오리 닮은 가파도=사진 배공순 가파도 보리밭=사진 배공순

키 작은 섬 너머 산방산=사진 배공순

벽화가 있는 마을길=사진 배공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