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름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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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사회에서 이름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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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선의 작은사람 프리즘] 가부장제 사회와 정체성

왼쪽 구석엔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는 듯하고 조금 보이는 액자와 그 아래 소파 서랍장이 보이고 열린 문을 통해 텅 비어 있는 벽, 그 벽의 끝에는 열린 문을 통해 바로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다. 그림 제목은 잊었다. 그의 작품 중 손꼽아 사랑하는 그림인데도 제목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로지 이미지로서만 기억된다. 나만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그림과 숫자와 향기들. 사람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지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잦았던가. 그 아찔한 순간들을 지나오며 지금에 이르러서 나는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기로 했다. 내 몹쓸 기억력은 내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아니 정확히는 암기력이라 해야겠다. 나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저 그림을 거의 매일 바라보며 때로는 환희에 차고 때로는 쓸쓸해하며 다감한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휴대전화 번호를 오랜만에 바꿨다. 나름 최대한 이미지를 조각하여 만들어낸 숫자들인데도 내겐 외우는 데 한참이 걸렸다. 번호를 새로 지정해둬야 할 곳이 많은데 그걸 하다가 포기해 버렸다. 문득 생각나면 인터넷 사이트에 들러 변경하면서 내가 어딜 들렀는지도 잊어버렸다. 그런데도 몇 년 전부터 자꾸만 개명하고 싶어졌다. 내가 내 이름의 낯섦을 이겨낼 수 있을까 사뭇 의심스러우면서도, 그래서 용기가 잘 나지 않으면서도 가끔은 아버지가 지어줘서 내겐 선택의 여지 없이 지금까지 지탱되어온 이 이름으로 상징되는 무언가를 몰아내어 비우고 싶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어린 시절 어른들의 말도 싫었다. 아버지는 이기적이고, 목소리 크고, 매일 화를 내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만난 최초의 어른 남성인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 못 견디게 끔찍했다. 그 말 뒤에 따르는 예쁘다는 칭찬도 모두 거짓 같았다. 화 잘 내고 이기적인 사람은 예뻐도 예쁜 게 아니라는 동화책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배스의 따스한 감수성에 감정이입 하는 사람이었고, 미국 드라마 《말괄량이 삐삐》의 삐삐처럼 당차고 활발하면서 모험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순간에도 언제나 어질게 웃는 사람이지 타인의 작은 잘못에도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당차고 차분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들 앞에서 아비의 위신을 세워주고선 우리가 없을 때 강하게 몰아붙여서 아버지를 꺾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헌신적이고 따뜻해서 배스 같지만 삶을 끌어가는 당차고 강하며 모험가 기질은 삐삐 같은 사람이었다. 눈을 보면 반짝이는 빛 알갱이들이 들어간 것처럼 빛나면서도 미소는 온화했다. 지나친 결벽증으로 자신을 몰고 가더라도 타인에게는 어질었다. 나는 어머니처럼 되고 싶었다. 지혜롭고 어질고 따스한 어머니가 내 어머니라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면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아버지가 강압적으로 지정하고 하는 수 없이 가부장적 권위를 따랐을 어머니는, 내가 나 스스로 이름을 지정하고 달리 불리기 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뻐할까? 그런데도 오랜 세월 불렸고 불러오면서 내게 쏟았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섭섭하고 슬플까? 아니면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네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상관없이 네 길을 가라고 할까?

그런데 내 정체성을 이루는 것에 이름은 포함될까? 이름도 제목도 못 외우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새삼, 이토록 이름에 집착하는 걸까.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결정적인 사건 때문일까. 세상에 없어진 존재, 그러나 기억 속에 남아 여전히 아프고 그리운 상처로 되살아나는 존재를 이제는 영원히, 죽음의 영원처럼 보내주고 싶기 때문일까.

다시 호퍼의 그림을 본다. 컴퓨터 바탕 화면에 배경으로 지정해 놓아 컴퓨터를 켜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그림, 여전히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그림. 굳이 찾아보지 않으며 바라보고 설레는 마음을 관조하는 것은 내 이름의 이름 지음과 다르지 않은 이유일 터이다.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는 것보다 결정적으로 내 안을 파고들고 타인의 입술에 담길 그 이름을 고민하는 것은, ‘나’라고 불릴 그 표층적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일부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새로운 내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 환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과 달리 세상을 살아내면서 일부가 된 나만의 결정체를 표면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하에서 바뀔 수 없었던 수많은 이름들, 정체성들, 다른 몸들을 생각한다. 부모님 세대와 달라서 어쩔 수 없이 서로 반목했던 세월이 이제는 부디 따스하게 서로를 부르며 녹아들 수 있기를 반란다. <한정선 / 웹매거진 멍Mun 작가>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정선 / 제주장애인인권포럼ⓒ헤드라인제주
▲한정선 웹매거진_멍Mung 작가 ⓒ헤드라인제주

'작은 사람'이란 사회적약자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 차별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든 여성, 노인, 아동, 청소년, 빈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우리나라에서 비장애 성인 남성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구조적 차별과 배제의 현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하의 남성은 '맨박스'로 괴롭고 여성은 '여성혐오'로 고통을 받습니다. 빈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침범하여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공장식 축산은 살아 있는 생명을 사물화하고 나아가 단일 경작 단일 재배 등을 통해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적약자의 소수자성이 교차될수록 더욱 삶이 지난해지고 그 개별화된 고통의 강도는 커집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제가 겪고 바라본 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은 사람 프리즘'의 글은 <웹매거진_멍Mung>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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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재홍 2021-07-06 21:14:27 | 183.***.***.213
한 편의 문학 수필 같은 글이네요! 한 글자 한 글자 따라가며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김명환 2021-07-06 17:14:10 | 36.***.***.254
그러고 보면 우린 태어나면서 내 본질보다가 나를 규정짓는, 이름 따위의 포장에 의해 규정되는 듯하네요. 그래서 마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는 듯한 착각에 길들여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