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당시 처형당한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 이 사건의 진실은?
상태바
4.3당시 처형당한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 이 사건의 진실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제주신보 '삐라 인쇄사건' 조명
고영철 교수 "김호진 편집국장, 우리나라 첫 언론인 희생자"
31일 열린 제주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31일 열린 제주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제주4.3 당시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신보 제2대 김호진 편집국장은 누구이며, 당시 '삐라 인쇄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31일 오후 4·3평화공원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사단법인 제주언론학회(회장 최낙진)와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 주최 제주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4․3과 미디어'에서는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개혁제주시민포럼 대표)가 김호진 편집국장의 생애 및 당시 사건의 실체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김호진 편집국장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8년 10월쯤, 제주 칠성로 소재 제주신보에서 동료들과 함께 무장대 지휘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인쇄해준 혐의로 계엄당국에 체포돼 처형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 교수는 "김 편집국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 언론사상 첫 번째로 희생당한 언론인"이라며 "그는 이승만 정부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4.3의 제물로 사라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가 무슨 죄로 어떻게 처형당했는지를 알아보기 우해, 1945년 8월15일부터 1949년 3월까지의 국내 20개 중앙지가 보도한 4.3사건 관련 기사들을 분석해 본 결과, 이에 관한 기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각종 문헌조사를 한 결과 김호진은 조수인.정기준.고봉효 등과 함께 1945년 11월 중순경 남문로에 있는 한 인쇄소에서 '백록일보'를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1회 발간을 끝으로 제주신보(당시 제주민보)에 흡수되는 형식으로 통합됐다"고 설명했다.

또 "통합당시 백록일보의 창간멤버들은 '제주민보'로 자리를 옮기는데, 1946년 1월 제주민보에서 쫓겨난 김호진은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기용될 때까지 '독립신보' 기자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독립신보는 1946년 5월 1일 서울 을지로 1가에서 창간한 일간신문이다. 

고 교수는 "독립신보에 들어간 후 김호진은 1947년 7월 30일 '조국은 위기에 직면 : 인민이여 총궐기하여 반동과 용감히 싸우자' 제하의 기사로 인해 경무부 수사국에 의해 검거됐고, 구속 17일 만인 8월 23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고 말했다. 또 "석방된 후4일만에 신문사를 그만 둔 것으로 확인됐다"며 그 근거로 '사회부차장 김호진 의원면직' 사령이 게재된 점을 제시했다.

이어 "그러나 1948년 봄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임명되기 까지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게 거의 없고, 각종 문헌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면서 그에 대한 생애 연구가 쉽지 않았음을 피력했다.

또 "그는 1920년 서귀포시에서 노부부의 독자로 태어났고,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도, 그에 관한 인적사항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가족은 누구인지, 그에 대해 증언을 해줄 친척들은 있는지, 4.3희생자로 정식 신고는 된 것인지 등 확인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일명 '삐라 인쇄' 사건과 관련해서도, "각종 문헌조사를 한 결과 유인물의 명칭과 내용, 인쇄시기와 살포시기에 대한 내용은 일정하지 않고,  삐라의 살포 배경 및 이유 등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또 "김호진의 처형 장소 등에 대해서도 문헌마다 상이한 점이 있는데, 이는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자료의 추적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확인된 각종 문헌의 내용 및 엇갈리는 주장들에 대해 상세하게 제시했다.  

고 교수는 "언론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커튼 뒤에 거려진 진실을 알리는 것"이라며 "이러한 임무를 어느 정도 잘 수행하고 있는지 각 언론은 자신을 점검하며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윤택 제주국제대학교 스마트미디어학과 교수의 사회로 이어진 토론에서는 '반론'도 적지 않게 제기됐다.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은 "역사에 관한 글은 사료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하고 용어 하나도 엄격히 사용해야 한다. 역사서술의 엄밀성은 언제나 강조돼야 한다"며 주제발표에서 제기됐던 다양한 의문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발제자는 여순사건 직후에 이덕구 명의로 발표됐다는 유인물의 제목과 내용이 왜 책자마다 제각각이며, 삐라 제작 및 살포시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등 여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전제, "그러나 그런 혼선이 빚어진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나온 4.3관련 책자의 저자 중에서 아무도 그 삐라를 실제로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 "발제자는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이 이전에 독립신보 기자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며 "그러나 독립신보 기자 김호진과 제주신보 기자 김호진은 한자도 다른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허호준 한겨레 선임기자는 "이번 발표문은 각종 사료와 자료, 인터뷰 등을 동원해 입체적으로 분석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점이 돋보인다"고 평가한 후, 고 교수가 '물음표'를 던진 여러 질문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허 선임기자는 고 교수가 당시 김호준 편집국장의 처형에 대해 언론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당시 국방부 사전 검열의 보도지침으로 인해 수많은 죽음이 보도되지 않았고, 수십명을 사살했다는 기사가 1, 2단에 불과한 기사들도 있었던 점 등을 보면 전혀 보도하지 않은 점들은 그렇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4.3당시 언론은 없었다. 언론이 사라진 제주도에서는 군.경, 우익단체의 반인륜적 행위가 곳곳에서 자행됐지만 어떠한 진실도 섬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다"면서 "1960~1970년대 취재가 이뤄졌더라면 4.3의 진실은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고 교수가 한 증언자의 내용에 대한 2개 언론의 보도내용이 일부 다른 점을 지적한 것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이 기사를 쓴 당시 기자를 만나 취재 경위를 들은 결과 직접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면서 "양쪽 신문 모두 동일 인물을 직접 인터뷰한 점에 비춰 수십년전의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계춘 전 제주매일 주필은"김호진 편집국장이 인쇄해 주었다는 유인물의 종류는 예상외로 매우 다양했다"면서 이덕구 명의의 일명 '삐라'에 대해 언급한 뒤, "앞으로 적극 규명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 제1 세션에서는 이문교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전 언론인)이 '제주지역 방송의 4·3프로그램 현황 분석'에 대해 발표했다. 제2 세션에서는 정용복 박사가 '유튜브는 어떻게 제주4·3의 기억을 불러오는가?'를 주제로 발제했다. <헤드라인제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수정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기억과 기록 2020-08-02 09:22:25 | 119.***.***.32
기억을 더듬는 다는 것은 그역시 한 개인의 역사에 비춰본 수많은 증거중 하나이지만, 객관성 담보는 약할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기억도 중요하나 기록의 중요함을 다시금 일깨우게 하는 사례로 보입니다. 어느쪽도 치우치지 않는 진실 그대로의 사실 보도. 이런 노력들이 많이 시도되길 기대해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