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약속에도, 기재부 '예산 타령'...'부처 합의'도 가짜뉴스?
국가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4.3피해자에 대한 배.보상과 불법군사재판 무효화 등을 담은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의 처리가 결국 불발됐다.
20대 국회의 임기종료(5월 29일)와 동시에 4.3특별법 개정안은 자동폐기될 공산이 커졌다.
오는 20일 마지막 임시회 본회의를 앞두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는 커녕, 법안심사 소위원회 단계에서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20대 국회 처리는 무산된 것이다.
72년의 한(恨)을 풀어줄 단초가 될 4.3특별법 개정 시도는, 오랜 세월 기다림의 보람도 없이 결국 무위로 끝났다. 참으로 실망스럽고 허탈하기 그지없다.
물론 20대 국회에서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예상됐던 일이었다. 시간적인 촉박함이 있었고, 야당과 정부부처 설득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치권의 의지가 약했다. 4.3특별법 개정법률안은 2017년 12월 19일 국회에 처음 제출된 것을 비롯해 총 5건이 발의됐으나, 심사는 2018년 9월 11일과 2019년 4월 1일 고작 두차례에 불과했다. 지난 12일 열린 행안위 법안심사소위의 4.3특별법 심사는 1년 여만에 재개된 3번째 심사였다.
그럼에도 이번 마지막 임시회의 3번째 심사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4.3특별법 개정 당위성에 대한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 과정에서 정치권은 한 목소리로 4.3특별법의 조속한 개정을 약속했다. 보수성향의 미래통합당도 '4.3의 완전한 해결'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미래통합당의 전향적 입장은 의미있는 변화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3일 제72주기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해 "더딘 발걸음에 대통령으로서 마음이 무겁다"면서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생존해 있을 때 실질적인 배상과 보상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며 국회에 4.3특별법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했다.
각 정당의 약속에 이어, 문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표명으로 4.3특별법 개정안을 처리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모두 갖춰진 셈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희소식도 전해졌다.
총 1조800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피해자 배.보상액과 관련해 기획재정부가 난색을 표해 왔는데, 정부 부처간 합의가 이뤄졌다는 내용이다.
법안심사소위 회의를 하루 앞둔 지난 11일 더불어민주당 강창일.오영훈.위성곤 국회의원과 송재호 국회의원 당선인은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래통합당에 4.3특별법 개정안 처리에 협조해줄 것을 촉구하면서, 배.보상 문제에 대한 정부 부처간 합의가 이뤄졌음을 밝혔다.
이들 의원들은 "(야당에서는) 법안소위에서 논의가 2회 있었으나 정부부처와의 합의문제 등을 이유로 해 그간 진전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들을 해왔다"면서 "하지만 이제 모든 장애물이 제거됐다. 야당이 반대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은 이날 논평을 내고 '합의'를 기정사실화 했다. 제주도당은 "미래통합당이 지속적으로 핑계를 대왔던 행정안전부와 기획재정부의 합의도 이뤄졌음이 확인되는 등 4·3특별법 개정안 처리에 대한 민주당, 정부, 청와대의 입장과 의지는 확고하다"면서 "이제 미래통합당이 약속을 지킬 차례이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의 주장은 '정부 부처간 합의'가 이뤄졌고,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미래통합당의 결단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2일 법안심사소위 회의에서 나온 내용은 전혀 달랐다. 정부 장.차관들이 모여서 합의를 봤다는 내용은 진실성에 문제가 있었다.
당초 알려졌던 것과 달리 정부 부처 간의 합의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회의에서 행안부는 배.보상 다른 과거사 사건과의 형평성과 재정 여건 등을 종합 검토해 입법 정책적 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기재부는 막대한 재원 등을 감안해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이들 부처는 구체적으로 문구를 합의해 국회에 제출한 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협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같이 했으나 구체적으로 합의한 바는 없다는 설명이다.
결국 제주출신 의원들이 밝힌 "모든 장애물이 제거"나,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이 논평을 통해 적시한 "합의가 이뤄졌음을 확인"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상 '합의가 이뤄졌다'는 내용 자체가 '가짜뉴스'였던 것이다.
정부 부처간 합의 소식은 지난 27일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진영 행안부 장관의 "합의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구윤철 기재부 제2차관의 "문구를 합의해 국회에 드린 것으로 안다"는 발언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추가적 사실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김칫국'부터 마신 격이 됐다.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3특별법 개정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정부였던 것이다. 문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및 약속에도 아랑곳없이 기재부는 여전히 '예산 타령'을 하고 있고, 정부 부처간 엇박자는 여전했다.
법안심사소위 회의 직전 눈물로 호소했던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은 14일 도의회 4.3특위 간담회에서 정치권과 정부를 겨냥해 분통을 터뜨렸다. "4월 27일 회의내용(정부 당국자의 합의 발언)은 하나의 '쇼'이고, 진실된 마음의 소통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4.3특별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된 후, 정치권의 공식적 논평이나 성명 하나 없다는 것이다. '정부 합의' 해프닝과 관련해 정부당국에 대한 따끔하고 단호한 질책과 비판도 없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도 마찬가지다. 20대 국회 처리무산에 대한 분명한 상황정리도 하지 않은채, 어물쩍 화두를 '21대 국회'로 전환시키고 있다. 기재부의 비협조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듯하다.
물론 21대 국회에서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지극히 옳고,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책임을 묻자는 것이 아니다. 향후 대응 방향을 올곧게 잡아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실패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전제돼야 한다. 어물쩍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이다. <헤드라인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