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소용돌이'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처형 당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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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소용돌이'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처형 당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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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신문의 날 특집]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생애 (4) 4·3의 제물로 사라지다

그렇다면, 제주신보사에서 제주도 인민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인쇄되어 살포되었다는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 김호진 편집국장이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인쇄해 주었기 때문에 처형당했다는 기록을 맨 처음 남긴 사람은 김봉현과 김민주(金奉鉉·金民柱 共編, 1963,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일본 대판: 文友社)다. 그 후 많은 연구자들이 의심없이 그들의 주장과 기록을 베끼고 있다. 우선 그들이 서술한 주요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전략> 이에 따라 濟州島 人民遊擊隊는 총책임자 이덕구 명의로써 동년 10월 24일 괴뢰정부에 대한 선전포고문(宣戰布告文)과 일체의 토벌군과 통치기관들에게 “호소문”을 광포하였다.

이들의 문건은 당시 제주신문(註: 당시 명칭은 제주신보임)의 주필이었던 김호진을 비롯한 3명이 내일 없는 목숨을 내걸고 인쇄하였다. 이것은 美帝와 이승만(李承晩) 역도들에 대한 전체 도민(島民)들의 가슴에 쌓이고 또 쌓인 적년(積年)의 울분과 원한이 하나로 집중된 화산과 같은 기세가 놈들의 권토중래(捲土重來)에 대한 은인자중(隱忍自重)의 폭발인 것이었다. 즉, 무권리와 인간 생지옥에서 헤어나서 삶의 광명을 찾으려는 30만 도민의 절실한 의사와 열망의 집중표현이었다. <국방군과 경찰원들에게>의 “호소문”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장병과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를 잘 살피라!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 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총뿌리란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마라!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 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濟州島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에서 쫓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악당을 타도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뿌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은 인민의 편으로 넘어가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를 지켜주는 빨찌산들과 함께 싸우라 !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는 자리를 차지하라.

<……중략> 또한 <선전 포고문>을 인쇄한 김호진 이하 7명은 유격대를 따라 입산하던 도중 동광양(東廣壤, 속칭 박성내)에서 살인귀들에게 체포되어 야만적인 테러를 받아 살해(10월 24일)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하여 버렸기 때문에 나중에는 뼈만 남고 노두(路頭)에서 돌멩이와 함께 데굴데굴 구르고 있더라고 한다(김봉현·김민주, 1963, 171쪽).

김민주는 앞의 내용을 그의 저서 <濟州島血の歷史-<4·3> 武裝鬪爭の記錄, 1978>에서 다음과 같이 보완하여 기록하고 있다(제1출처: 김민주, 1977, <제주도 피의 역사> ; 제2출처: 노민영 엮음, 1988. <잠들지 않은 남도-제주도 4·3 항쟁의 기록>, 79-268쪽).

<…전략> 이와 같이 조직을 재편하고 전투태세를 확립하자, 1948년 10월 24일 제주도 인민유격대 대장 이덕구 명의로 이승만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토벌대와 도민에게 호소문을 보내어 제주도 민중의 단호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이들 문서는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金昊辰) 및 공무국장, 차장 등 3인이 죽을 각오로 비밀리에 인쇄한 것으로, 그들은 그 후 그것이 발간되어 송요찬(宋堯讚)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 호소문은 미군정(米軍政)과 李정권의 학정에 대한 30만 도민의 가슴에 쌓여진 분노가 응결된 것이며, 거기에는 공포에 전율하며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전도민의 절실한 요구와 원망이 담겨있다.

국방군장병과 경찰관에게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호소하였다(노민영, 1988, 207쪽).

친애하는 국방군 장병과 경찰관 여러분! 총구를 보십시오.

그 총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그 총은 우리의 고혈을 쥐어짜낸 세금으로 산 것입니다.

영웅적인 항쟁에 떨쳐 일어선 여러분의 부모, 형제, 자매들에게 그 총구를 돌려서 안 됩니다. 소중한 총과 탄환을 동포를 향해 함부로 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와 여러분들을 지켜주어야 할 그 총을 싸우고 있는 인민들에게 돌려주십시오.

모든 도민은 당신들을 마음으로부터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귀한 피를 보람 없이 흘리지 않도록!

미국 침략자를 조국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도!

매국노 이승만 도당을 타도하기 위해서도!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도!

여러분들은 총구를 놈들에게 향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미국군과 앞잡이 권력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도민의 편에 서주십시오.

우리나라, 우리가족, 우리부모, 우리형제를 지켜줄 항쟁의 전열에 함께 하십시오.

친애하는 여러분!

언제 어떠한 때에도 인민의 이익을 지키는 인민의 군대가 되어 주십시오!

(註: 이 호소문은 전자의 것에 비해 글자 수 등이 많아졌다. 그 이유는 호소문의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고, 제3자 누군가가 전해준 내용들을 토대로 기록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생각된다.)

미국인 존 메릴(John Merrill, 1980)은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2.)에서 이덕구의 선전포고문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전략> 제주도에 미친 여수 반란의 즉각적인 영향은 게릴라들을 크게 격려했다는 것이다. 반란 4일 후, 제주도 남로당(SKLP)의 군사위원회 회원 이덕구는 정부에 전쟁을 선포했다. 남로당에 의해 발행된 제주신문(the Cheju Press)의 비밀호에 실린 성명은 제주의 군인들에게 14연대의 지시를 따르고, 게릴라에 합류하라고 호소했다.

The immediate effect of the Yosu rebellion on Cheju-do, however, was to greatly encourage the guerrillas. Four days after its outbreak, Yi ToK-Ku, a member of the SKLP’s military committee on the island, issued a declaration of war on the government. The statement, which appeared in a clandestine issue of the Cheju Press putout by the SKLP, appealed to the island’s soldiers to follow the example of the Fourteenth Regiment and join the guerrillas: (John Merrill, 1980. p.182)

존 메릴은 아래의 내용을 선전포고문이라고 했지만, 확인 결과, 이는 토벌대에 보내는 호소문으로 밝혀졌다.

“친애하는 군인, 경찰관 여러분!

여러분이 들고 있는 총이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총들은 우리의 세금으로 산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를 쏘지 마십시오. 그들을 보호하십시오. 여러분의 무기를 진정한 주인에게 돌려 주십시오.

제주도 인민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동포를 희생시키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제국주의자와 그 하수인 이승만에 대항해 싸웁시다!

여러분은 인민의 편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의 나라와 가정과 부모형제를 지키는 게릴라와 함께 싸웁시다. 여러분의 애국심과 명예에 호소합니다(노영민, 1988, 58쪽/ 註: 존 메릴은 이 내용을 김봉현의 저서 <제주도 역사지>(일본: 오오사카 1960) 166페이지에서 재인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덕구 명의의 대정부 선전포고문의 내용을 책자에 처음 기록한 사람은 문국주(文國柱)다. 문국주는 자신의 저서 <朝鮮社會主義運動史 事典>(1981, 동경: 評論社, 제주도의 4·3 투쟁: 고문승, 제주사람들의 설움, 410-411쪽)에서 선전포고문의 살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략>

이와 같이 험악한 상황 하에서 남로당원(南勞黨員)들은 그해 (1948년) 8월 25일에 북조선에서 실시하게 된 조선최고인민회의(朝鮮最高人民會議) 의원선거의 임무를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남조선인민대표자인 대의원을 선출하는 지하 간접선거 결과, 안요겸(安堯儉, 별명 安世勳), 강규찬(姜圭讚), 김달삼(金達三, 본명 李承珍), 고진희(高珍姬) 등이 선출되어 북조선으로 갔다. 그 후 더욱 엄격해진 경비태세하의 제주시내 20수개소의 직장세포가 건재하고 있어서, 인민유격대는 다음과 같은 포고문 약3,000매를 시내의 동서남북의 요소에 산포(散布)하였다.

잔인(殘忍)하기 이를 데 없는 경관들이여!

미제국주의(米帝國主義)와 이승만(李承晩) 개(犬)들이여!

너희들은 무고(無辜)한 도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虐殺)하고 있다.

천인(天人)도 용서할 수 없는 만행(蠻行)을 일편의 주저함도 없이 범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너희들의 극악비도(極惡非道)한 악사(惡事)를 동족으로서 부끄럽지만 참고 견디어 왔지만, 은인자중(隱忍自重)도 이제는 한도에 달하였다.

인민의 원한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너희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가까운 시일내 권토중래하기로 결정하였다. 인민사령관 이덕구(人民司令官 李德九)

<…중략> 그러나 인민군이 전시 하의 명령이라고 해서 인쇄를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주신문>(註 당시의 명칭은 제주신보 임)의 주필이었던 남로당원인 김호진(金昊震) 등이 죽음을 결의하고 포고문을 인쇄해서 그것을 각 세포(註: 조직원)에 배포하여 살포했던 것이다. 그 즉시 김호진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산쪽으로 탈출하는 도중에 추격당하여 독자(一人息子)인 그는 노부모를 걱정할 틈도 없이 이 젊은 유능한 청년의 일생은 끝나고 말았다(고문승, 410∼411쪽).

전설같은 일화에 따르면 이와 같이 그는 편집국장으로 발령을 받은 지 약 6-7개월만에, 인민무장대 총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문건을 인쇄해 준 혐의로 군경토벌당국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공식적 기록은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기록과 주장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차후에 반드시 규명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역사는 결코 한 번에 모두 쓰여질 수가 없다. 역사의 연구는 계속적인 과정으로서 새로운 증거사료, 새로운 통찰, 새로운 분석을 통하여 과거의 문제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작업이다.

따라서 아무리 역사가가 충분한 사료를 바탕으로 추론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역사를 쓰는 당시의 그 자신의 판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것은 새로운 사료와 새로운 통찰에 의하여 수정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연구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의 사실이 내일에는 허구(fictions)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차배근, 370쪽) 

* 제64회 신문의 날에 즈음해 기획된 이 글은 총 4회에 걸쳐 연재됐습니다. <고영철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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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2020-04-30 15:43:44 | 182.***.***.228
고영철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님
잘 쓰셨습니다.
역사 기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실제로 있었던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