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독립신보 기자시절 김호진, 어떤 기사를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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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독립신보 기자시절 김호진, 어떤 기사를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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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신문의 날 특집]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생애 (2) 독립신보 기자 시절
"조국은 위기에 직면: 인민이여 총궐기" 기사로 경찰에 구속

독립신보는 1946년 5월 1일 서울 을지로 1가에서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창간된 일간신문이다. 사장은 장순각(張洵覺), 주필은 고경흠(高景欽), 편집국장은 서광재(徐光齋)였다. 창간멤버이면서 논설위원과 주필을 역임하였던 고경흠은 제주출신이다. 그는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안광천 · 한위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사회주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한겨레 신문사,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1992, 79쪽).

이 신문에 제주관련 뉴스가 처음 보도된 것은 1946년 6월 5일자에 실린 “제주도는 명랑한 곳 /러치 장관 시찰 예찬 일석(一席)”이라는 제하의 기사다.

그리고 1947년 3월 18일자 사설에서는 ‘제주 3·1절 사건’을 ‘제주도의 궐기’라는 제목으로 긍정적인 태도로 보도하였고, 1948년 2월 23일 국제연합에서 결의된 남한만의 단독선거안에 대하여는 강렬한 논조로 반대하였다.

그러면 김호진은 언제부터 독립신보사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을까?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화> 자료로 소장되어있는 독립신보를 검색한 결과, 5월 1일 창간호에서부터 25일자 신문까지는 멸실되어 소장된 신문이 없고, 5월 26일자 신문부터 같은 해 12월말까지 발간된 신문의 사령을 확인한 결과, 그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자발령 기록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가 쓴 실명기사가 1946년 12월 18일과 19일자 신문지상에 처음으로 보도된 것이 확인되었다. 그것은 제주도에 대한 기행문 기사였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그는 제주출신 고경흠 논설위원과 함께 독립신보 창간멤버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창간초기인 5월 중에 입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그는 기자로서 어떠한 기사를 쓰고,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일단 8·15해방이후부터 1950년 말까지 신문·잡지·출판·방송·연극·영화 등 우리나라 언론전반에 관한 사항을 수록한 <한국언론연표> 제2집과 제3집에 실린 인명색인을 검색하였다.

조사결과 당시 국내에서 발간되던 여러 신문의 기사들 가운데 그의 실명이 거론된 여러 건의 기사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독립신보 주필 고경흠(高景欽)과 김호진(金虎振)기자가 1947년 7월 30일자 독립신보의 기사로 인하여 경무부수사국에 검거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 중이라는 내용을 다룬 기사들이었다. 이들을 구속시키는 근거가 ‘조국은 위기에 직면’이라는 제목의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祖國은 危機에 直面 / 人民이여 總蹶起하여 反動과 용감히 싸우자

퍼붓는 폭풍우 속에서 우리는 조선인민들의 비장한 결의와 용감함 모습을 보았다. 기아와 폭압과 테로에 비하면 폭우에 몸젔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팟쇼분자들의 발악으로 정부수립을 약속하는 공위(共委)는 위태에 빠지고 조국은 지금 최대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심한 기아와 테로와 폭압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굴치않고 조국을 위하야 힘있게 싸워야 한다. 그러함으로서 공위를 성공시키고 인민이 원하는 우리의 정부를 세우자. 승리는 반드시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안저서 죽느냐 서서 싸워 이기느냐>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있다. 강철같은 단결로써 적(敵)과 용감히 싸워서 승리의 언덕에 돌진하자!

우리는 먼저 무엇을 하여야 될가. 먼저 통일된 정부수립을 방해하며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하고, 공위를 내외로부터 파괴하려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팟쇼를 수괴로 하는 반탁진영을 공위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싸움과 또한 친일파들이 하루 밤사이에 만들어낸 유령단체를 구축(驅逐)하는데 또한 우리는 싸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공위를 안전케 하여 공위를 수호하여야 된다. 또한 우리는 테러 단체의 즉시 해산을 요구하며, 인민을 폭압하는 자를 숙청하고 감옥에서 신음하는 애국자의 석방을 위하야 그것을 요구하고 싸워야 된다. 테러와 폭압과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원흉 반동 두(2)두목을 국외로 추방할 것을 요구하며 싸워야 된다. 조국은 지금 흥망(興亡)에 기로에 섯다. 조국은 지금 용감한 인민들의 총궐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때야말로 쓰러진 선열의 시체를 넘어서 용감히 싸울 시기인 것이다. 그럼으로서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므로서 모든 인민이 편안이 잘 살 수 있는 조국을 건설하자.(독립신보, 1947년 7월 30일 2면, 우측 상단 톱기사)

경무부 수사국이 1947년 8월 6일 ‘위의 기사’가 포고령 제2호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주필 고경흠과 김호진 기자를 구속하자, 독립신보 등은 1947년 8월 8일자 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言論人에 檢擧 旋風/ 본보 高주필, 金기자도 被檢

한때 잠잠하였든 민주언론인에 대한 당국의 눈은 또다시 밝혀지기 시작하여 지난 2일 동업 <우리 신문> 국제일보의 기자가 피검된데 뒤이어 5일에는 해방통신 사장 朴益緖씨가 검거되고, 6일에는 경무부수사국의 소환을 받어 출두한 본보 주필 高景欽과 金虎振 기자가 연달아 검거되어 방금 종로서에 인치되여 취조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7월)30일부 본보 2면에 보도된 <조국은 위기에 직면>이라는 기사가 당국의 ○○○에 저촉된 것으로 보이는데, 당국에서는 이것을 포고령 2호에 위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간제목) 日帝遺物인 신문지법은 이미 撤廢/ 咸 공보국장 談

언론인에 대한 검거 선풍에 대하여 공보국장 咸大勳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립신보 기자를 검속한 이유는 그 보도가 포고령 제2호에 저촉되는 까닭이라고 보인다. 공보부로서는 언론인의 신분보장을 위하여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경무부에도 그 뜻을 진언하겠다. 더욱 日帝시대의 유물인 惡法 신문지법은 이미 철폐된지 오래고, 지금은 이것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만일 경찰에서 이 사실은 몰은다면 공보부장과 사법부장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일반에 주지시키겠다.”

(중간제목) 기자단에서 建議

별항보도와 같이 가장 신성하게 보장되여야 할 민주언론인들이 속속 검거됨에 당하여 중앙청 기자단에서는 7일 긴급 임시 총회를 열고 언론인의 신분보장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경무부장 趙炳玉씨에게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첫째 금일 피검된 언론인 전원을 석방할 것, 둘째 앞으로 기사문제로 언론인을 취체할 때에는 반듯이 불구속으로 할 것 등이 주요한 골자로 되여 있다.

(같은 기사 ➀ 독립신보 47. 8. 8. 2면, ➁ 조선중앙일보 47. 8. 9. 2면, ➂ 세계일보 47. 8. 9. 2면, ➃ 우리신문 47. 8. 8. 2면, ➄ 자유신문 47. 8. 8. 2면, ➅ 국제일보 47. 8. 8. 2면, ➆ 수산경제신문 47. 8. 8. 2면, ➇ 동광신문 47. 8. 9. 2면)

한편, 미군정의 이러한 언론탄압과 관련하여 조선중앙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언론계의 안전보장을 /記者會서 「하」장군에 建議

작금 언론기관에 대한 테러와 언론인의 검거 취체(取締)가 접종하고 있는데 대하야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8월) 25일 하지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제출하고 긴박한 대책을 요망하였다.

경애하는 하지 중장 각하 및 각하의 막료 여러분이 남조선 군정을 위하야 진력하심에 대하여 감사하여 마지않은 바입니다. 금번 조선신문기자회는 근일 혼란이 막심한 남조선언론계의 사정에 대하여 급속한 시정을 요망하게 됨을 유감이라 아니 할 수 없음니다. 건국기 조선에 있어서 언론자유와 언론인의 신체안전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새삼스러히 말할 필요도 없음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년간 누차에 걸쳐 테러와 검속에 의하야 이 언론계의 위기가 남조선에 도래하였던 사정은 그 당시 당시에 일반의 여론으로 지적되었던 바이오.

본 기자회로는 장군 및 군정 관계자에게 그 시정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일 이러한 언론계의 위기가 극심히 다시 남조선에 도래하고 있음에 대하여 이 타개를 위한 장군의 진력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최근 수십일간에 발생한 그 구체적인 실례로는,

➀ 獨立新報의 사장 張洵覺, 주필 高景欽, 기자 金虎振·李信植 등이 검거되고 특히 李信植은 나오는 길로 테러단에게 습격되어 중상을 입었으며, 고경흠은 가옥이 파괴되고 가산을 절취당하였으며,

➁ 光明日報와 國際日報는 기자 金鏡崙· 徐相德 등의 4명이 검거되고, 광명국제일보를 인쇄하는 직공 다수가 공장에서 피검되였으며,

➂ 노력인민은 그 인쇄공장인 태양당(太陽堂)이 테러에 피습되고, 직공· 판매관계자· 가두판매자들이 피검 또는 테러에 피습상해되고, 同社 업무국장 金客(容)南과 사원 李載性이 검거되었으며,

➃ 해방통신은 사장 朴益緖가 피검된 후 송청되였고,

➄ 우리신문은 편집국장 申用雨와 기자 高駿石 등이 피검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공장이 테러의 위협에 의하며 인쇄를 거부하므로 발간불능에 임하고,

➅ 朝鮮中央日報는 정치부장 일낙중(溢樂中)이 피검되었으며,

➆ 萬歲報는 곽하신(郭夏信)외 1명 피검되였으며, 이외에도 이러한 언론계에 대한 박해와 언론인의 구금 취체 등이 그칠 줄 모르는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 광명 국제 노력인민 등의 제(諸)신문도 인쇄불능으로 인하여 발행을 정지하고 있어, 언론자유의 발전 신장을 조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조선의 민주건설을 위한 언론신장을 협력하며 그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시는 각하 및 미군정 전체의 본의가 아닌 줄 암니다. 남조선인민의 언론자유와 의사표시의 자유가 금일같이 위협되고 있는 사태는 일즉이 없었든 일이요, 이 상태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조선의 민주언론계는 총봉쇄에 도달할 것입니다. 언론자유의 발전과 언론인의 신체 안전을 위하여 각하의 시급한 대책을 조선신문기자회는 요망하여 마지아니합니다(조선중앙일보 47.8.26. 2면/ 같은 기사 부산신문 47. 8. 26. 2면).

이와 같이 김호진 기자와 고경흠 주필은 7월 30일자 독립신보 2면에 보도된 <조국은 위기에 직면>이라는 제하의 기사로 1947년 8월 6일 경무부수사국에 의하여 검거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구속 17일만인 8월 23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➀ 민중일보 47. 8. 24. 2면 ➁ 조선중앙일보 47. 8. 24. 2면 ➂ 동아일보 47. 8. 24. 2면 ➃ 부산신문 47. 8. 24. 2면 ➄ 경향신문 47. 8. 24. 3면 ➅ 문화일보 47. 8. 25. 2면 등).

독립신보 사령에 따르면, 그는 이 기사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4일만에 신문사를 그만 둔 것으로 확인되었다(독립신보 辭令 사회부차장 김호진 依願면직, 1947년 8월 27일자). 그가 좌익지의 성격을 띠었던 독립신보의 기자로 활동한 기간은 약 1년 3개월이다.

한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발간한 <제주 4·3사건 자료집>(신문편) (1)과 (2)권에 실린 제주관련기사를 분석해 본 결과, 그가 독립신보 기자로 활동하던 1946년 5월부터 1947년 8월 말까지 총27건의 기사를 다룬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제주4·3 관련 기사를 1건 이상 보도한 14개 신문의 보도 기사수를 비교한 결과 독립신보(27건 중 제주답사 기행문 3건, 사설1건)가 가장 많이 보도하였고, 그 뒤를 이어 서울신문(14건중 기행문 2건), 경향신문(11건), 대동신문(9건), 자유신문(8건중 제주답사 기행문 2건), 동아일보(6건중, 제주현지 답사 기행문 2건), 한성일보(6건), 중외신보(4건),동광신문(4건), 조선일보(3건), 현대일보(2건)등의 순으로 많이 보도하였다. 이외에 문화일보, 대중신보· 중앙신문 등이 각 1건씩 보도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독립신보가 보도한 총 27건 기사가운데 3건은 그의 실명으로 보도된 제주답사 기행문이고 한 개는 3·1사건 관련 사설이었다. 그가 독립신보에 보도된 총 27건의 제주관련 기사를 전부 썼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기사 체와 서술방식으로 보아 한 기자가 쓴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보에 보도된 제주관련 기사의 제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에 보도된 기사

▪제주도는 명랑한 곳 / 러치 장관 시찰 예찬 일석(1946.6.5.)

▪제주도지사에 박경훈(朴景勳)씨 취임(1946. 8. 13.)

▪금년 추곡 수집 계획량 446만석으로 결정 / 각도의 책임수량도 배정 완료 (1946. 10. 18.)

▪제주도 의원도 입의(立議)거부 / 민전 산하에서 활약할 뿐(1946. 12. 15.

▪군사시설 태무 / 제주도의 지브롤터화는 무근 / 본사 김 특파원 발전(發電)(1946. 12. 18)

▪동백꽃 핀 마을을 찾아 / 일제 유린과 연합군 포연 후에 백일홍과 전단의 향기도 높다 / 제주도 기행기(1946. 12. 18)

▪모리배는 여기도 도량 / 경찰은 반동세력을 조장하고 노동자는 공장문 열라고 외친다 / 제주도 기행기 (1946. 12. 19 )

1947년 1월부터 8월 30일까지 보도된 기사

▪3·1운동 민족기념일에 경향 각지서 불상사 속출 / 제주도 등 6지방에 38명 사상 (1947. 3. 4)

▪카스티어 대좌 내도 / 조사에 착수 (1947. 3.13)

▪사설 : 강(姜)감찰청장의 성명에 대하여 (1947. 3.13)

▪제주 전 관공서 총파업의 기세 / 발포 살인한 경관 처단 요구 (1947. 3.14.)

▪제주총파업 확대 / 체신관계 파업으로 통신 두절 / 관청 은행 회사 상점 등 전도 철시 (1947. 3. 16.)

▪제주파업 총사령에 제주도 상공국장 임관호씨(1947. 3. 16.)

▪민전서 제주도에 조사단 파견 (1947. 3. 19.)

▪제주총파업 무조건 취업 / 일부 교원 학생 무조건 취업 거부 / 조경무부장 발표 (1947. 3. 21.)

특히 당시 중앙일간지 가운데 독립신보만 제주3·1절 기념행사 사건을 4월 5일자 신문 2면에 매우 비중있게 보도한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 독립신보 2면에는 총 29건의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14건은 제주3·1사건 관련 기사였다. 그 기사의 제목만 보면 다음과 같다.

▪피흘린 제주도 기록 / 검붉은 피는 아직도 땅에 원망스러이 고여 있다!

▪파업선풍은 일단락 / 한때는 80여 명 경관도 가담

▪ 오영씨도 피검

▪박지사는 해임?

▪의연금 답지

▪이순경은 파면 / 스타우드 군정관 담(談)

▪또 8명이 피탄 중상 / 중문면서 경찰과 민중 충돌로

▪남녀 230명 피검

▪군중은 무저항 / 도립병원 내과과장 김시존씨 담(談)

▪너무도 난폭 / 도립병원 안과과장 김완근씨 담(談)

▪나도 위협을 받았다 / 도립병원장 문종혁씨 담(談)

▪내 아들 무슨 죄 있나 / 피해자 모(母) 장여사 담(談)

▪피탄자는 관중 / 도지사 박경훈씨 담(談)

▪ 병원앞 사건 유감/ 監察廳長 강인수씨 담(談)

이들 기사들 가운데 그가 독립신보의 특파원 자격으로 쓴 기명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독립신보 1946년 12월 18일 <1면기사>

군사시설 태무(殆無) / 제주도의 지브롤터화는 무근 / 본사 김특파원 발전(發電)

【제주도 서비행장에서 본사 특파원 김호진 발】

외국정보는 우리의 제주도를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미국이 군사기지화 한다는 설을 전하고 있어 과거 일제가 침략의 전진기지화 하였듯이 제주도는 또다시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 당지 군당국자는 다음과 같이 이 설을 전적으로 부인하였다.

“제주도를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하고 미국이 요새화 한다는 설이 있으나 이것은 사실무근이다. 일본은 전쟁시대 이 도를 중요시하였는지 모르나 우리는 이 도에 대해서 아무런 의도도 없다.”

일방 이 설은 주민을 전율케 하였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미국이 이 도에 진주 후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나 측량을 한 일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지금 미군이 사용하는 서비행장이 있고 이 외에 전쟁시 소위 해양 폭격의 기지였던 모슬포 비행장과 동비행장의 세 비행장이 있는데 미군이 진주한 후 약간의 병사와 무전대(無電台)를 시설한 이외에는 하등의 시설은 볼 수가 없다.

∎ 독립신보 1946년 12월 18일 <2면 기사>

동백꽃 핀 마을을 찾아 / 일제 유린과 연합군 포연 후에 백일홍과 전단의 향기도 높다 / 제주도 기행기

제주도는 동양의 지브롤터와 같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미국은 이 제주도를 군사기지화 한다는 이러한 용서 못할 소식이 세계에 떠돌아 초점이 되어 있을 이 때 기자는 과거 일제시대에 그 누구보다 더 유린당하였던 ‘운명의 땅’, 이 제주도를 찾아왔다.

명산 한라산은 흰눈에 쌓여 있으나 촌락에는 처녀입술과 같은 빨간 동백꽃이 활짝 피었고 백일홍 전단은 벌써 열매가 열려 고상한 향기를 전도에 뿜고 있다. 배추밭에는 언제나 뽑는지 푸른 배추가 심어있고 조선에 두 곳도 없는 섬 일대의 밀감나무에는 수많은 귤이 익어 있었다. 조선의 최남단 제주도는 일명 풍다(風多), 여다(女多), 석다(石多)라고 한다. 참으로 여자도 많고 돌도 많고 바람도 많다. 이 섬의 기상은 해양적이어서 기후는 온화하나 1년의 3분의 1을 빼놓고는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분다. 그러나 본토에 비교한다면 꿈나라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섬 제주도는 과거 일제시대에는 그 왜놈들의 극악한 구두발길에 짓밟혀 깊은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주둔군 20만 그들은 선량한 섬사람들 잔등이에 야수와 같은 채찍질을 하고 비행장을 만드는 등, 이 섬을 침략의 전진기지화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식량을 빼앗고 소, 양, 돼지 등 먹을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착취하였다. 또 하나 참혹한 것은 연합군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집은 파괴당하고 많은 섬사람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도 소리에 자라난 섬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또다시 소생하여 파괴된 집은 고치고 밭은 갈고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원래가 가난한 섬이고 더군다나 일본 기타지방에 출가하였던 섬사람들 8만이 돌아와 쪼들리던 가난생활은 더 심하여졌으나 섬사람들은 한층 더 일하여 이를 극복하고 있다. 해방 후 한때는 벌집에 모여드는 벌떼같이 중국, 일본 등지로부터 밀항선이 운집하여 중국, 일본 물품이 범람하여 시장이 된 적도 있으나 지금은 당국의 취체로 한 척의 밀항선도 볼 수가 없다. 제주도 여자의 근면성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으나 다른 지방에 비교하면 따뜻하다고도 하나 제주도에서도 지금이 제일 추운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근로정신에 불타는 제주해녀들은 파도치는 바다에 들어가 해초 기타 어류 채취작업을 쉬지 않고 있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이 축출된 후 미군이 들어오자 또다시 이 섬을 군사기지화 한다는 소리에 섬사람들은 두 주먹을 쥐고 일어섰다. “그게 무슨 당치 않은 소리냐?” 이 사실이 유설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으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범의 호령과 같은 파도소리도 제주인민의 침략자에 대한 항거의 소리였다. (계속)【제주도에서 본사특파원 김호진 발】

∎ 독립신보 1946년 12월 19일

모리배는 여기도 도량(跳梁) / 경찰은 반동세력을 조장하고 노동자는 공장문 열라고 외친다 / 제주도 기행기

【제주도에서 본사특파원 김호진 발】 제주도 인민 30만은 지금 역경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모든 공장은 대부분이 움직이지 않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발호하여 이 땅의 민주화를 방해하고 있다. “미군정이 존속하는 한 경찰은 나를 체포치 못할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쌀과 자유를 달라! 이것이 정의의 인민의 부르짖음이 아닐까? 이 땅의 특수한 공장시설을 본다면 작년 6월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일부 파괴당한 무수(無水)알코올공장, 조선에 유일한 통조림을 만드는 관힐(罐詰)공장, 전분(澱粉)공장, 조선의 수요량을 휠씬 초과 생산하는 옥도정기공장, 자개단추공장 등이 있으나 무수알코올공장이 지난 11월 해방 후 처음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을 뿐이고 나머지 제 공장은 좋은 계획은 있으나 기술 부족, 원료난으로 아직까지도 공장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목축부문을 보더라도 과거 왜놈병대들의 착취로 말미암아 소 3만 5,000, 말 3만, 돼지 4만, 면양 150두가 남아 있을 뿐, 일방 어업을 본다면 근해에 고래군이 출몰하고 있어도 자재 부족으로 방관할 수밖에 없고 제주도의 노동자들은 공장문을 열라고 외치고 있다.

이 땅의 유행되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강연회 석상에서 어떤 사람의 강연 중에 “민주건국을 좀 먹는 이승만 김구씨를 타도하자”고 말하자 어떤 청년이 “옳소”하였다 한다. 경찰당국은 이 “옳소”한 청년을 체포하여 그는 8개월의 체형을 받아 방금 복역 중에 있다. “옳소” 한마디에 8개월의 중역은 너무 억울하다고 정의를 사랑하는 이 섬 인민들의 억울하다는 표현이 이 “옳소 8개월”이다. 같은 강연회 석상에서 “매국자 박헌영을 죽이라” 한 데 대하여 역시 “옳소”한 사람은 즉시 경찰계에 등용되어 지금은 간부자리에 앉아있다 한다. 이번 입법의원 선거에 있어서도 이 땅의 인민위원회에서도 제2중추원이라 하여 절대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국의 탄압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삐라 한 장 못 붙였다 한다. 이뿐만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 단체와 애국자들에 대한 탄압을 간과할 수 없다. “쌀과 자유를 달라”, “입법의원을 반대하자” 이런 삐라를 가두도 아니고 인민위원회 사무소 벽에 붙여 놓았다고 여러 사람을 체포하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일제시대의 악질면장을 응징하였다 하여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또 모리배이고 반역자인 면장이 해방 후 또 다시 등장하여 민중들의 원한을 촉발하여 굶주린 군중들은 그 집을 포위하여 쌀을 달라고 절규하자 경관이 출동하여 군중을 향하여 발포, 1명이 즉사하고 수명의 부상자, 64명이 구속되었던 사실, 기타 학교선생들의 이유 근거 없는 체포, 몰수한 쌀을 경찰관계 직원들이 분배했다는 사건, 이외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탄압과 체포, 행정기관의 비행은 유행되었던 것이다. 입법의원 선거에 있어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모두 당선되었다고 인위에서는 입법의원을 분쇄하고 이를 거부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가 인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당선된 것은 제주도 인민들의 현명성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다. 모리배 하나 단속 못하는 경찰이 왜 살자고 애쓰는 인민의 외침을 억압하는가. 듣건대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를 조선의 민주화의 시험장으로 하여 많은 시험을 하고 있다 한다. 만일 정의의 인민의 부르짖음을 무시하고 탄압, 억압을 포기 않는 한 군정의 시험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것은 뻔한 일이다. 30만 제주도 인민은 굳게 단결하여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영웅적 투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절규하고 있다. “조선을 좀먹는 친일파 민족반역자 악질경관을 숙청하라. 쌀과 자유를 달라. 진정한 인민에 대한 탄압을 포기하라.” (끝)【제주도에서 본사 특파원 김호진 발】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 제64회 신문의 날에 즈음해 기획된 이 글은 총 4회에 걸쳐 연재되고 있습니다.  <고영철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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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석자 2020-04-18 08:55:03 | 39.***.***.4
해방직후 미군정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오늘은 혼란의 연속으로 자신의 선택에 불안했던 시대, 목숨걸고 나침반 역할을 자처한 제주출신 김호진 같은 기자가 있었다는데 제주인으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다음 글이 기대되는 아침입니다.

피흘리는 제주도 2020-04-18 19:47:08 | 61.***.***.40
일제치하시대 제주섬을 군사기지화, 그리고 해방후 미군의 야만적 제주 포섭...그래서 제주도를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불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브롤터는 원래 스페인 영토였다고 하는데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300여년을 영국령으로 유지. 주민 구성을 보면 원주민 80%, 영국인 13%, 나머지가 스페인계라고 합니다. 아이러니는 한때 스페인 장군이 이 땅을 되찾으려 육로를 봉쇄하면서 이산가족이 생겼는데 그들 대부분이 스페인으로 되돌아가는 걸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민초라는게 고귀한 이상보다는 때로는 등따시고 배부른것을 좆는 경우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요? 피흘린 4.3후 70여년이 지난 지금 제주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메스컴연구 2020-04-19 14:07:05 | 1.***.***.140
김호진 편집국장의 제주 4.3에 대한 기사들과 그의 노력을 잘 보았습니다.
독립신보 辭令 사회부차장 김호진 依願면직, 1847년 8월 27일자
라고 기사에 적혀 있는데 1847년이 아니라 1947년인데 오타가 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