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축산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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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축산업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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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34) 재배작물 도입의 역사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해 있어 타 지역보다 온난한 기후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목축을 경영하기에 매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제주는 예로부터 방성이 임하는 곳으로 사나운 짐승들이 없어서 소나 말 기르기에 적합한 곳으로 일컬어졌다. 제주도의 토양은 크게 암갈색 비화산회토, 농암갈색 화산회토, 흑색 화산회토, 농암갈색 산악지토 네 가지로 분류되는데, 각 토양마다 물리, 화학적 성질이 다르다.

중산간 초원 지대의 토양은 주로 농암갈색, 또는 흑생화산회 토양으로 이루어져 유효 인산 함량이 매우 낮고, 산성이 강하며 표토가 얕아서 작물 생산에 상당히 불리한 조건으로 목축이 농경보다는 유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제주에서의 가축 사육은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서 발견된 사람과 마(馬) 발자국의 화석으로 미루어 볼 때 조심스럽게 약 2000∼5만년 전으로 추정 할 수 있다. 탐라국 왕세기에 의하면 서기 145년 탐라국 성방왕 때에 중국, 일본 등 물물교류가 이루어져 탐라국의 조공선 및 상선이 토산품인 귤, 감, 탱자, 물소, 양마(良馬) 등을 교역하였고, 백제 무왕 10년(610년)에 탐라에서 준마(駿馬)를 백제에 바치자 백제에서는 이 말을 당나라에 바치니 당왕은 과하마이라고 이름 지었다한다.

그리고 신라는 대형종의 말만 사육되었으나 당나라(714∼741년)왕실에 과하말을 진상되었다는것과 후백제 27년(918년)에 탐라는 공마를 오월(吳越)에 바치고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 등이 있다. 또한 삼성신화에서는 동쪽 바다 벽랑국에서 공주가 온다는 것은 송국리 문화인을 포함한 새로운 이주민들이 제주도로 들어온다는 것이고 고, 양, 부와 혼인하는 것은 토착세력인 3부족과의 연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이주 세력이 가지고 온 송아지, 망아지, 오곡 등은 수렵과 어로 못지 않게 농경과 목축이 생업에 중요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현종 16년(1025)에 목감양마법, 문종 25년(1071)에 섬에 설치한 목장 관리 규정을 제정한 후 문종 27년(1073)부터는 탐라국에서 계속 예물로 말이 진상되어 문·무관에게 하사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탐라국의 명마(名馬)가 공마로 명성을 얻게 되어 고려 원종 14년(1273)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성 일대에서 삼별초군을 평정한 후 이곳에 일본·남송 경략의 군마(軍馬) 공급지로 만들고자 몽고군이 주군하게 되었다.

제주 지역에서는 1276년 몽골이 설치한 탐라목장이 제주 지역 목장의 효시이다. 충렬왕 2년(1276)에 몽골에서 말 160필과 마 전문가들인 목호들이 탐라국에 들어와 현 성산읍 수산리(水山坪) 일대에 몽고식 마목장인 탐라목장을 건설한 것이 제주도 목장의 기원이다. 충렬왕 3년(1277)에 마목장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동·서아막을 설치하였다. 동아막은 수산평에 설치되어 동부지역을 관장케 하고 서아막은 한경면 고산리에 설치되어 서부지역을 관리하였다.

교래리 일대 상잣성(왼쪽), 한라산 중턱의 제주마 방목지.
교래리 일대 상잣성(왼쪽), 한라산 중턱의 제주마 방목지.

조선시대의 마(馬)목장은 세종 11년(1429)년경에 제주출신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 중산간 지역(해발 200~600m)에 해안지역의 촌락(마을)과 경지와의 경계를 돌로 하잣(下場城)을 쌓기 시작하여 성종 24년(1493)이전에 완성되어 이를 10개로 나누어 10소장(목장)이 설치되었고 각 소장의 둘레는 45~60리였다. 잣은 고어(古語)로 성(城)의 뜻이며 제주도의 중산간의 소장경계에 돌들을 길게 쌓은 돌담을 말하며 이를 흔히 잣, 잣성(城)이라고 부른다.

중산간 지대에 잣성을 쌓아 말을 생산했던 십소장과 산마장이 있었다. 그 중 산마장은 침장(針場), 상장(上場), 녹산장(鹿山場)으로 구성되었다. 소를 사육했던 모동장(毛洞場), 천미장(川尾場), 황태장(黃泰場)도 있었다. 제주의 부속 도서 가파도에는 소를 사육했던 별둔장(別屯場)과 말을 사육했던 우도장(牛島場)이 있었다.

한라산 고산지대(산림지대)에 쌓은 것이 상잣(上場城)이고 다른 소장의 계곡이나 산림지대로 흩어져 죽거나 찾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하천을 이용하거나 돌을 쌓았는데 이를 間墻(선잣, 간담)이라고 하며 이것이 각 소장과의 경계이다.

제주계록(1846~1886)에 의하면 마정(馬政)에 당시 잣성을 장(墻, 담장)과 원(垣, 낮은 담)으로 상하 장원 (上下墻垣)을 표시되어 있는 곳으로 교래리에서 한라산 쪽으로 상하잣성을 볼 수 있다. 제주목장은 중앙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 병조 및 사복시 지휘감독아래 전라감찰사-제주목사-감목관(제주판관, 정의 현감, 대정현감 겸임)-마감-군두-목자 등이 계급적으로 배치되어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제주도내 말 사육필수는 태조 7년(1398)에 4414필(牛 1914두), 세종 11~16년(1429~1434)에는 1만 여 필이었으나 죽은 말이 2300여 필이었고 흠이 있고 체구가 작고 추쇄한 말이 3000여 필이 된 것은 수말(牡馬)이 실하지 않은 마정(馬政)이 미진(未盡)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종 27~28년(1445~1446) 9,000여필이 사육되고 있었으나 새끼를 낳은 말이 1,000필, 손실된 것이 2,000필이 된 것은 목양(牧養)에 마음을 쓰지 않은 까닭이며 다른 섬에서는 2만2406필, 唐(당)나라 70여만 필이 사육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숙종28년(1702) 탐라순력도의 점마한 마(馬)는 9,000여 필로 제주도내 국(國)사(私)마는 약 2만여 필이 사육되었다고 추정된다.

제주마는 세공품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바쳐 왔으며 세종 20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중종 7년에 150필, 인조 19년부터는 매년 200필과 산둔마 200필이 더 추가되었다. 조선 중엽까지는 말세공이 계속되었어도 말 사육 필수는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선조 27년(1594)에 정의현 의귀리 김만일(金萬鎰)은 전투마(戰馬) 500필을 국가에 헌납하자 정부는 헌납할 말을 사육할 목장을 10소장 내에 동·서별목장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광해군 12년(1620)에도 500필의 말을 바침으로써 왕으로부터 헌마공신의 호와 숭정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직을 받았으며 효종 9년(1658)에 그의 아들 김대길, 손자 김려가 전마 208필을 다시 국가에 헌마하자 국왕은 동·서별목장을 산마장(山馬場)으로 만들어 목양케 하였으며 김대길을 산장 감목관에 임명하고 그 자손으로 하여 세습케 하여 그 뒤 218년간 경주 김씨 문중에서 83명이 산마장 감목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가 국력을 기울여 한라산 기슭에 10소장(57개 字목장), 김만일의 동서별목장(私馬牧場)을 발전시켜 산마장을 설치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또한 좋은 말을 생산하고 동북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수출함으로서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제주마는 세계적(世界的)인 품종(品種)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94년부터 공마제(貢馬制)가 폐지되면서 이러한 제주의 국영 목장들은 사라지게 된다.

제주도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잣성은 일본강점기인 1913년부터 1930년에 제주도지적측량과 마을공동목장개설 및 후 미군 항공촬영, 대한민국 육군과 국립지리원의 항공촬영된 것을 하잣, 중잣, 상잣과 돌담으로 중산간 개발에 대단위 목장이 훼손되어 골프장 등으로 그 원형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고 있는 실정이다.

1960년 이전까지 제주의 목축업은 양축농가가 가축을 증식시킬 여력과 생산물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1962년 축산진흥계획 수립에 따라 제주에서도 인공수정사업, 젖소사육 등 증식사업이 이뤄지며 발전한다. 1990년대는 IMF 등 국내외 여건변화에 따라 한우·낙농·양돈·양계 산업의 규모화와 전업화를 이룬 시기이며 2000년대에는 축산물 완전 개방과 여건 변화에 대비하여 한우 및 낙농 산업의 생산·품질·유통·안전성을 중심으로 한 구조 개선이 이루어 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에서 제주마가 1986년 2월에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잣성과 함께 제주축산업의의 보존가치와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더 훼손되기 전에 정밀한 조사를 하여 조선시대 제주 목축산업의 울타리인 잣성을 제주밭담처럼 농업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재조명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강만익(2017), <한라산의 목축생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 <제주농촌진흥 60년사>; 제주특별자치도청, <2019 농축산식품현황>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원 등을 두루 거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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