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항 특위' 무력화 전략?...'예산 농단', 도정 책임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16일 매해 예산안 편성 때마다 도의원 1인당 10억원씩 배분해 온 사실을 고백했다. 이른 바 '의원님 예산'의 실체를 공개한 것이다.
원 지사는 제주도의회 본회의장에서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된데 따른 인사말을 하던 중 "그동안 관행적으로 의원님들께 10억 원씩 배분해왔던 예산을 2021년도 예산부터 도민에게 돌려드리겠다는 대승적 결단을 내려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단순한 고마움의 표현이지만,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결코 가벼운 얘기가 아니다. 다소 충격적이다.
그동안 예산편성 때마다 '관행'이라는 미명 하에 의원들에게 10억원씩 사업비를 배분해 왔음을 공식화 한 것이다.
'2021년도 예산부터 도민에게 돌려드린다'는 부분을 언급한 것은, 이번에 통과한 2020년도 예산안에도 '의원님 예산'이 10억원씩 배정돼 있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화법으로 풀이된다.
한 마디로 그동안 쉬쉬하며 비밀리에 편성해 온 '의원님 예산'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이는 과거 예산 폐해의 심각성이 지적되면서 사라졌던 '재량사업비' 성격과 같은 것이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다른 일반 예산 항목과는 달리 편성 과정에서 충분한 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고, 심의 때도 구체적인 사업계획 없이 총액만 적시되는 형태로 편성되는 재량사업비는 지난 2012년 감사원에서도 각 지자체에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이 때부터 지자체에서 재량사업비는 대부분 폐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에서는 2015년도 예산안이 편성될 당시인 2014년 후반기 도의회와 '의원 예산' 문제로 한바탕 큰 갈등을 겪었고, 뒤이어 계수조정 증액예산 '부동의'로 예산파동 사태를 거치면서 의원들에게 할당되는 예산은 공식적으로 없는 것으로 밝혀왔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재량사업비에 다름없는 '의원님 예산'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제주도는 스스로 실토한 '1인당 10억원'은 재량사업비와는 다른 차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의원들이 구체적 사업내용을 적시해 요청하면 해당 부서에서 검토한 후 편성되고 있기 때문에 재량사업비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재량사업비'에 다름 없다. 의원들이 요청한 사업들은 타당성 및 우선순위 검토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채 묻지마 식으로 반영되고 있고, 총액 개념으로 '10억원'을 보장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포괄적 사업비'인 셈이다.
원 지사도 '10억원씩 배분'이라고 표현했다. 일반적 사업예산 '지원'의 의미와는 어감에서부터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총액개념으로 배분이 이뤄졌음을 밝힌 것이다.
앞에서는 '예산 혁신'을 얘기하면서, 뒤에서 도의회와 '예산 작당'을 해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제 제주도정은 도민을 기만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주민참여예산제에 참여해 온 주민들에게 크나큰 허탈감을 주고 있다.
제주도는 예산편성 과정에서 읍.면.동 지역단위에서 꼭 필요한 사업들을 반영하고 주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주민참여예산제를 시행해 왔는데 43개 읍.면.동의 주민참여예산 총액은 내년 예산안 기준 302개 사업에 200억원이다.
'의원 몫' 예산 규모(43명 정원 기준 430억원)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다. 주민참여예산제 무용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궁금함을 자아내는 것은 원 지사가 왜 스스로 '10억원씩 배분'을 실토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 부분은 그동안 비밀리에 행해져 온 것이기에, 조용히 폐지시키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공개화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취지는 대승적 결단을 내려준 도의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차원이라고 했으나,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새해 예산안 의결과 연결해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 새해 예산안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계수조정 과정에서 총 393억원이 조정됐다. 기존 항목에서 감액해 다른 항목으로 증액하는 방식의 조정이 이뤄진 것이다.
감액 또는 증액 조정이 이뤄진 예산항목은 무려 800여건에 이른다.
그러나 원 지사가 본회의장에서 증액예산 항목 중 '부동의'를 하겠다고 밝힌 항목은 단 1건(2억원)이다. 제주도의회 제2공항 갈등해소 특별위원회 운영관련 사무관리비로 편성된 '제2공항 갈등해소 연구조사' 비용이다.
특위는 당초 제2공항 의견수렴 방안 학술용역비로 3억원을 지원해줄 것을 제주도에 요청했으나, 제주도 용역심의위원회에서 이를 거부하자 계수조정 과정에서 증액 편성했다.
원 지사는 김태석 의장이 증액예산에 대한 동의여부를 묻자,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 심사 결과에 대해 전반적으로 존중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제2공항 갈등해소 2억원 부동의하고 나머지 증액에 대해서는 동의한다"고 밝혔다.
오로지 단 1건, 제2공항 특위활동 예산만 인정할 수 없고, 나머지 증액 예산은 모두 존중하고 동의한다는 것이다.
예결위의 계수조정에서는 삭감된 393억원 중 11억원만 내부유보금으로 돌리고, 나머지 382억원은 각종 민간단체 및 읍.면.동 등의 지원사업에 대거 증액 편성하면서 논란의 여지가 많았으나 원 지사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예산안이 통과된 후에는 '10억원씩 배분'을 한 일을 고백했다.
결국 원 지사의 입장은 의원 1인당 10억원씩 배분해주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계수조정에서 수백억이 '퍼주기'로 소진되는 것도 용납될 수 있으나, 단 하나 제2공항 특위 예산은 단 '1'도 안된다는 것이다.
제2공항 특위 예산을 무산시킨 후 이어진 '10억원씩 배분' 발언은 도의회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한방을 얻어 맞은 격이 됐다. 원 지사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발언은 도의회의 약점, 즉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서 논쟁의 초점을 분산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이슈'를 등장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원 지사의 발언이 '계산된 것'이었다면 그 전략은 일정부분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제주도정은 이번 일과 관련해 두 가지 측면에서 책임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하나는, 도민을 기만하고 감사원의 권고를 부정한 '예산 농단'의 책임이다. 재량사업비에 다름없는 '10억 배분'을 통해 예산편성의 질서를 어지럽힌, 그 1차적 책임이 도정에 있다. 엄연히 '예산 편성' 과정에서 행해진 일이기 때문이다. 감사원 감사를 통해서라도 진상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도민의 대의기관인 도의회에서 구성한 특위의 존재를 부정하고, 도민 의견수렴에 대해 사실상 훼방을 놓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도민사회 갈등과 분열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도정은 중재적 역할을 포기한 듯 '반쪽 논리'에 매몰돼 있다. 특위예산을 무산시킨 이번 '부동의' 행사는 지역사회 갈등문제와 관련한 도정의 역할에서 '무능'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크다. <헤드라인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