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시대, 식민지 수탈 농업과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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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시대, 식민지 수탈 농업과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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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8)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일제강점기 전, 개항기 30여 년간은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대체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했고, 경제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체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항기의 정치적·경제적 지향이 일제강점기에 그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지배체제가 직간접적으로 영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극히 제한적인 의회제도 마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고 군인출신 총독에 의한 독재정치가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해 실시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의 개항기는 농업경제부문에서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일정하게 붕괴되는 한편, 자영농, 상농층 등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중간층이 성장해갔고, 상공업부문에서는 외국자본의 침투 아래서도 내국자본에 의한 공장제수공업이 일정하게 발전하고 상업자본 및 관료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초보적이지만 공장공업도 발달해갔다.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이 강행됨으로써 개항기의 추세와는 달리 자영농, 상농층의 성장은 저지되었으며, 그들을 소작농민으로 전락시켜 식민지적 지주소작제를 광범위하게 재편성함으로써 그 사회를 식민지반봉건사회가 되게 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반해 농업경제부문에서의 이 같은 반봉건적 요소가 광범위하게 재편성되었고, 또 그것이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해 강인하게 잔존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식민지자본주의가 그 나름대로 초보단계과정과 상업자본주의 단계 등을 거치면서 단계적인 발전을 해왔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일제 지배체제하에서의 공업화를 통해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까지 발전해갔다.

일제강점기는 식민지 반봉건사회, 또는 식민지 자본주의사회로 일제강점기 이전 사회의 순조로운 연장선상에 있지 못했으며 일제강점기로서의 왜곡된 역사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전체가 하나의 사회체제 아래 있었다. 그것이 8·15해방 후 사회적·경제적 요인보다 오히려 정치적 요인에 의해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로 양분되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항만 건설, 철도 부설, 도로 개설, 광산 및 산림 개발, 하천 개수, 발전소 건설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근대적인 '개발' 사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주민의 복리와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통치를 위한 수탈의 수단이었고,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발'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국 근대화의 기초가 일제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그것은 겉만 들어 논리를 왜곡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일제는 한반도를 개발한 것이 아니라 그 발전 잠재력을 체계적으로 착취·수탈하고 억눌렀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과정에서 국토를 침탈하였으며 발전적인 구조는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8)을 통해 한반도의 모든 경지, 택지 및 산림과 기타 토지에 대해 위치, 경계, 면적을 측량하고, 소유자, 지목, 지위를 조사·기록한 지적도를 작성했다. 일제가 한일합병과 동시에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한 것은 토지의 생산력과 조세 기초의 파악이라는 목적 외에 농지 수탈과 이를 통한 식민지 경영 토대의 마련이라는 감추어진 의도 때문이었다.

그 결과 토지이용과 소유체계 확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했고, 측량결과로 1 : 50,000의 기본도가 작성된 것은 일부 성과적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부재지주를 인정하여 수많은 소작인을 양산했고, 무엇보다도 적지 않은 토지가 이를 계기로 일본 자본가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1926∼39년까지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은 대규모의 농업개발사업이었다. 일제가 운영하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토지개량주식회사는 이 계획을 추진한 양대 기관이었다. 이 계획은 토지개량과 경종법의 개선, 개간 및 간척에 의한 농지확장 등을 통해 미곡의 증산을 기하려 했다. 이는 일본 금융자본이 조선의 수리사업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금융환경의 악화와 경영기술의 미숙으로 수년 후에는 벽에 부딪쳤고, 본토 농업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여져 일본 농정 쪽의 반발이 컸던 데다가 불량수리조합이 속출하여, 1934년에는 이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식량확보를 위한 이른바 증미계획으로 제2차 산미증식계획(1940∼51)을 추진했는데, 주로 관개개선과 토지개량을 통해 생산활동을 고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확대로 이 계획은 미곡공출제와 식량배급제로 변질되었고, 마침내 패전으로 마감되고 말았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점함에 따라 강력한 일본 자본을 배경으로 일본 농업(정책, 경영, 기술)의 이식이 벼농사, 목화재배, 과수재배, 담배와 인삼의 경작 등에 수행되어갔다. 특히 일본은 자국내의 식량난 타개를 위하여 이른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우리 나라에서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즉, 경종법개선, 품종개량, 종자갱신, 퇴비장려, 수리개량, 개간, 간척 등 다각적인 시책으로 증산의 실효를 거두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우리 나라 쌀의 일본으로의 수출증가가 일본의 열등미 가격의 폭락을 일으켜 이른바 선미배척운동(鮮米排斥運動)이 격화되었고 1930년대의 세계적인 농업공황이 겹치기 시작하였으며, 한편으로 수리조합비의 과중한 부담 등으로 농가의 토지방매가 성행하여 2차 산미증식계획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벼농사 면적은 1910년에 132만 정보이던 것이 1941년에는 164만 정보에 달하였고, 몽리면적은 수만 정보에서 23만8천 정보에 이르렀다. 미곡의 수확량은 1910년에 1240만 석이던 것이 1941년에는 2488만 석으로 상승되어 1910년에 반당 0.77석이던 것이 1941년에는 1.5석으로 배의 수확량을 올리게 된 셈이다. 그 동안에 일본품종이 조수와 같이 밀려들어와 1935년경에는 75%까지 재배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1935년경부터는 개량품종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1945년을 전후하여 일본재래종을 교체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되었다. 미곡의 반당수량이 약 30년 동안에 배증하게 된 기술진보의 배경에는 품종생산력의 발전, 수리시설의 증강, 금비(金肥) 사용량의 증가, 그리고 기타 경종법 개선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보겠으나, 농기구면의 기계화는 별로 진전되지 못하였다.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왼쪽), 일제 시대 쌀 생산량 및 반출량.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왼쪽), 일제 시대 쌀 생산량 및 반출량.

어떠하든지 이렇게 증산된 미곡의 많은 부분이 일본에 수출되었으며, 1938년에는 수출량이 1070만 석에 달하였다. 한편으로 잡곡생산은 1910년대에 약 2천만 석이던 것이 1930년대에는 2400만 석 내외로 약간 증가되었을 뿐, 수출미의 대신으로 1930년대에는 부득이 280만 석을 수입하게 되었는데 1910년대의 26만 석 수입의 10배 이상이나 된다.

이것을 보면 맥류를 위시한 잡곡류의 증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농업구조의 개선과 상관이 없는 투자성이 높은 작물(특히 과수, 연초 등)에 있어서는 많은 품종개량과 재배법 개선이 이루어졌다.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농업의 입장에서 보면 개발다운 개발은 없었고 수탈을 위한 개발만 있었다. 만약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통일 이후의 시대를 현대사로 하고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를 통틀어 통일 이전의 근대사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성격문제나 역사적 위치문제도 그 테두리 안에서 다시 검토하여 미래지향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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