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제주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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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6)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일제 강점기의 과정에서 제주사회는 어떻게 변화했고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에 대한 고찰과 함께 어려운 시대 제주인들의 능동적인 활약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식민지 지배 체제가 구축되면서 1915년 제주에는 도제(島制)가 실시되었다. 도사는 제주경찰서장을 겸임함으로써 행정과 경찰을 일원적으로 통치하는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모든 관공서에 일본인이 배치되었고, 교육기관의 교장 및 교사들도 일본인으로 충원되었다.

일제는 1912년부터 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해안일주도로 포장에 나서서 1918년에 확장을 끝냈다. 특히 서귀포를 통하는 교통망은 우선 도로와 항로를 통하여 연결되었다. 도로는 1912년부터 1913년에 걸쳐 도민에게 부역을 과하여 전도적인 순환 일주 도로가 개통되었다. 또한 한라산 중턱을 횡단하여 서귀포로 통하는 도로가 1932년 개통됨에 따라서 서귀포의 물자가 제주성 내로 원활하게 유통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일주도로 등 각종 교통망은 제주의 각종 산물을 산지, 한림, 성산포, 서귀포 등 항구로 쉽게 수송하여 외부로 반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도민들에게 신작로라 불리던 일주도로의 개설로 조선시대 이래 대촌(大村)이었던 성읍, 홍로(서귀포 옛 지명), 명월, 대정과 같은 마을은 쇠락하고, 성산포, 서귀포, 한림, 모슬포 등이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일본을 통한 자본의 유입으로 제주도민들의 생활이 일부 향상되었는지는 몰라도, 제주도의 자생적 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13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은 국·공유지가 많았던 제주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과거 목장토와 역둔토를 경작하던 빈농과 화전민들은 토지조사사업과 화전 경작 금지에 따라 경작지를 구하지 못하여 외부에서 생활 기반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민 대부분이 빈궁과 기아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이의 탈출을 위하여 일본 등으로 나가 열악한 조건하에서 탄광이나 방직공장 등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특히 1923년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大阪) 사이에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제주도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도항하여 갔다. 1920년 여름에는 콜레라가 4개월 동안 유행하여 도민 4,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제주도를 주요 군사기지로 인식한 일제는 섬 전역에 군사시설을 강화시켜 갔다. 군사시설 공사에는 많은 제주도민들이 동원돼 고초를 겪었다. 제주도 내에는 일제 말기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거대 군사 시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상당수의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전시 총동원령에 따라 징병, 징용, 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부역 동원되거나 전장으로 끌려갔다.

일제강점기 36년을 정리 해보면 한국의 역사는 타 민족인 일제의 지배 하에서 더욱 심하게 왜곡되었다. 이 시기 제주 사회는 한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심한 식민지적 수탈과 착취, 민족 차별적 탄압을 받는 가운데 이전 시기보다 예속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일제시대에는 2차 세계대전의 본토결전을 위해 제주도가 병참기지화 됐다. 제주도는 중일전쟁을 치르던 때는 일본에서 무기를 한반도로 옮기기 위한 중요한 통로였고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이 미국과의 본토결전을 앞두고 전의를 다지는 요충지였다. 특히 일제 말기에는 미군이 오키나와 다음으로 제주도를 함락시키고 본토를 침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일본군은 제주도의 군사기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제주도의 오름과 해안 100여 개소에 각종 진지를 포함한 요새들을 집단적으로 구축했으며 제주시 용담동 정뜨르의 육군서비행장, 조천읍 신촌리 진드르의 육군동비행장, 교래리의 육군비밀비행장,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 해군비행장 등 총 4곳의 비행장을 건설했다. 이중 제주시 용담동 정뜨르 비행장은 현재 제주국제공항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일제는 징용이나 징병 외에도 비행장 건설, 진지구축을 위한 토굴작업에 16∼60세 사이의 주민을 강제동원해 노역을 시켰다. 마을별로 인구수에 비례해 동원인 수를 할당하고 노역기간은 2개월여씩이었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10대 중반의 어린 소년들도 노역에 동원시키기도 했다. 비행장 건설, 산악지대의 진지, 해안의 특공기지 건설에는 비밀유지를 이유로 주민이 아닌 군인들이 건설했지만 제주도에 파병된 일본군인 수 7만여 명 중에 2만여 명이 조선인 병사였고 이들이 동원됐다. 또한 각종 진지와 요새 구축에 제주도 사람뿐 아니라 전라도 등 다른 지방 사람들도 징용되어 왔다고 한다.

일제의 알뜨르 비행장 모습(왼쪽), 일제시대를 전시한 평화박물관
일제의 알뜨르 비행장 모습(왼쪽), 일제시대를 전시한 평화박물관

서귀포시 대정읍에는 일제가 중국침략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건설한 알뜨르비행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일본군은 송악산 해안을 특공기지로 건설해 각 종 갱도진지와 고사포진지를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해 구축했다. 군 시설 외에도 제주도의 특산물인 해산물도 강제적으로 채취해 갔다고 한다. 해조류인 감태를 재로 만들어 풍부한 칼륨 성분을 화학의 원료로 썼으며 정어리에서 기름을 뽑아내 글리세린이나 화약의 원료로 썼다고 한다. 그 중에는 감태를 채취하기 위해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도 있고 초등학교 학생들도 항공기 대용연료가 되는 소나무뿌리 기름채취 등에 동원됐으며 항공기용 알콜연료를 뽑기 위해 고구마 재배도 강제되었다고 한다.

광활한 중산간 지대와 관아 소유의 토지가 전부 총독부 소유로 넘어가면서 많은 제주민들은 경작권을 일순간에 잃었다. 특히 중산간 목장지대를 개간해 영원한 경작권을 갖고 있던 화전농민들의 억울함과 박탈감은 이주 컸었다. 게다가 바다까지 장악한 일제에 의해 제주도민들은 삶을 위해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는데 일제 전반에 걸쳐 도항과 중·말기의 항일독립운동으로 나타난다.

일본에 재일제주인 사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910년대 일본의 수탈정책에 의해 토지를 잃거나 생활 터전을 상실한 농민들이 일본 노동시장의 수요 증대에 따라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시작됐다. 더욱이 1923년 제주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직항항로의 개설은 제주도 출신자들이 일본으로 이주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또한 1930년 후반에 이르러 전쟁수행을 목적으로 징병․징용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원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본토에서의 운동에 호응한 운동도 있고, 또한 제주도의 독자적인 운동도 있다.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의 특징은 우선, 제주도민 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자본적, 반지주적 계급투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해방 전 제주도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고 여기에 보충적인 산업으로서 수산업과 목축업이 있었다.

그런데 소작쟁의(小作爭議)가 거의 안 보인다. 물론 1930년대의 가장 큰 항쟁으로서는 1932년의 '해녀항쟁'이 있었지만 이 항쟁도 수산자본에 대결한 해녀항쟁이라기보다도, 일제권력에 유착한 해녀어업조합에 대하여 해녀를 중심으로 결속된 마을공동체의 대결이란 성격이 농후하다. 해녀 항쟁 이후 제주 지역의 항일 운동은 다수의 주도 청년들이 검거됨에 따라 한림과 애월,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 조합의 건설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제주 도민들 또한 파탄 일보 직전에서 경제적, 정치적 권리 및 자유를 지키기 위한 항쟁을 끊임없이 계속해 나갔다. 특히 제주도민의 정치적 성향과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의 매우 독특한 기반을 가지고 있어 제주만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에 분주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참고자료: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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