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탐라는 동북아 교역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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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탐라는 동북아 교역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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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4)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고대 제주의 탐라국은 동북아 교역의 중심지였다. 대륙과 해양, 동양과 중동, 서양문명이 교차하는 세계사의 한복판에서 해상교역을 통해 문명을 연결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해 풍요로운 문명사회를 이룬 위대한 해양국가였다는 사실이 서서희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제주의 한라산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요소는 중국의 산동성⋅강소성⋅절강성과 대마도, 고토열도로 이어지는 고대 항로가 이루어 졌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항로상에 있는 것이 제주의 위치였다.

그 예로 진시황시대에 서복이 제주를 방문하였다는 기록을 둘 수 있다. 중국 진시황 때 사자 서불(徐福=徐市)이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에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동남동녀 500쌍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왔다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자를 새기고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복전시관은 이러한 설화에 기초하여 중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에게 문화적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정방폭포 인근에 건립되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잇는 구비문화유적으로서 자원적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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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복전시관 모습(왼쪽)과 황룡사 9층목탑 축소 복원 모습(오른쪽).
ⓒ헤드라인제주

다음의 예로 황룡사 9층목탑이다. 『삼국유사』 「탑상」을 보면, 선덕왕이 주변의 이민족에게 신령의 힘으로 항복을 받는다는 취지로 황룡사에 구층탑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때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국,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 탐라), 제5층은 응유(鷹遊)5),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단국(丹國 ; 거란), 제8층은 여적(女狄 ; 여진), 제9층은 예맥(穢貊)이라 하였다. 탑의 각 층이 주변 이민족을 상징하도록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주는 독립적이면서도 다양한 문화들을 만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이제 탐라의 역사는 조선 유교의 사슬에 얽매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세계사의 큰 맥락에서 접근해야만 역사의 진실에 가까워 질수 있다는 생각이다

제주도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쳐 역사시대의 이르러 문물교류를 광범위하게 전개하면서 탐라국으로서의 독자적 위상을 유지하였다. 섬나라 탐라는 섬이 갖고 있는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주변지역과 부단히 교류하며 고대사회로 진입했다. 삼국과의 교섭을 시작으로 남북국시대에는 멀리 일본과 당에 사신을 파견, 독립적인 나라로 외교를 펼친 작지만 힘 있는 나라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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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산지천 모습(왼쪽)과, 1928년 발견 산지천 화폐 유물(오른쪽). ⓒ헤드라인제주

탐라국의 대외 교역 역사와 관련하여, 1928년 제주시 산지항 공사 때 부근의 용암(熔岩) 아래에서 우연히 중국 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화폐로는 오수전(五銖錢),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 화포(貨布)가 발견되었다. 이들 화폐는 탐라국의 활발한 교역을 말해준다. 원거리 해상 교역은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권력체가 있다는 말이다. 다행히도 그 권력체를 증명해줄 유물과 유적의 발견됐다. 용암동 무덤유적에서 발견된 철제 장검 2자루와 그 일대에 상당수 분포하는 고인돌이 바로 그것이다. 

1996년에 발굴된 제주시 삼양동 선사유적지도 탐라국 퍼즐 맞추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확인된 집터만 해도 무려 236기 였다. 게다가 그곳에선 권력자의 위신을 강화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던 고급 옥환도 출토되었다. 권력과 그 권력에 의해 통치 받던 사람들의 생활상이 조금이나마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 삼양동 유적은 탐라국 형성 초기인 기원전 300년∼기원후 15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유물을 통해서 볼 때 탐라국은 대략 기원전 후에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소국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한반도 주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처음엔 백제에, 그리고 백제가 망한 후에는 신라에 조공을 바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완전 복속은 아니었다. 신라에 조공을 바치긴 했으나 탐라는 여전히 독자적인 권력체 였다. 9차례나 견일본사를 파견했고 또 일본으로부터 2차례의 견탐라사 방문을 받았을 정도였다. 『일본서기』의 몇몇 사료는 독자 권력체인 탐라가 일본과 교류했던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주시 산지항에서 발견된 오수전은 전한 무제 때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왕망의 신(新)나라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화천, 대천오십, 화포 등은 모두 왕망 때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산지항 부근 유적의 성립 시기는 왕망 시대 이후의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다만 경상남도 김해 패총이나 전라남도 군곡리 패총, 그리고 일본의 북구주 지방에서 화천이 발견되었던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산지항 출토 유물은 대륙으로부터 금속 문화가 남진(南進)해 온 경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유전(流傳) 시기는 왕망 때 만들어진 화천, 대천오십, 화포 따위가 후한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후한 초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오수전은 마산 성산 패총, 한경편(漢鏡片)은 고성 동외동(東外洞) 패총에서 각각 발견된 예로 보아 당시 제주도 토착인들이 주로 이들 지역과 교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제주시 용담동에서는 단검(短劍), 장검(長劍), 철부(鐵斧) 그리고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출토 유물들은 실제 전투용의 무기들이 아니라 그 소유자가 자기의 고귀한 신분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위신재(威信財)라는 성격을 갖는다. 출토된 물품들의 시기는 같이 동반되는 중국 제품으로 추정되는 40여 점의 유리구슬들로 보아 전 한대에 해당된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출토된 물품들 또한 적어도 기원후 1세기경 제주도 지배 세력이 한반도를 경유하거나 직접 중국과 교역해서 들여온 것이다.

탐라국의 대외 관계에서 탐라국이 국내외 사서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476년(문주왕 2) 백제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쳤다는 데서이다. 그 후 탐라국은 고려 전기인 1162년(의종 16) 현령관이 고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올 때까지 국내 사서에는 10회 정도,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서는 각각 7회와 19회 정도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탐라국에는 왕, 왕자, 그리고 백제의 중앙 관위인 은솔(恩率)이라든지 좌평(佐平) 직책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이 사실은 탐라국 내부에 그 구성원들이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상당히 계층 분화된 사회 체제와 그것을 통제하는 상부 구조가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더구나 당시 고대 국가로 완전 정착한 위치에 있는 백제라는 해외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탐라국은 하나의 ‘국(國)’으로서 동북아시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국제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고종 인덕 2년조(665년)에 신라, 백제, 탐라, 왜국 사자들이 중국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7세기라는 시점에서 사자들의 서열을 살펴보면, 탐라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었으며 다른 세 나라들과는 거의 대등하게 보인다. 

또한 실례로서 신라 27대 선덕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워서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을 때 탐라는 신라의 잠재적인 적대국들 중 제4위에 속하였다. 따라서 당시 신라 당국도 탐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고대 탐라는 동북아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하겠다.

※ 참고자료: 도서출판 각, 2006, 바다에서 본 탐라의 역사; 사회과학출판사, 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강용희, 2018,‘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국립제주박물관, 2017,‘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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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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