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제주에서 농업이 늦게 태동한 이유는?
상태바
선사시대, 제주에서 농업이 늦게 태동한 이유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7) 선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앞서 살펴보았듯이 제주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만∼8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속칭 ‘빌레못굴’ 유적이 있다. 이 빌레못굴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순록과 황곰·붉은 사슴·노루 등의 뼈가 발견되었다. 순록과 황곰은 오늘날 한반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벌판에서도 볼 수 없는 동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석기 시대의 제주도는 예전에는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신석기 시대의 곡물재배에서 연작으로 인한 수확량이 감소하여 경작지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을 것이다. 게다가 조와 기장 등 밭작물로만 식량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하여 어획과 야생 작물 채집 활동을 함께 하였을 것이다. 일반적인 신석기 시대의 재배되었던 작물은 피, 조, 콩과 같은 자가 수분이 가능한 작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는 신석기 말기 또는 청동기 시대에 사람들이 주거지를 만들어 마을을 이루어 살고, 곡식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기르고 우물을 파면서 돌담을 쌓았을 것이다. 주거지는 바람을 막으려고 하단부에 돌로 쌓았을 것이고 마을 가까이 곡식을 키우기 위해 최소한의 돌담으로 바람을 막았을 것이다. 소나 돼지를 키우려면 돌담을 쌓아 관리해야 하고 시신을 보호하려면 석곽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한반도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곡물은 조와 피였다. ‘조’와 ‘피’라는 식물 자원은 지탑리 유적, 평양시 남경 유적지에서 나왔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 조와 피를 비롯한 곡물 재배가 보급되면서 땅을 가는데 쓰이는 농구의 종류가 늘어났고 그 형태도 다양해졌다. 신석기 유적에서서 지금까지 집짐승 뼈는 개와 돼지의 뼈이다. 신석기 시대 들어와서 개, 돼지가 가축으로 많이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개와 돼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부터 기르기 시작한 가축이다. 신석기시대에 곡물재배와 함께 가축 사육이 널리 보급됨으로써 원시농업이 더욱 확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 초에 모계씨족 제도가 부계씨족제도로 이행하는 씨족 교체의 과정이 진행되었다.

농경은 무엇보다도 농사를 지을 땅을 마련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진다. 돌보습이나 돌괭이로 땅을 갈고 끝이 뾰족한 나무막대기나 돌괭이로 구멍을 파서 씨를 뿌렸을 것이고 수확시기에는 돌낫이나 반달돌칼로 곡식을 수확 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확한 곡물을 저장하기 위하여 토기를 만들어 활용한다. 하지만 제주의 신석기 유적에는 돌보습, 돌괭이 등 땅을 갈고 업는 도구 보다는 화살촉, 긁개, 돌날, 낚시축 등 사냥 및 수렵활동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고산리 유적에서는 덧무늬토기, 하모리 겹아가리토기, 삼양동 점줄무늬토기 등이 발견되었는데 곡식 알갱이 흔적은 없었다.

신석기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 농경으로 인한 정착생활을 시작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제주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신석기시대 들어와서도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아마 유기질 영양분이 절대 부족한 화산재 토양 때문에 농경이 어려웠을 것이다. 농사를 짓지 못했다면 이들은 여전히 채집 생활을 주로 했다는 말이 된다. 원시농업의 정착이 늦어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모계씨족사회가 늦게까지 있었을 것으로 예상 할 수 있다. 제주의 선주민들이 농사를 처음 시작된 것은 신석기 후기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전에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야생동물이나 물고기 잡아먹는 수렵채집 생활을 했을 것이다. 농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유물로 발굴된 농기구, 토기 등에 남아 있는 곡식 알갱이의 흔적으로 추정한다.

무제-4.jpg
▲ 삼양동 점줄무늬 토기(왼쪽), 북촌리 불탄 열매(오른쪽)
>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제주 고산리 유적이 있다. 유물로는 즐문토기·무문토기·석부·마제석도 등이 다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초반부터 집단생활이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이외에도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 중 제주 삼양동 선사 유적, 제주도 개벽신화의 터전인 제주 삼성혈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문헌상으로 볼 때, 제주도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 기록보다는 중국의 역사서에 먼저 나타나고 있다. 사기 6권 진시황본기 및 118권 회남형산열전에 따르면, 기원전 221년에 6국을 복속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이후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내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하였고 서불은 불로초를 구하러 가야 하는 것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원전 219년(진시황 28년), 황제에게 당시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바다로 나온 서복이 제주도에 왔고, 이곳을 지나면서 '서복이 이곳을 지나간다(徐市過此)'라는 글자를 암벽에 새겼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제주에서 불로초(不老草)를 구한 서복이 '서쪽(西向)을 향해 귀로(歸路)에 오른 포구(浦口)'라는 의미에서 서귀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제주의 농업에 관한 흔적은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주호(州胡)’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주호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곳 사람들은 마한인들 보다 조금 키가 작고 언어도 한족(韓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선비족(鮮卑族)처럼 머리를 깎았으며,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는데,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어서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한(韓)나라에 왕래하며 물건을 사고판다.’고 하여 미미하나마 제주에서의 농업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무제-1.jpg
▲ 삼국지위지동이전 ‘주호’표기(왼쪽), 탐라개국 신화의 삼성혈(오른쪽)

제주 삼성혈(三姓穴)에 얽힌 신화는 선사시대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주 삼성혈은 제주도 사람의 발상지이자 개국의 성지로서 고(高)·양(良)·부(夫)의 세 신인(神人)이 이곳에서 솟아 나와 수렵생활로 연명하다가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개척하였다고 삼을라 신화는 전한다.

제주 선주민들은 소나 돼지를 그들의 생활공간에서 기르는 것을 좋아하여 소규모 목축이 농경보다는 유리하였을 것으로 유추되며, 특히 4면의 바다로 인한 어획자원이 풍부한 반면 화산재 토양, 강한 바람 등 어려운 기상 조건으로 제주에서의 농경활동의 시작은 한반도 육지부 보다 늦은 청동기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정리해 본다.

※ 참고자료: 강용희(2018) , <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본문.jpg
▲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수정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