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다 구럼비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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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다 구럼비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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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용택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구럼비야, 요즘 네 이름이 들어간 책 '울지마 구럼비 힘내요 강정'과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가 꽤 인기를 얻고 있더구나. 뒤늦은 감은 있지만 감개무량하다.

구럼비야,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모내기할 때 너를 처음 봤으니까 벌써 45년이 되었다. 그때 중참으로 나온 단팥 찐빵 하나를 얻어먹었던 게 아직도 아스라이 기억난다.

중학생 때는 나록(벼)과 보리를 지고 고통스럽게 구럼비 동산을 오르내렸고, 고등학생 때는 도열병과 이화명충을 구제하느라 농약치는 일을 거들곤 했지.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냇길이소에서부터 구럼비까지 물골을 치는 물매기도 중요한 행사였고, 그러다 가뭄이라도 들라치면 논에 물 대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구럼비야, 너를 통해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제일 보기 좋다"는 속담을 이십대 초반에 절반쯤 이해했다. 어린 벼가 가뭄에 타들어갈 때, 팔뚝을 베어내 죽어가는 벼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으니 말이야.

구럼비야, 너를 만나면서 농부의 심정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지금에야 고백하는데, 객지에서 대학 다니면서 강정 큰내와 중덕 바당이 그렇게 보고 싶더구나. 그래서 구럼비 너럭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와 중덕의 파도소리를 녹음하였다가 초라한 자취방에서 들으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지.

모두가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그래도 물 많고, 토질 좋고, 따사로운 강정마을은 제주사람 모두가 부러워하는 곳이었다. 강정마을이 '일강정(제일강정)'이라 불리고, "강정애긴 곤밥 주민 울곡 조팝 주민 안 운다(강정아기는 쌀밥 주면 울고 조밥 주면 안 운다)."는 제주속담이 생겨난 것도 바로 구럼비, 네 덕분이 큰 것 같다. 구럼비동산에서 썩은섬과 범섬을 바라볼 때 그 앞에 펼쳐지는 큰구럼비, 족은구럼비, 개구럼비는 풍요로운 강정의 상징이었다.

구럼비야, 예전에는 너를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그들은 네 품에서 퐁퐁 솟는 할망물을 떠다가 물터진개에서 넉드리거나 굿을 하면, 앓던 병도 낫고 안 되던 일도 잘 풀린다고 믿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러기에 "구럼비 바위 같은 곳은 어디에나 있다"는 어느 군인의 말은 강정사람의 정서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이야기였지.

하기야 네가 처음부터 강정사람에게 심미적 대상이었던 건 아니다. 매일 보는 너였기에 누군가가 "구럼비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알려주기 전까지 어쩌면 너의 진가를 모르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몰라.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널 해군에다 팔아넘기려 했던 거고.

윤용택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헤드라인제주>
구럼비야, 정말 미안하다. 전국의 예술가들이 네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데, 정작 우리는 너를 몰라봤으니 말이야. 오죽했으면 네가 말을 걸어 왔겠냐. "나, 이렇게 살아있어. 어쩌면 나 이렇게 살아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 채,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몰라." 나는 분명 네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네 모습을 세상에 알리려고 서투른 카메라를 들었던 거야. 하지만 셔터를 누를 때마다 너는 아름다운 네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더구나. 이제라도 네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고, 세상이 너를 알아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하지만 뭔 심통이 났는지, 사람들이 아름다운 네 모습에 반하기 시작하니까, 해군에서는 너를 넘보지 못하게 펜스와 철조망을 치더구나. 철조망에 가로막혀 네 모습을 못 본지도 이제 100일이 넘었다.

구럼비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나 세계가 너를 주시하고 있고, 많은 이들이 너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걸 확신한다. 일강정 구럼비야, 정말 보고 싶다.

<윤용택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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