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게으르고 '주왁주왁' 거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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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 <46>주왁주왁 게으르기

김경훈 시인,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주왁주왁’이고 다른 하나는 ‘전상’이다. 주왁주왁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태도를 떠올린 적이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지근한 거리에서 지켜 본 바에 의하면 그의 ‘주왁주왁’은 단순한 망설임이나 줏대 없는 어중간함이 아니 다. 그는 날카로운 감성의 더듬이에 포착된 생각을 그만의 빛깔로 물들이고 거기에 제 나름의 무늬와 결을 새겨 넣을 때, 그는 오른손으로 펜대를 돌리면서 주왁주왁 거리는 버릇이 있다.
- 김수열, 김경훈의 강정문편 「돌멩이 하나 꽃 한 송이도」 2쇄 표사글 중에서

‘주왁주왁’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니다. 고향이 제주가 아닌 여인에게 이 말의 의미를 전하려다가 그야말로 ‘주왁주왁’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주왁주왁’이라는 제주말은 ‘기웃기웃하다’, ‘정처 없다’, ‘생각 없이 여기저기 나다닌다’ 등등의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대충 이런 정도로 설명을 했는데, 그녀는 단어가 주는 의미보다는 저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단번에 ‘주왁주왁’의 의미를 알아버렸습니다. 저가 하도 설명을 하지 못해 워낙 주왁주왁 하니까 “아하! 바로 이런 게 주왁주왁이구나!” 하고요.

‘주왁주왁’은 비주류의 말입니다. 상석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높은 분들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저처럼 자리를 봐도 항상 말단 구석이 편한 사람에게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주왁주왁’은 주변부의 말입니다. 중심을 추종하는 대단한 분들에게는 절대로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나 조직의 중심에 있지 않는 소갈머리 없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어제 갔던 길도 제대로 못 찾는 그런 두루숫붕이인 저 같은 사람에게 딱 알맞는 말입니다.

어느 극단의 연출가가 공연 전
마당판을 거닐며 주왁주왁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진행요원이 말했다

“아저씨, 거기서 나와 주세요.
거긴 관계자 외엔 들어가면 안돼요!”
“예!”

연출가가 순순히 대답하고 물러섰다
배우들이 연출가에게 물었다

“왜, 연출가라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면 괜히 나 때문에 무안해지지 않겠어?
저이는 자기 일에 충실한 건데.”

진행요원이 딴 데로 가자
연출가는 다시 주왁주왁 마당판으로 갔다
-졸시, 「어느 연출가」 전문

이번엔, 게으르기! 제주말로 간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간세는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을 말한다네요. 제주말에 ‘쇠 잡아먹을 간세’라는 말이 있는데요. 저도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이 쇠 잡아먹을 간세다리야!” 하면서 욕을 들었던 기억이 많거든요. 쇠를 잡으려면 칼도 갈아야 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하니 수고가 그만큼 들어가니까 그건 절대로 간세가 아닌데요. 그래서 제주도속담사전을 펼쳐보았습니다.

쉐 잡아먹을 간세혼다. (소 잡아먹을 게으름을 핀다.)

【해설】농부의 좌우명일 수 있는 것은 근면이다. 밭에 씨만 뿌려놓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가꾸는 부지런 공으로 수확이 이뤄진다. 만일 게으름을 피면 수확 이 제대롭지 못하니 굶주린 생활을 할 것이 뻔하다. 그 결과 애지중지 아끼는 소를 어쩔 수 없이 잡아먹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용처】게으름뱅이를 꾸짖고 나무랄 때.

하, 그러면 그렇지!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경구입니다. 옳은 얘기입니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게으름’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그런 게으름이 아닙니다. 워낙 바쁘게 사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요즘 시대에서 좀 제대로운 일탈逸脫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70년대쯤 선데이서울에
반라의 여인이 야릇한 자세로,

“나 오늘 한가해요!”

요즘은 안 바쁜 게 죄인 양
모두가 언제나 쫓기듯 겨우,

“나 오늘 무지 바빠!”

숨가쁘게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한가하게 버려진 나는,

“사람이 오건말건, 사랑이 가건말건!”
- 졸시, 「나 오늘 한가해요!」 전문

그건 ‘성장증후군’, ‘속도증후군’에 집단적으로 감염된 이 뿌리 깊은 중독증에서 벗어나 좀 여유로워지자는 것이예요. 앞만 보며 무작정 내달릴 것이 아니라 가끔 뒤도 돌아보고 옆눈치도 보고 아래에도 시선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느림’의 미학입니다.

‘게으름과 주왁주왁’은 ‘느림과 여유’의 다른 말일 것입니다. 그것은 속도와 주류를 거부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 있어야 제대로 체화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제주강연에서 ‘소수자, 주변부, 마이너리티가 변화의 가장 중요한 창조적 산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중심부, 즉 메이저들은 항상 주변부와 소수자들을 흡수하고 자기 자신의 영향력만을 키우려고만 하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고독과 게으름은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

두 분의 말을 합치면 ‘게으름과 주왁주왁’은 ‘창조적 상상력의 산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게으름과 주왁주왁’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주 좋은’ 말입니다. ‘아주 따뜻한’ 말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따뜻한 바람의 말입니다. 낮은 자세로 도도히 흐르는 청아한 물의 말입니다.

이제 게으르고 주왁주왁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살면서 서로 나누고 보살필 줄 아는 사람들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주올레를 걷는 분들을 ‘간세다리꾼’이라고 이름지은 것도 이런 맥락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이 글의 주제는 아무래도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강요하지 않고 늘 거기 있는 자연스러움을 이루는 것! 그것은 또한 평화의 다른 이름이겠지요. <헤드라인제주>

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는...

   
김경훈 객원필진. <헤드라인제주>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4.3이야기, 현시대의 시사문제, 책을 읽은 후의 느낌, 삶의 의미과 가치에 대한 생각 등을 시(詩)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프로필.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우아한 막창」,「운동부족」, 「한라산의 겨울」, 「고운 아이 다 죽고」,「삼돌이네집」, 「눈물 밥 한숨 잉걸」이 있고 마당극대본집으로 「살짜기옵서예」가 있다. 

제주 4.3 일본어 시집 「불복종의 한라산」도 최근 출간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4.3 드라마 10부작「한라산」을 집필했다.

제주4.3 연구서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와 「그늘 속의 4.3」,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인들」을 공동집필했다. 현재 제주4.3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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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성 2019-12-23 20:32:23 | 110.***.***.223
'제대롭지'라는 말이 맞는 건가요?
잘 몰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