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길현의 제주 미래담론] (27) 어르신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2021-03-10     양길현

보수와 진보는 다르다. 그렇다고 매사에 분명하게 구분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보통의 우리네들은 특정의 정치ㆍ사회적 쟁점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보수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진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평생 살면서 보수와 진보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현실에 가까운 게 아닐까.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 어느 편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 어느 한쪽 입장에만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흐름이 널리 자리하고 있다. 어느 사회나 보수와 진보 양극단에 10~15% 정도의 골수가 존재한다는 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가 점점 더 고착되어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념적 갈등이 점점 더 일상화 ㆍ정치화 되어 가고 있는 데에는 승자독식의 대통령제가 한 몫 하고 있다. 이 점은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미국을 보더라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화끈함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들은 오늘도 내가 직접 뽑는 대통령 리더십에 모든 걸 걸고 있다. 

한국사회에 중도층이 거세되는 계기는 이미 대한민국의 건국과  성장과정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반공보수 일색의 정치적 기류는 1950년 한국전쟁의 여파로 그리고 그 이후 전개된 동북아의 냉전질서로 인해  다른 대안을 불허 했다. 구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탈냉전의 흐름이  나타날 때까지 한국에서 유연하고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은 가능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북한을 비롯한 구소련 및 중국과의  적대와 그로 인한 안보적 위협이 발 등의 불처럼 존재해 왔던 지난 20세기에는 반공ㆍ반북의 이념적  경직성이 나름 정치적ㆍ군사적 유용성을 갖고 있기도 했다.  정치ㆍ외교ㆍ군사ㆍ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친미의 강화 그리고 차마 친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과의 경제적 협력이 대한민국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된 것은 일면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 결과는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대~한민국'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해 나감으로써 IT강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코로나19의 팬데믹 위기도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서 적절히 잘 대응해 나가고 있다는 자부심까지 갖게 될 정도가 되었다. 

우리 사회의 괄목할 성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보수 가운데 더 극우적 입장에 가까운 우파근본주의의 자기도취와 막무가내는 심히 우려스럽다. 여전히 미ㆍ일과 중ㆍ소 간 냉전시대의 적대와 선악 대결의 방어적ㆍ공세적 관점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때문이다. 1960~80년대 한국의 산업화를 주도해 나갔던 세대들의 자긍심은  박정희 시대의 반공적ㆍ경제제일주의 사고방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쉽사리 당 세대의 자기우월적 입장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양보와 마음 비우기가 쉽지는 않다. 60년대~80년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이후 세대들은이 알 수가없다는 어르신들의 자부심은 존중받아야 할 만하다. 더욱이 세대간 경험과 정서는 결코 쉽게 전달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고령화 시대라 여전히 애국심과 경륜을 갖추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어르신들의 열정을 어떻게  미래를 향한 사회적 활력으로 연결시킬 것인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하겠다. 

우리 어르신들의 엘리트주의적 신념과 나라 사랑의 열정을 보다 다양한 정치적 장과 사회적 틀속으로 분산시켜 나가는 것이 그 하나의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어르신들과 항께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통해 위드코로나 시대의 대한민국의 수호자 역할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야말로 보수의 대표적 가치이자 사회적 연대망을 뒷받침해 주는 기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보수든 진보든 다 엘리트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중 특히 보수는 진보에 비해  가난에 대한 해법으로서 국가의 역할 보다는 사회내 옐리트들의 책무에 더 주목하고 강조점을 둔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귀족의 의무'라는 것인데, '엘리트의 책무'로 읽는 게 어떤가하는 생각이다. 오늘날에는 법적ㆍ신분적 지위로 귀족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사회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 혹은 어떤 형태로든 '스스로 잘 났다고 생각하면서 무언가 사회에 기여하고자'하는 바로서의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꽤나 존재한다. 바로 우리의 어르신들의 역할에 대한 재점검이 요청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는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여파 그리고 미국 특유의 탈신분사회 신조를 적극 받아들임에 따라 신생 대한민국은 그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탈신분사회를 정착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한국사회의 '잘 살아보세'의 구호가 성공적 산업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한민국의 탈신분사회라는 사회적  기반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탈신분사회라는 여건 속에서 각자도생의 재주로 살아남은 어르신들이 언제부터인가 고착화되어 가는 한국사회의 신분사회적 흐름에 편승하려는 자기안일에 빠져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엘리트 의식과 선민사상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각자가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각자도생의 삶을 키워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가문 또는 특정의 인맥에 의존하지 않고 각자의 근면과 능력으로 이른바 출세가 가능한 만큼이나 한국인의 엘리트 의식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으로 변모해 갔다. 해방과 함께 도입된  서구 계몽주의의 개인 우선적 사고와 애초에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모체로 했던 기독교의  자기구제적  교리의 영향으로 엘리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논의는 수면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유교적 가족주의가 내걸은 작은 단위의 혈연적 공동체가 그나마  사회적 연대와 책무를 지탱해 나가는 보루로서 작동할 따름이었다. 

양길현

한국 사회의 보수는 이렇게 가난을 이겨낸 어르신들로 주를 이루고 있다. 이제 어르신 븐들에게 한국 사회는 마지막 사회적 책무를 요구하고 있다. 그건 개인의 장수무병을 넘어선  공동체적 박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명감과 경륜을 갖춘 어르신들이 위드코로나 시대를 맞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조금씩이라도 실천해 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나날 각자도생으로 한국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오신 어르신들이  조금만 더 공동체 지향과 연대의식으로 나아가는 데서 위드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양길현 / 제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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