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와도 안바꿀 '호박잎국' 한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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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와도 안바꿀 '호박잎국' 한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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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미의 사는 이야기](31) 세 희(細 喜)...3

장마가 올 듯 말듯 비가 오다말다 해서 마른장마로 올해도 끝이 나나보다 하는 생각을 할 때 즈음이면 며칠씩 세차게 비가 쏟아져 내려서 그런가.

시원한 물에 된장과 식초를 풀어 푸릇한 물내가 물씬 나는 싱싱한 물외나 미역을 잘게 썰어 넣고 훌훌 찬밥 한 그릇 말아 들이키는 냉국이 그리운 날이 점점 많아지는 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인 듯 무더운 날 하루.

가끔 반찬이며, 과일을 맛보라며 한두 개씩 비닐봉다리에 담아 들고 찾아오는 동생이 오늘은 마트에서 장을 봤다며 얌전하게 손질된 호박잎을 들고 와서 주고 갔다.

올해 처음으로 만난 푸릇한 비린내가 기분 좋은 어린 호박잎을 보면서 반갑기도 하고 우습고 창피했던 기억도 떠오르게 된다.

너무 외진 곳이 고향이라 그런 지, 아니면 너무 가난한 시절을 살았던 탓인 지, 밀가루 음식이라고는 고작해야 제사 때나 되어야 볼 수 있었던 막걸리 빵에 겨우 해봐야 부침개정도가 밀가루음식의 전부인 부모님에겐 진하게 국물 내어 끓여먹는 수제비보다는 지천에 널린 호박잎을 뜯어다 박박 문질러 씻어 으깨지다시피 한 호박잎을 풋내가 사라지도록 바글바글 끓이다 밀가루를 건성으로 풀어 덩어리 진채 솥에 주르륵 풀어 넣어 국으로 훌훌 마시는 게 우리 집의 유일한 수제비요리였다.

소금을 손대중으로 휙, 하니 던져 넣고 간간하게 짠맛이 든 그 국은 여름이 되어 호박잎 철이 되면 우리 집에선 빼놓을 수 없는 상차림 이였다.

아파트생활에, 또 채소 심을 땅 한 평 가지지 못한 천성 농군의 자식들인 부모님은 그런 처지를 서글퍼하기도 하고 아쉬움에 마음 상하기도 하지만,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이제도 가끔씩 시장 야채가게에서 호박잎을 사다 국을 끓여먹게 되는 날이면 옛날엔 쇠괴기를 줘도 안 바꿨다고 아버지는 호박잎국 예찬에 침이 마른다. 소고기와도 안바꾼 호박잎 국

그런 부모님의 어린 시절과 달리 나의 어린 시절 호박잎국은 가시가 손에 박혀 아프기만 하고 제대로 밀가루 농도를 맞추기 못해 풀국이 되기 일쑤였던 고난의 음식중 하나다.

어린 시절,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의 손바닥만 빈 땅 귀퉁이에 어머니가 구덩이를 파고신문지에 꽁꽁 싸서 귀하게 얻어온 호박씨 몇 알을 던져 넣어 두둑이 흙을 돋워주고 나면 알아서 비 맞고 해 받으며 여름이 턱에 차게 더워질 때 즈음, 온 담장을 뒤덮으며 뻗어나가는 호박잎을 따다가 저녁에 먹을 국을 끓이곤 했다.
 
내가 밭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호박잎을 따는 몫은 당연히 동생들 차지.
여린 손으로 가시가 잔뜩 박힌 호박잎의 줄기를 꺾는 게 큰 곤욕이던 동생들이 생각했던 방법은 연필 깎는 면도칼로 호박잎 따기.

가시가 없는 호박잎의 한끝을 살그머니 잡고 호박잎의 줄기를 면도칼로 싹둑!
“우와, 잘랐다!”

면도칼로 호박잎을 잘라서 낭푼이에 휙, 던져 넣고 동생들은 신이 나서 코끝에 땀방울을 송글송글 맺혀가며 호박잎 따는 일에 열중하곤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따온 호박잎을 다듬고 씻어 물에 넣고 끓이다 밀가루를 너무 많이 풀어 넣는 사태가 발생하면 국이 아니라 풀이 되어버려서 상에 올리지 못하고 부모님 몰래 슬쩍, 버리기도 하면서 우리 자매들은 호박잎국 끓이는 법을 독파(?)했다.

솔직히 동생들이나 나나 모험심 하나로 부엌에서 먹을거리들을 장만했다. 그래서 가끔씩 먹지 못할 요리(?)를 상에 올려 저녁밥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을 곤욕에 빠뜨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냄비를 불에 올린 채 TV만화영화에 집중하느라 반찬을 통째로 태워 매캐한 내가 진동하는 반찬을 뒤적이다 결국은 맹물에 밥 말아 마농지(마늘장아찌) 한 접시를 놓고 저녁을 먹는 우습고 창피한 추억이 우리 집 밥상에는 존재한다.

그래도 가끔은 어린 시절의 어설픈 손으로 올렸던 진밥이나 타버린 반찬, 혹은 달달한 찌개가 그리울 때가 있다. 어린 동생들과 그 동생들을 그늘 삼아 살아야 했던 시절, 여린 손끝에 가시를 박혀가며 뜯어온 호박잎으로 멀겋게 끓여진 밀가루국 한 대접을 놓고 잘 끓였다며, 달다며 한 그릇 다 비워내시던 부모님의 그을린 눈가에 비치던 이슬로 설움을 달래던 애틋했던 시절의 우리 집 밥상풍경.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빈 땅을 뒤덮은 호박잎은 풍년이 들어 나눌 수 있던 가난한 나눔이 더 행복하고 기뻤던 시절.

그때는 돈으로는 나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지천으로 널려가는 호박잎과 누렇게 익어가는 몇 개 달리지 않은 호박을 돌담너머로 나누며 밥 짓는 내(냄새)나던 저녁의 동네 풍경은 그저 돌담을 따라 걷기만 해도 시장기가 반찬이 되던 시절 이였다.

밀가루 몇 숟가락과 비릿한 풋내 나는 호박잎 한 대접, 그리고 소금 한 숟가락이면 더운 여름 노동으로 지친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이 함께 둘러앉아 행복했던 더운 내나는 호박잎국 한 사발.

더운 여름날 저녁, 애틋한 추억을 가져다 준 동생이 가고 난 자리에 남아있는 푸릇한 호박잎 봉지를 바라보는 마음이 분주해졌다. 오늘은 모처럼 어린 동생들과 불앞에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비지땀 흘려가며 긴장감 가득한 시선으로 국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느라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던 그 때의 풋내 가득 담긴 추억을 한 대접 끓여봐야겠다.

동생들의 그 초롱하고 진지했던 눈빛 없이도 우리의 호박잎국은 성공할 수 있을까? <헤드라인제주>

강윤미씨 그는...
 
   
▲ 강윤미 객원필진
강윤미 님은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강의실을 오가는, 하지만 항상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강윤미 님의 모습은 아랏벌을 훈훈하게 해 줍니다.

그 의 나이, 이제 마흔이 갓 넘어가고 있습니다. 늦깍이로 대학에 입문해 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분입니다.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항상 직면해 있지만, 그는 365일 하루하루를 매우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강윤미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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