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9) 주인장 없는 집에 사진들이 사는 집, 두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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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9) 주인장 없는 집에 사진들이 사는 집, 두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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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엔 가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녹슨 듯 붉은 대문과 크고 작은 나무와 야생화 위로, 수풀 우거진 오솔길에 드문드문 자리한 토우의 얼굴에도…. 얇은 햇살이 어룽거리는 뜰에는 제주 내음이 오롯했다. 발길 닿는 곳곳에 집념의 한 남자가 남겨둔 애련한 이야기가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낙엽을 밀어 올리는 소슬바람 때문인지 어딘지 쓸쓸했다.

끊어지지 않는 끈이라도 연결된 것처럼, 그 집은 바다 건너 나를 잡아당겼다. 어느 해 늦가을, 짐을 꾸렸다. 그 집으로 가는 귤밭에는 가지마다 다복다복 매달린 귤들이 노을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피다 지친 억새 무리는 허리를 흔들어대며 바람을 휘잡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이우는 가을 색으로 물든 오솔길을 지나 ‘김영갑갤러리두모악’ 안으로 들어섰다.

갤러리 모습-〈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가져옴
갤러리 모습-〈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가져옴

사진 앞에 다시 섰다. 바람 부는 중산간에 외로이 선 나무였다. 우듬지를 흔드는 바람결이 내게로 불어올 것만 같았다. 작가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어떤 피사체를 정해놓고 계절 따라 달라지는 풍광을 찍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미세한 흐름을 잡아내고자 했다. 사진은 순간의 예술인지라, 어느 완벽한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하루, 이틀, 사흘, 원하는 컷을 얻을 때까지 그저 기다리던 작가였다. 제주에 홀려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했던 작가의 영혼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선지 고즈넉한 풍경에선 호방한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서늘한 결기가 더불어 흘렀다.

작가의 포토에세이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읽을 땐 뭉클했다. 왜 그토록 핍진한 외길을 걸었던가 답답하기도 했었다. 어떤 사람이길래 이리 혹독한 삶을 살며 제주의 산야에, 사진찍기에 그토록 천착했던 것일까.

작가는 부여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 한양공고를 졸업했다. 1982년부터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진을 찍다가 3년 후 제주에 정착했다. 섬에 살아 보지 않고서는 섬의 외로움과 평화로움을 앵글에 담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제주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들녘과 구름, 오름과 바다, 나무와 억새 등의 자연 풍경을 소재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생업이 따로 없었다. 밥값을 아껴 필름을 사느라 건강을 돌보지도 못했다. 사진에 집중했고 사진을 사랑했기에 작품을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현실의 유혹과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야생인이었다.

갤러리 모습-〈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가져옴
바람-〈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가져옴

2001년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삼달초교 분교를 임대했다. 창고에서 곰팡이꽃이 피어 가는 사진을 전시할 갤러리로 쓰기 위해서였다. 공사 중, 손과 어깨에 이상을 느꼈다. 오십견인 줄만 알았다. 점점 허리 통증을 넘어 걷는 것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도 힘들 지경이 되었고, 생각지도 못한 루게릭(근위축성 측삭경화증)병을 진단받았다. 그런데도, 갤러리 조성하는 일을 계속하며 포기하지 않았고, 2002년 여름 드디어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의 문을 열었다. 2년 후 펴낸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통해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 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너무나 사랑했던, 오직 사진만을 찍었던 사진작가였다. 김영갑은 그런 사람이었다.

일평생 어느 한 분야에 내 몸이 마르도록 열정을 퍼붓는 것이 가능한가. 역사상 일가를 이룬 대가들이나 감내할까 내겐 어림없는 일이다. 세상 즐거운 것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핑계로 포장하고 기꺼이, 스스로 그것들에 유혹당하고 싶어 안달하곤 했다. 이런저런 잡다한 것을 그저 피상적으로 집적이다 돌아서길 여러 번, 무엇 하나 반듯한 게 없으니 때론 가버린 시간을 쓸어 담고 싶을 뿐. 사진 속 깡마른 작가의 고집스러운 표정에 절로 움찔했다.

갤러리 뒤란으로 나섰다. 고적한 무인카페였다. 무인 가게가 생소했던 이 천년 대 중후반, 무인카페 두모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커피를 내려 마시며 쪽빛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들었다. 창밖의 담장과 나무 아래 핀 들꽃과 현무암 조각상을 편안하게 바라보았다.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리며 오래도록 뒤뜰이 주는 호젓함에 잠겼다. 문득, 오는 이의 심연을 열어 그 밑바닥에 침잠해 있는 뭔지 모를 생각의 응어리를 풀어놓게 하는 이곳은, 뭐랄까 두모악이란 이름처럼 오는 이를 담쏙 안아 들이는 작은 한라산이 아닐까 싶었다.

삶에 지치고 여유 없는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서 와서 느끼라고, 이제까지의 모든 삿된 욕망과 껍데기뿐인 허울은 벗어던지라고, 두 눈 크게 뜨지 않으면 놓쳐버릴 삽시간의 환상에 빠져보라고 손짓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주의 진정성을, 제주의 진짜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넉넉한 마음입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김영갑-

작가의 이 글은 우리를 향한 따뜻한 손짓으로 다가온다. 굳어가는 몸으로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작가의 말년이 애절해 더 맑게 느껴진다. 짧은 생이었기에, 너무 아픈 생이었기에 작가의 삶이 애달프다.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예술가의 흔적이 갤러리에 늠실댄다. 질박하고도 고매한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있는 집, 주인장 없는 이 두모악에는 주인장의 사진들이 오불오불 모여 사는 중이다.

그 섬에 있고 싶다. 제주의 은빛 억새 곁에, 바람결에 춤추는 중산간 들녘의 나무 아래, 작가의 제주사랑이 숨 쉬는 소박한 정원과 사진 앞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이 가을에.

갤러리 모습-〈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가져옴
지평선 너머의 꿈-〈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가져옴
수필가 배공순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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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긋 2024-10-25 13:17:19 | 59.***.***.232
제주를 더 제주이게 하는 작가이야기 감동입니다.
가을이 와서 그런지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더 쓸쓸합니다.
그런 느낌을 느끼게 써주신 스토리에 잠시 빠졌네요.
한번 가보고 싶어져요,

여행좋아 2024-10-22 10:34:31 | 59.***.***.232
이 가을에 김영갑작가 이야기를 보니 뭉클하네요.
제주는 참 많은 것이 모여 매력을 풍기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물처럼 흐르는 글, 잘 봤어요~~~

봉글 2024-10-22 09:39:58 | 223.***.***.94
가을 비가 촉촉히 내리는 오늘
이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촉촉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