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들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이끌고 60년 전으로 안내했다. 창단 멤버이셨던 부만근 교수님도 오셨고, 50년 전 활동하셨던 고성효 교수님과 그 당시 활동하셨던 분들도 오셨다. 저는 40년이 조금 더 되었다. ‘하얀박꽃’, ‘보리밭’, ‘남촌’ 이라는 곡들은 적어도 40년 이상 불리워왔다. 서로 떨어져 앉아 있어도, 누가 첫 음만 잡으면 화음을 이루면서 합창을 해낸다. 식당 등에서 그 장면을 보는 분들이 놀랜다. 펼쳐지는 화음의 볼륨에 닭살이 돋는다고 한다. 무반주 합창이 가능할 곡들을 선별해서 무대에 종종 올렸던 덕분이다.
2024년 10월 3일, 제주대학교 칼리오페 동아리 창립제 기념하는 날에 칼리오페 60주년(회장 오승직)과 칼리오페 합창단의 정기연주회를 동시에 겸해서 열었다. 문예회관 1층 로비에서는 롱플레이 디스크와 전축으로 고전음악감상(고성효, 최만제 해설)을 했다. 무대에서는 동문들이 모여 합창을 진행했다. 재학생들은 피아노 공연을 했다. “재학생들 고마워요!” 합창에는 김행중 지휘, 오승직 지휘, 하진성 반주, 김정숙 반주였다. 김경택 플륫 선생님의 찬조에도 감사드린다. 참관해주신 분들은 ‘대단하다’‘엄청나다’‘어떻게 60년이 가능하냐?’등등 칭찬하신다.
이 글에서는 합창을 하면서 느낀, 칼리오페 합창이 주는 즐거움, 매력 등의 정도로 범위를 좁혀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합(合)창은 정신을 같이하는 단합의 느낌을 준다. 그래서, 사소한 물질적인 이해관계나 조금의 갈등 등은 자연스럽게 뛰어넘도록 해준다. 결국은 무대이다. 지휘, 학번, 소양 모두를 뛰어넘고, 합창이라는 정신적 어깨동무를 하게 해준다. 성의껏 입을 크게 벌리고, 지휘 잘 보고, 음 잘 맞추고, 다른 파트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고, 자기 목소리를 파트와 전체에 블랜딩 잘 하게 하는 사람이 칭찬 듣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합(合)창은 과거를 행복하게 소환한다. 노래로 동심을 소환, 즐거움을 준다. 칼리오페의 합창은 대학시절과 어려웠던 인생의 시간들을 소환해 치유해주기도 했다. 서로 간의 상대적 시간 조합인 ‘카이로스’의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마음은 과거를 향하고, 행복은 지금이었다. ‘파노라마’, ‘주마등’이란 단어들이 생각난다.
칼리오페의 합(合)창은 수평적 대화를 통해 진화하는 모습이었다. 눈치 보고, 긴장하거나, 부담스러워 하거나 하는 모습이 아니다. 연습할 때도 서로 의견 표명하고, 자진 신고하면서 음을 잡아가려고 노력한다. 다소 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개인의 해석을 표명하기도 한다. 다른 분들이 보면, “위계가 이상하다. 지휘자에게 어떻게 저런 제안과 저런 해석을 하라고 요구할 수 있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휘자와 40년 이상을 같이 지내왔으니 그런 아름다운 장면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한다. 당근 다른 분들이 보면 이상할 수 밖에 없다. 60년이란 세월이 칼리오페라는 동아리를 ‘가족’공동체의 모습에 더 가깝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에피소드였다고 본다.
칼리오페 합(合)창은 이불속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선배가 이불이라면 후배는 담요일까? 내가 이불이면 후배들은 담요가 되는 것일까? 내가 담요이고 선배님들은 이불이 되었던 것일 듯하다. 저 또한 이불 속에 있는 선배이자 후배의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포용과 관용이 무한한 동아리의 모습이다. 합창이 잘 될 때이면 그 온도는 한참 많이 더 올라간다. 칼리오페 내에 있음으로 따뜻함을 느낀 것이다. 영화 ‘싱포유(sing for you)’가 떠오른다.
칼리오페 동아리와 칼리오페 합창단 구성원들에게는 숙제가 있다. 제주에서 ‘동아리 70년, 80년’이라는 개념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동아리 지속성의 선물이 어떤 모습을 하는지 보여주는 것, 이 또한 칼리오페가 해야하는 사회기여의 한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황경수 / 제주대학교 행정학과(칼리오페 82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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