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8)태곳적 신비, 산방산 용머리 해안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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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8)태곳적 신비, 산방산 용머리 해안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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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은 용머리 해안을 거느린 채 당당하고 우뚝하다. 자연이 빚은 천혜의 조각품을 보듬어서인가. 아무 때나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물때가 허해 주는 어느 시간에야 그 품에 들 수 있을 뿐. 밀당으로 안달 나게 하고, 만나주지 않는 짝사랑 연인을 기다리듯 주변에서 맴돌게 한다. 먼발치서 바라보면, 마치 종을 엎어놓은 모습 같기도 하고 커다란 대접을 엎어놓은 듯도 하다.

비슷한 모양의 산이 미국에도 있다. 애리조나주 세도나의 벨 록(Bell Rock)으로 이름처럼 종 모양을 하고 있다. 붉은 사암 지대에 불쑥 솟아오른 바위산은 웅장하지만, 산방산의 자태를 더욱 조화롭고 아름답게 느끼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늘 푸른 산방산은 완만한 곡선으로 흐르는 실루엣이 힘차고도 넉넉하다. 그뿐이랴, 용머리를 뻗어 넘실거리는 바다에 발을 담근 채 물길을 여닫으며 세상과 소통하니 말이다.

미국 세도나, 벨록(Bell Rock). (사진=배공순)
미국 세도나, 벨록(Bell Rock). (사진=배공순)

그 산방산 입구에 색다른 형상의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찌그러진 소화전 같기도 한 모습에 다가가 보니 조각가가 빚은 작품이 아니라 ‘용암수형’ 鎔巖樹型, 제주 사람들이 ‘고망난돌’이라 부르는 바위다. 용암이 분출할 때 용암과 화산 쇄설물이 수목을 감싼 후 굳어지면서 나무줄기 자체는 높은 열에 사라지고 껍질 형태만 빈 구멍으로 남아있는 보기 드문 형상이다. 화산섬 제주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예술품이리라.

해안 쪽으로 내려가면 바다를 향해 엎드린 용머리를 만난다. 시뻘건 용암으로 튀어 올라 바다로 내달리며 이리 용트림했던 것일까. 산방산은 제주가 태어나던 때랄까, 아득한 옛날에 한라산보다 백만 년이나 먼저 폭발했더란다. 용머리 해안은 그때 분출된 용암이 서서히 흘러 굳으면서 생긴 꿈틀거림 위에 수천만 년의 세월 동안 바다와 비바람이 만들어 놓은 풍광이리라. 암벽의 비밀정원으로 들어갈수록 켜켜이 쌓여 비틀어지고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에 발걸음을 멈춘다. 여기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치올려볼수록, 만져볼수록 유장한 풍광에 빠져들어 간다.

움푹 들어간 굴 방과 드넓은 암벽의 침식 지대는 볼수록 장관이다. 하늘은 티 없이 푸르고 쪽빛 바다는 끝도 없이 펼쳐진 사이로 빚어놓은 명품. 빙벽에 난 아찔한 크레바스처럼, 바위 끝까지 수직의 좁은 골짜기를 만드는 솜씨라니…. 갖가지 돌구멍과 가로줄 무늬와 직선과 곡선과 사선이 어우러진 아름다움, 어느 걸출한 장인인들 이토록 웅대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감탄하며 느리게 걷는다. 얼마쯤 갔을까. 해녀 할머니들이 갓 잡아 올린 전복과 해삼들을 갈무리하고 계신다. 먹음직하고 싱싱한 바다 내음에 끌려 발길을 멈춘다. 고운 문양의 바위를 방석 삼아 푸른 물결에 마음을 띄워놓고 일행과 나눠 마신 ‘한라산’ 한잔이 그리움으로 혀끝에 맴돈다.

산방산과 형제섬. (사진=제주문화곳간)
산방산과 형제섬. (사진=제주문화곳간)

제주는 일만 팔천 신들의 땅. 밟는 곳, 눈길 닿는 처처에 신비로운 신화가 서려 있다. 산방산에도 제주를 만들었다는 화산의 여신, ‘설문대할망’ 신화가 깃들어 있다. 한라산을 의자로 쓸 만큼 거대했던 할망이 앉기에 마뜩잖은 봉우리를 뽑아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 봉우리가 날아와 산방산이 되었고 패인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는 신화의 상상력은 호방하고도 시원스럽다.

그래선지 용머리 해안의 풍광은 사뭇 장엄하게 다가온다. 해안의 악어 같은 산, 저만치 바다 가운데서 마주 보고 있는 형제섬, 이들을 호위하듯 의연한 산방산과 일렁거리는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경관은 매혹적이다. 그뿐 아니라, 바다를 향해 내달리는 용머리 해안은 드넓은 곳을 향해 뻗어나가는 제주인의 꿈을 품고 있는 것만 같다. 거친 섬 척박한 생활 터전에서 고난과 한도 많았으련만,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신화와 아름다운 자연과 올곧은 제주인의 혼이 있었기에 끝내는 독특하고 매력 있는 제주를 일궈냈으리라.

내 작은 꿈도 그곳에 살포시 놓아볼까. 다시, 용머리 해안을 천천히 걷고 싶다. <수필가 배공순>

동트는 산방산. (사진=제주문화곳간)
동트는 산방산. (사진=제주문화곳간)
수필가 배공순<br>
수필가 배공순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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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2024-10-04 14:35:20 | 42.***.***.187
세도나의 벨록과 제주에 대한 지식을 넓혀갑니다. 물 흐르듯 표현이 너무 읽기 편하네요.
잘 읽었어요.

여행좋아 2024-09-23 16:11:38 | 59.***.***.232
고망난돌, 참 재미있는 제주 말이네요.
오래전에 가봐선 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요.
선생님 글을 보니 다시 한번 가고 싶어집니다.
편안하게 술술 읽히는 글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