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인권 이야기] 특별한 배려에서 일상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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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인권 이야기] 특별한 배려에서 일상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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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주환/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윤주환/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윤주환/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을 터트리고 여러 갈림길을 지나오며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형성한다. 유아기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청년기까지 성장하는 동안 형성된 가치관과 행동양식은 생각처럼 쉽게 바꾸지 못하며 처음 발을 내딛는 직장에서의 생활은 나와 상대방의 가치관과 행동이 부딪히게 되어 생각을 공유하고 그에 따른 어려움을 겪는 일의 시작이었다. 필자의 첫 직장인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입사 후 느꼈던 점과 생각의 차이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 배려에 대한 재해석 

나는 사회복지를 전공하였다. 그 당시 나에게 장애인을 대하는 가치관이자 행동양식은 ‘무조건적인 배려’의 대상이었다. 장애인이 부탁하는 것은 웬만하면 당연히 들어줘야 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에 불편함이나 제약이 있을 경우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현재 직장생활을 하는 곳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깨를 맞대고 일하는 곳으로 장애인당사자 조직의 일원이 되어보니 당시에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무조건적으로 생각했던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위험한 고정관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잘못됨을 스스로 자각하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하라’ 역지사지(易地思之)였다. 누구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머리보다 몸이 앞선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상황에서 상대의 의사를 묻지 않고 원치 않는 도움을 제공한다는 것은 무례하고 위선적인 행동일 수 있었으며, 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행한 것들이 상대방에게는 불편한 ‘동정’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직장 선배 중 한 명은 장애인당사자다. 선배가 나에게 해준 말이 있다. “장애인이라고 무조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야. 일방적인 배려와 권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다른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그동안 가졌던 고정된 가치관에 대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이 곳에서 만난 활동가들, 장애인당사자의 상황이나 모습을 보고 나의 감성에 따라 배려하려 했다. 그러면 처음에는 대부분 ’괜찮아요‘라고 답한다. 여기서 내가 느낀 ’배려‘는 거리감이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 나는 당사자에게 선생님이자 사회복지사였다는 것을 느끼고 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사자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가져보았다. 감수성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뭔가 절차를 갖춘 상담이나 욕구사정이 아닌 대화가 필요했다. 서로를 알아가며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레 친해졌고 처음에는 주환쌤, 다음에는 주환씨, 그 다음에는 주환 동생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이제는 내가 찾지 않아도 활동가들이 찾아온다. 물어보지 않아도 이야기한다. 동료들의 요구에 배려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 실천할 뿐이다.

물론 ‘배려’란 좋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이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 불편함, 불리한 사회 환경에 의해 다른 사람들보다 도움이 더욱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해와 편견, 대상과 제공자라는 상하관계로 시작된 ’배려‘는 차별과 분리를 야기하며 그들에 대한 존중을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모 언론사의 칼럼을 보았다. ’장애인 배려 학교‘에 대한 감동의 글 이었다. ’장애인 배려 학교‘ 듣도 보도 못한 단어였다. 해당 글에서 장애인 배려에 대한 근거는 장애인을 위한 높낮이 책상, 장애인 화장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 등 장애인이 편리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설치한 것이었다. 그런데 책상은 맨 뒷자리 고정으로 단 하나만이 설치되어있고 장애인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는 고장이 나 있었다. 이 사실은 칼럼 본문에도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있지만 ’배려‘가 가득한 학교라고 감동적으로 글이 마무리됐다.

장애인이 편리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배려인가? 역사적으로 장애인은 사회에서 분리되거나 차별받아도 불편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고 이 사회는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 주류이자 기준이었기에 장애인의 참여는 대단한 포용이고 극진한 배려였었다. 위 사례가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감성이 아닌 감수성을 가지고 다시 한번 칼럼의 본문을 해석했다. 과연 ’배려‘가 가득한 학교인가? “왜 맨 뒷자리에만 앉아야 하지? 화장실도 편히 못가, 엘리베이터도 관리가 안 돼. 여긴 보여주기식으로 가득한 ’차별‘이 가득한 학교다.”, “장애 비장애를 떠나 모든 학생이 편리하게 학교에 다녀야 하는 건 배려가 아닌 진정한 존중이자 정당한 권리다.”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필자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싶다. 장애인이기 전에 사람이다. 장애인, 비장애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대상을 배려하고 포용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을 오롯이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포함 사회가 되고, 나와 동료들의 관계가 특별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윤주환/ 제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장애인 인권 이야기는...>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단순한 보호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장애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은 치료받아야 할 환자도,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도, 그렇다고 우대받아야할 벼슬도 아니다.

장애인은 장애 그 자체보다도 사회적 편견의 희생자이며, 따라서 장애의 문제는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사)제주장애인인권포럼의 <장애인인권 이야기>에서는 장애인당사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다양하게 풀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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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2024-09-09 13:11:23 | 39.***.***.172
우리모두 평범합니다. 그런 삶을 바랍니다 :-)

으라차차 2024-09-03 13:09:08 | 210.***.***.30
"오롯이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포함 사회" 공감합니다.

탐나는 2024-09-03 11:41:23 | 211.***.***.251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삶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