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7) 하늘호수 천지에서 백록담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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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7) 하늘호수 천지에서 백록담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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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천지 앞에 선다. 웅성거리며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인파들 사이로 나도 살그머니 몸을 들이민다. 온전히 내 앞에 펼쳐진 신비로운 호수를 담뿍 그러안아 본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을 파고들어 마그마처럼 용솟음친다. 천지는 웅장한 바위에 둘러싸인 채 천년, 만년 그래왔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짙푸름 속에 홀로 고요하다.

무탈하게 나이 들어감을 자축하자며 남편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버킷리스트의 하나여서 백두산에 가자는 것으로 순식간에 의기투합했다. 5월에서 9월 사이가 여행하기 좋은 때라, 성수기가 막 시작되는 5월 말로 정했다. 출발일을 정할 때 왠지 끌리던 어느 하루, 그 촉이 신의 한 수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첫날, 연길국제공항에 내려 연변민속촌으로 이동했다.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기와집이나 초가가 즐비하고 정원은 온갖 꽃들로 화사했다. 말씨를 듣자니 현지인이 많았다. 대부분 이삼십 대였고 집마다 골목마다 사람들로 빼곡했다. 한국 여행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중국인들이 한류 문화 체험차 밀려들면서 새로운 답사 명소가 되었단다. 화려한 궁중복식이나 다양한 한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꽃인 양 무리 지어 피어났다.

백두산의 관문 이도백하로 이동했다. 드디어 베이스캠프로 간다고 생각하니 설렜다. 일고여덟 시간씩 걸리던 예전과 달리 몇 년 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두어 시간이면 충분했다. 호텔 시설은 허름했지만, 명산 아래 잠드는 꿈같은 날이라 그러려니 했다.

백두산 천지. 사진=배공순
백두산 천지. 사진=배공순

눈이 뜨이자, 커튼부터 젖혔다. 여린 풀잎 같은 아침 햇살에 예감이 좋다. 백두산 들머리 드넓은 환승장에 도착하자 관광버스에서 내려 전기차로 갈아탄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우거진 숲을 돌고 돌아 달린다. 무성하던 나무는 오를수록 점점 키를 낮추고 급기야 메마른 싸리나무처럼 웅숭그린 채 서 있다. 엄청난 인파 속에 앞사람 뒤통수를 따라 걸어 다시 소형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풀 한 포기 없는 가파른 바윗길을 굽이 돌며 수도 없이 꺾이는 위태위태한 길을 잘도 달린다. 바위산 오르막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뒤따라오는 차량과 내려가는 버스들의 개미 같은 행렬이 장관을 연출한다. 창밖을 바라보는 이들 대부분은 인천공항에서 날아간 여행객 아닐까. 우리 마음속에 면면히 살아있는 백두산이건만, 중국 땅을 밟고 올라야 하는 묘한 감정을 말없이 공유하는 듯 보였다.

이윽고 정상에 서자, 햇살에 빛나는 백두산이 천지를 활짝 열어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벅차고 벅찼다. 어마어마한 크기와 신령스러운 물빛, 범접할 수 없는 그 위용은 말로는 다 하기 어려웠다. 일년내내 거센 바람과 폭우가 잦아 백번을 올라야 두 번쯤 볼 수 있다는데, 그 백두산 천지를 한 방에 마주하는 쾌감이라니…. 남편과 나는 두 팔을 번쩍 치켜올리며 환호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멋지게 달성한 셈이라 무엇을 본들 그것은 덤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바람 없는 포근한 날씨는 최고의 축복이었다. 이런 날은 손에 꼽을 정도라며 벙글대던 가이드가 돌아오는 길에선 마치 자신이 죄다 준비한 듯 거들먹거렸다. 일행의 얼굴은 웃음과 환희로 빛났고 서로 축하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저녁 먹는 자리까지 감동은 이어졌고, 완벽한 천지를 친견한 행복을 담아 축배를 들었다.

꿀잠을 자고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누군가 남편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성주야! 넌 어디 학교 나왔는데?” 짐짓 시비조였지만, 얼굴엔 반가움이 흘렀다. 내가 먼저 예약하는 바람에 남편이 합류하지 못해 듣는 소리였다. 이십여 명이 백두산에 왔고 같은 호텔에 이틀을 묵는 일정이라 반가운 해후가 이뤄졌다. 기대감에 가득 찬 그들 표정과 달리 일기예보 소식은 좋지 않았다. 어제 그리도 쾌청하던 백두산에 비바람이 치고 있다는 것. 더구나 오후부턴 눈까지 내린다니 십중팔구 입산 금지가 내려질 거란다. 백두산의 축복을 미리, 남김없이 차지해 버린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한다니 요행을 바라는 수밖에…. 나중에 들은 소식은 백두산자락 장백폭포만 먼발치서 보고 돌아섰다는 거였다. 하루 사이에 희비가 갈리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는 일인가 보았다.

연변 민속촌. 사진=배공순
연변 민속촌. 사진=배공순

천지에 섰을 때 언젠가 TV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었다. 개그맨 이경규 씨가 미리 담아 간 백록담 물을 천지에 합수하는 모습이었다. 짙은 안개로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두와 한라의 물이 하나로 합해지는 자체로 감동이 몰려왔다. 나도 흙이라도 한 움큼 품고 갈 걸, 그래서 백두산에 살포시 포개놓고 왔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백록담을 향해 우리나라 지도를 떠올리며 팔을 뻗었다. 함경남도를 지나 강원도와 서울, 경기도를 거쳐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지나자, 제주였다. 어슷한 일직선으로 천지와 백록담은 하나였다. 한반도 땅에 몸 붙인 우리도 그러한 것을. 언제쯤에나 천지와 백록담 물이 흔연스레 섞이듯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잔물결조차 없는 천지는 묵묵부답, 청미하게 빛날 뿐이었다.

백두산 그늘을 떠나자니 두 번에 걸쳐 올랐던 한라산이 눈에 어린다. 여고 동창 삼십여 명이 육십 년 세월을 등에 메고 올랐던, 3월 말의 한라산은 쉬이 곁을 내주지 않았다. 산자락에서 지레 겁먹고 돌아선 친구가 있는가 하면, 사라오름 입구나 진달래밭 대피소에 주저앉기도 했다. 녹다 만 얼음과 잔설에 미끄러지며 올라야 하는 구간이 많았다. 예전의 등산과는 달랐으니, 이 길을 되짚어 돌아갈 걱정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마침 출발 때부터 다리가 아프다던 희복이가 더는 못 간다며 옴짝 못하자, 의리를 앞세워 부축하며 함께 뒤돌아섰다. 1,600미터 고지에서, 포기도 용기라며….

또 한 번의 한라산 등반, 학창 시절 백록담에서의 그 하룻밤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한여름 태양을 이고 타는 듯한 목마름과 배낭의 무게를 견디며 한발 한발 올랐다. 이 골짝 저 골짝 옮겨 흐르는 산안개가 나를 휘감을 때, 그 푹신한 안개 위에 누워 마냥 쉬고 싶기도 했다. 봉우리에서 보던 한라산의 자태는 신비했고, 그 산에 안긴 백록담은 노을에 물들어 아름다웠다. 푸른 호수는 지친 나를 포근하게 품어 재웠다. 그렇게 내 젊음의 한때가 스며있는 한라산은, 백록담은, 꺾이지 않는 의지를 가진 이에게만 길을 터주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눈을 감고 백록담에 그득한 쪽빛 성스러움을 그려본다. 호수 가득 물이 차오르면 천지와 형제처럼 닮은 모습이 아닐까. 아마도 옛적 어느 때는 그랬을 거였다. 흰 사슴이 내려와 목을 축이고, 신선들이 백록주를 마시며 놀았더라는 백록담이 아닌가. 사슴인 듯, 백록담 풀밭에 내려서서 처음 만나던 때의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우리의 영산, 오랜 시간을 건너 한라산에 이어 백두산에 나의 발바닥 지문을 남겨서인가. 감회가 남다르다. 다른 여행지를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여운을 안고 천천히 좌석 벨트를 잡아맨다. <수필가 배공순>

백두산 천지.사진=배공순
백두산 천지.사진=배공순
수필가 배공순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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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야 2024-08-27 09:24:24 | 59.***.***.232
어머, 언제 또 백두산엘 가셨어요.
날씨가 너무 쾌청하고 천지도 세상에 티없이 맑네요.
글에 있듯 백두산이 딱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복이 참 많으세요~~

봉래 2024-08-26 18:52:41 | 211.***.***.4
퇴근길에 수필가님 글을 읽고나니 힐링이 됩니다
마치 내가 제주에 있는듯 합니다~

여행좋아 2024-08-26 08:56:31 | 59.***.***.232
한라산과 백두산을 여행한 경험을 민족의 감정과 이어서 쓰신 글이라
뭉클한 느낌이 있네요. 천지의 장엄한 모습도 너무 멋집니다.
다음 글은 어디를 보여주실 건가요.

백두대간 2024-08-22 18:29:42 | 221.***.***.74
한라에서 백두까지 영산을, 같이 가지 않아도 몸으로 느끼게 되는군요.
의미있는 여행 축하드리고, 표현 한마디 한마디가 정겹습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드려요.